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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사나다 3대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3호(2000년 가을호) 50~65쪽의 기사인《사나다 삼대真田三代》를 번역한 것입니다. 대대로 뛰어난 무장이 나와 전국시대 이야기에서도 꿇리지 않는 입지를 구축한 사나다 가문, 특히 유키쓰나(真田幸綱=유키타카), 마사유키真田昌幸, 노부시게(真田信繁=유키무라幸村) 3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오야마 이타루大山格 씨입니다.(1차 저작권자와 마찰이 생길 시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퍼가실 때는 출처표기 부탁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勇 - 사나다 노부시게》


  오사카 성에 내걸린 심홍색赤無地 깃발

  케이죠 19년(1614) 10월,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최후통첩을 들이밀고, 이를 받은 도요토미 씨는 여러 영주大名들과 로닌牢人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노부시게의 유배지에도 도요토미 씨의 밀정이 찾아와, 준비금으로 황금 200매, 은 30관이라는 대금을 지참하며 참전을 요구했다.

  이만한 군자금이 있으면, 노부시게는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준비를 할 수 있다. 이대로 유배자로 죽기에는, 너무나 적막한 생애이다. 지금은 도쿠가와 막부의 도자마 영주外樣大名가 된 형 노부유키信之의 입장을 고려하면 다시 이에야스와 적대하는 데는 괴로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전쟁터에서 지휘채를 휘두르는 길을 선택했다.

  노부시게를 따르던 자들은 큰아들 다이스케(大助, 유키마사幸昌)와 유배지에서 함께 생활해던 근신近臣들 외에도 쿠도야마 주변의 토착무사들이 가담하여, 그 수 500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노부시게가 오사카 성大坂城에 들어가자, 우에다의 노부유키 밑을 떠나 달려온 무사들이 130명 정도 가세했다.

  여러 영주들 중에서 도요토미 씨의 편을 든 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전국의 로닌들은 앞다투어 오사카 성으로 밀어닥쳤다. 그 중에서는 노부시게와 같이 옛 신하들을 인솔하던 자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아시가루足輕, 잡병들을 긁어 모은다 하더라도, 마음이 통하는 부하들을 조직의 간부로서 임용한다면, 결코 약한 군대가 될 수 없다.

  노부시게는 자기 군대 모두에게 붉은 갑옷을 입히고, 깃발과 사시모노병사들이 전장에서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등에다 꽂았던 작은 깃발)를 심홍색으로 통일했다. 과거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근린 영주들을 떨게 만들었던 붉은 부대(赤備え, 아카조나에)의 재래였다. 붉은 부대는, 좋든 나쁘든 대단히 눈에 띈다. 이와 같은 차림을 한 병사들은 무리해서라도 열심히 싸우게 될 것이다.

  이에야스의 군대가 대동원되고 있을 때, 오사카 성은 매일과 같이 군사회의軍議가 열렸다. 그 석상에서 노부시게가 주장한 의견은 적극적인 출격책으로, 죽음의 병상에서 마사유키가 남긴 전략안을 밑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일시적이나마 키나이機內를 제압하여, 도쿠가와 쪽의 동요를 유도하는 게 출격책의 골자였다. 이 안에는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들이 찬성했으나, 도요토미 씨의 후다이 가신들의 반대로 인해, 농성을 전제로 한 소극책이 결정되어 마사유키가 예언한 그대로 되었다.

  아무리 오사카 성이 천하무쌍의 대성채라도, 완전히 포위된다면 언젠가는 군량이 떨어진다. 원군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농성하는 것은 책략이 없는 것無策과 마찬가지이다. 안타깝지만 노부시게는 객장으로, 고용주인 도요토미 씨에게 의견을 끝까지 관철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편, 작전에도 제약이 걸렸다. 행동범위는 성의 주변으로 한정되게 된 것이다. 노부시게는 마음대로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작아도 자기의 재능으로 싸울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외성出丸을 쌓은 것이다.

