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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쇼와사》선열한 기억 (2) ┣ 私の昭和史 (完)


  이 글은 이와나미 신서岩波新書《나의 쇼와사》p. 47~60을 번역한 글입니다.


  일본인으로서 위안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일본에 돌아간 이후 조사해보았는데, 이렇게 일본군 장병의 성 배출구로서 혹사당한 조선여성의 수는 6만 명이라고도, 8만 명이라고도 한다. 전시통계에조차 잡히지 않은 가련한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이렇게 되기 전에는 하나 같이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로 가기 위해 배에 탔을 때, 그녀들의 신분을 증명해 줄 근거가 없었기에, 전쟁자재로서 취급받았다고 하니 경악할 이야기이다.

  그리고 패전. 그녀들의 뒷 일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대부분이 현지에 남겨졌거나, 버림받았다는 사실 뿐이다. 물론, 그녀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이는 추측의 영역을 넘지 않지만, 대략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현지에 그대로 남아서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일본의 항구도시 변두리에서 죽은 듯이 시들어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잔혹한 이야기人間殘酷物語의 극치가 아닐까.  

  경제번영에 취한 일본인은 고작 40년 전의 일조차 잊어버렸다. 거기에다 조선인 종군위안부의 이야기 따윈, 누구나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나는 (이 풍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의 남편과, 당신들의 아이들 - 그들은 이미 야스쿠니靖國의 신들이 되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현재 정력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남편과 아이들 중에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라고 각오하고, 오늘로 끝날 목숨이라고 체념한 채로, 그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조선인 종군위안부의 배 위에서, "이것이 살아있는 마지막 증표" 라며, 스스로의 생명을 연소시켜 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전쟁이라는 부조리의 극한 상황하에서 일어난 이 특수한 사건을, 지금 와서 문제삼으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야스쿠니 신사 유지파와 추진파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지금의 번영을 누리는 건 야스쿠니의 영령들이 가져다 준 것" 이라고 한다. 그런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적으로 유지하는 것과 야스쿠니 신사에 각료들이 공식으로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들 한다. 그럼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야스쿠니의 신령들에 일순一瞬의 삶의 위안을 제공해 주고 죽음의 여행을 배웅해 준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의 그 비참한 희생은,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라고. 그리고 한편으로, 중국 군민 2천만 명의 희생, 동남아시아 군민 8백만 명의 희생을 어떻게 취급하실 겁니까, 라고.

  전쟁이란, 국가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과 집단 사이가 벌이는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싸움이긴 하지만, 단지 그렇게만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아무래도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으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좋은 사례는 바로 작금의 우리 나라(일본)의 현상, 즉 2차대전의 교훈과 반성을 잊어버린 세태이다. 이렇게 개인으로서, 그리고 국가로서의 책임은 이미 망각의 저편으로 넘겨버린 듯하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 나라의 장래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 때, 나는 43년 전, 중국에서 조선인 前 종군위안부에게서 들은,
  
  "에에이, 너희들!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라는 피를 토하는 듯한 말을, 어제의 일처럼 떠올리게 된다. 


   <2> 중국군에서의 체험


  패전국의 군대

  제 58사단은 패전 후 귀국을 기다리는 동안의 집결지를 주장九江 주변으로 제한당하여, 이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땅에 뿌리박기까지 우리들은 무장한 채로 전시행군을 계속해 왔으나, 중국군이나 중국인들과 이렇다 할 트러블은 없었다.

  중국인이란 기이한 국민이다. 메이지 이래, 우리 나라는 국가로서 어떠한 우호를 중국과 해 온 것일까, 그리고 15년 전쟁을 일으킨 이래, 우리 나라는 중국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짓은 다 해 왔다. 그리고 지금, 입장은 역전되어 중국은 전승국이 되었다. 우리들이 과거에 중국군에게 해 온 처치를 중국군에게 받는다 해도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은 달랐다.

  중국군 총참모장 허잉친何應欽 장군은 "폭暴에는 정情으로 보답하라." 고 엄하게 전군에 포고하고, "이를 기본으로 일본군에 대응하라" 고 지도하였다. 

  주둔이라고 해도 딱히 막사가 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패전국의 군대이다. 우리들 대대 본부의 장교에게는 어느 비구니 절의 부속건물이 제공되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손으로 지은 판잣집에 살았다. 그러나 일마 안 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여, 장병들은 모두 설레 있었다. 군기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엄정히 유지되었다.

  병사의 군무軍務는 모두 끝나고, 무얼 할 게 없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의 생활에 대비한 각종 직업교육이 활발히 실시되었다. 그리고 농가의 작업을 도우는 일에 병사들은 앞다투어 출동했다. 이 일은 큰 호평을 얻었다. 무엇보다 일이 수월하고, 그리고 일할 준비가 되어 있고, 농업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각 부대를 찾아오는 중국 농민의 수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그 다수는 병사들의 도움에 대한 답례적 성격이었으나, 그 중에는 이름을 부르며 "부디 우리 집의 양자가 되어 도와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오랜 전쟁으로 중국에서 적령기의 젊은이는 극도로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일중 우호에 있어서는 정말로 면목없는 이야기" 라고 각 부대의 간부들이 투덜대는 것을 나는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덧글

  • 도연초 2014/01/21 17:46 # 답글

    희대의 인도주의자 이마이 다케오와 창사방면군 사령관으로 주둔군을 단속해 전범행위없이 내지로 귀환케 한 가사하라 유키오 등 중국측에 좋은 감정을 가질만한 일본군 인사들이 전후 중일관계 개선에 막대한 노력을 했고 8~90년대 일본정치계에서 조선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자발적으로 말한 총리나 국회의원이 존재했지만 지금 정치판은........... 정말 세대가 한번 거칠까말까한 시대에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은.........

    (전쟁세대나 전직 일본군출신들은 자기가 무슨짓을 했는지 보고 겪었으니 조금이나마 양심이 있는것일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니)
  • 3인칭관찰자 2014/01/21 18:55 #

    정말로 전후세대로 갈수록 더욱 점입가경인 듯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마이 다케오를 희대의 인도주의자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 무슨 좋은 일이라도 한건가요?
  • 도연초 2014/01/21 22:00 #

    노구교사건때 전쟁으로 번지는걸 앞장서서 교섭해서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재수없게도 고노에 내각이 개전선언을 할 때 중일전쟁 개시, 그뒤에도 국민당과 계속 접촉해서 전쟁을 막는데 노력했지만 역시 허사로 돌아간데다

    이후 필리핀으로 배속됬을때 바탄반도에서 승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후 '포로를 처형하라'라는 명령이 전달되자(이 명령의 출처가 다름아닌 츠지 마사노부) 의구심을 품고 자기가 잡은 미군, 필리핀군을 무장해제시켜 놓아주기도 했고

    전후 하응흠과 함께 중국내륙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일본군을 별 탈없이 본토로 귀환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라는데.....(만주국에 있던 거주자나 관동군은 중공군이나 소련군에 잡혀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했으니... 근데 이 업적은 일본인의 입장에서만은 좋은 거겠지만 무책임하게 내버려두고 가지 않았으니) 일단 좋은 업적은 이게 전부....

    이 사람의 인생을 압축하자면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전쟁과 학살을 삼가는 길을 택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도 될지도
  • 3인칭관찰자 2014/01/21 22:26 #

    그랬군요. 저는 츠지 마사노부의 바탄 학살에서의 악행을 증언한 사람이자, 패전 직전에 종전공작을 시도한 사람 정도로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노구교, 전후 군인 복원 등에 기여하는 등 그것보다 더 훌륭한 일을 했나 보네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진냥 2014/01/21 22:35 # 답글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야스쿠니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패전국,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견뎌내며 열심히 살아온 사람둘에 의해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은 제삼자의 멋대로의 생각일까요...
    이 번역 매번 기대하고 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4/01/21 23:03 #

    그 전쟁에서 혈육을 잃어 야스쿠니로 보낸 사람이라면 그들의 희생으로 자기들이 번영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패전 후 폐허 위에서 다시 일어서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전후의 일본을 이룩한 게 사실일 듯 합니다.

    거듭해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군위안부 이야기는 끝났기에 앞으로의 이야기는 중국인들과의 에피소드가 될 듯 하네요 ㅎㅎ
  • 비도승우 2015/05/18 00:28 # 삭제 답글

    이마이다케오는 소장시절 직접 변복후 국민당군 전초지역으로들어가 하응흠상장과 평화협약에대한 담판을 한적이있습니다.
    물론 이치고작전이후 패색이짙어가던 1945년봄무렵이고 오카무라야스지대장이나 기타 지나군총사령부와 협의된상황이었죠. 대본영에는 비밀로 했던것으로 알고있어요. 그리고 이글보며또느끼는게 일본인의 민족성은 이해하기힘들다는거. 포로가되면 막상 매우 온순했다는기록들처럼 전쟁이 끝나니 다들 왜이리 양심적이고 선해지는건지.. 대략 정신이 멍할정도에요.
  • 3인칭관찰자 2015/05/18 20:36 #

    종전공작에 이마이 다케오가 관여하였었군요. 1945년이라면 이미 대세가 기운 판이니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지만은, 그래도 일억특공 운운하던 자들보다는 많이 깨어 있다고 해야할지.(....)

    일본인들은 강자에게 약하기 때문이라고 퉁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들을 막장으로 몰고 가던 흉흉한 군중심리가 일거에 붕괴한 게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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