  전략, 작전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노부시게에게는, 전술만이 남겨진 선택지였다. 적극적인 공세방어가 그것이었다. 노부시게는 적을 도발하여 쌓아놓은 외성으로 끌어들여서는, 화살과 조총을 소나기처럼 쏘아댔다. 밀어닥친 공격군을 차례차례로 격파한 노부시게의 무명은 올라가, 이 외성은 언제부턴가 사나다마루真田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화의를 요청하여, 일단은 철수하게 되었다. 화의의 조건으로서 오사카 성의 외곽을 파괴한다는 약속을 맺은 것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사나다마루는 파괴되고, 바깥 해자는 메워지고, 니노마루의 일부도 파괴되었으며 안쪽 해자도 메워졌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성이 된 오사카 성이었으나, 그래도 이에야스가 두려워한 것은 노부시게의 존재였다. 이에야스는 마사유키昌幸의 동생인 하타모토旗本 사나다 노부타다真田信尹를 노부시게에게 보내, 이에야스를 섬기라고 권유했다. 10만 석을 주어 등용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으나, 노부시게는 공수표가 아닐까 의심하면서,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씨와 진정으로 화해를 맺는다면 1천 석이라도 좋으니 출사出仕하겠다고 답했다. 그 후, 이에야스는 시나노 전역信濃一國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노부시게는 사신에게 대면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노부시게 이외의 주된 무장들에게도 이에야스로부터 출사권유가 왔으나, 원래 스파이로서 잠입한 자들을 별도로 하면, 그 누구도 이에야스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았다. 무장으로서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도요토미 씨와 운명을 같이 하며 싸워나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야스 본진 궤란潰亂! 노부시게 최후의 용전

  다시 이에야스가 일본 전역의 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린 것은, 거짓 화의로부터 4개월이 지난 후였다. 오사카 성의 안쪽 해자를 간신히 허리 높이까지 다시 팠을 뿐, 성으로서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도요토미 씨는, 싫더라도 야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군사회의 자리에서, 노부시게는 다시 적극적인 출격책을 제안했다. 교토京를 제압하고, 우지宇治 / 세타瀨田의 다리를 불태우고, 나라奈良 분지에까지 진출한다는 것이다. 이 지경에 와서도 아직 도요토미의 후다이 가신들은 로닌들의 배신을 걱정했기에, 군의는 결말이 나지 않았다.

  군사회의의 모습에 대해 다양한 일화가 남았으나, 그 어느 쪽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제의 전투경과를 본다면, 도무지 오사카 쪽의 각 부대에게는 정돈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누구도 군사회의의 결과 따위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리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그것 뿐이다. 자신이 죽는 것을 누구에게 허락을 청해야 하는가. 이러한 남자들의 넋두리가 필자에게는 들려온다.

  노부시게는 성이 함락되는 전날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날에는 차우스 산茶臼山에 진을 쳤다. 약간 높은 진지로부터 도쿠가와 측의 대군을 바라다보며, 노부시게는 병사들에게 창을 내려놓고, 진가사(陳笠, 군용 삿갓)와 투구

덧글

  • 재팔 2014/02/15 17:06 # 답글

    그러고보니 시바 료타로의 묘사긴 하지만, 성채에서 이에야스와 중신들이 되게 탄식하는 게, 세키가하라 이후의 도쿠가와 무사들이 세대가 바뀌면서 무사보단 행정관료 체질로 다들 바뀌어버렸다... 는 점이죠 ㅋ
  • 3인칭관찰자 2014/02/15 19:07 #

    대체적으로 도쿠가와 쪽은 세키가하라 이후 15년간 전쟁이 없던 시기동안 군사지휘관들이 세대교체가 된 상태였죠. 도쿠가와 4천왕이라고 불리던 자들도 이미 모두 죽고 없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도쿠가와 본군은 싸우기 위한 군대라기보다는 전열에서 싸우는 도자마 영주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한 체제로 변해가지 않았나 싶네요. 오사카 여름의 마지막 전투를 제외하면 이에야스나 히데타다 본군이 싸운 적은없고 대부분 도자마 영주들이 전선에서 싸웠으니까요.
  • 도연초 2014/02/17 13:30 #

    그래서 시마바라의 난 때 우세한 군세를 가지고(거기다가 토벌군으로 소집된 세력중 대부분이 임진왜란, 정유재란, 세키가하라, 오사카 공성전 경험자들이 다수였음에도) 3~4개월을 고생했던거군요;;

    그 이후에도 에도 시대 여러 지역의 잇키 진압에도(특히 대기근이 창궐하던 시절) 쩔쩔맸던걸 보면.
  • 3인칭관찰자 2014/02/17 17:58 #

    시마바라의 난 때도 큐슈의 도자마 영주들을 동원해서 잇키를 토벌했습니다만 막부가 초반에 실수한 게 그 감독관겸 실질적 총대장으로 1만 2천석의 소영주인 이타쿠라 시게마사를 보냈기에 오사카 전투처럼 오고쇼와 쇼군이 직접 도자마 영주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전선으로 내몰만한 카리스마가 없었죠. 따라서 도자마 영주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데 실패했구요.(오히려 아마쿠사 시로라는 카리스마를 가진 잇키 쪽이 단합력에 있어서는 토벌군보다 앞섰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 다음에 파견된 마쓰다이라 마사쓰나가 적이 굶주려쓰러질 때까지 군량 공격을 하고 총공격을 감행했음에도 공격 측에서 천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걸 보면 의외로 농민군이 전투에 능했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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