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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켄신》카와나카지마 전투 (完) 역사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8 上杉謙信》에서 우에스기 켄신의 전투를 다룬 파트 세 번째 장으로, P. 45~52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고노 오사무河野收 씨. 위 서적은 1988년에 출간된 책이라 시대에 따른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 하치만바라八幡原 전투 
 
   <3> 신겐의 책략에도 움직이지 않다
 

  카이즈 성주海津城主 코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가 올린 봉화로 급보를 보고받은 신겐은, 8월 18일 고후甲府를 출발하여 스와諏訪, 와다和田 고개를 거쳐 마루코丸子의 코시腰 언덕을 넘은 후,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사이죠 산妻女山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무로가室賀 고개, 야마다山田, 와카미야 하치만若宮八幡 동쪽 편, 시오자키鹽崎를 넘어 24일 챠우스 산茶臼山에 진출했다. 고후를 출발할 때의 병력은 1만 7천 명으로, 여기에다 도중에 시나노信濃의 장병들이 합류하였다.

   (다케다 군이) 시오자키 부근을 북진하여, 행군하는 종대가 옆구리를 비쳤을 때가 사이죠 산에서 공격할 좋은 기회였으나 카이즈 성의 부대에게 배후를 공격받을 위험이 있다. 켄신은 가만히 못 본척 했다. 이로써, 켄신 본대는 카이즈와 챠우스 산 부대에 끼어서 퇴로를 차단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불안해진 장병들 중에서는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에 남긴 2만 명으로 챠우스 산을 공격하게 하자" 는 의견을 말하는 자도 있었고, 가스가 산성이 습격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켄신은, "적이 가스가 산성을 공격한다면 이쪽도 고후를 점령하면 된다" 고 말하며 태연하였다.    

  신겐信玄의 본대도 역시 사이죠 산과 젠코사 부대에 끼인 형세가 되었다. 신겐은 우에스기 군의 불안심리를 부추겨, 그들이 퇴각할 때 습격할 생각이었으리라, 이제부턴 인내심 싸움이었다. 신겐으로서는 켄신이 물러나 주면 된다. 그 뒤로는 득의의 전략적 수단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를 손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바라는 의식차가, 신겐을 참기 힘들게 했다.    

  8월 29일, 도착한지 5일 째, 신겐은 차우스 산의 진을 걷어내고 챠우스 산 북쪽의 카와나카지마를 가로질러, 히로세廣瀨 나루터를 거쳐 카이즈 성에 들어가 합계 2만의 병력을 장악했다. 이런 적전횡행敵前橫行은 대단히 위험했다. 대포나 미사일이 있는 근대전이라면 측면에서 사격을 받기에 우선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의 병기라면 여기까지 닿지 않고, 켄신이 공격한다고 해도 치쿠마 강千曲川을 건너는 동안에 신겐이 태세를 정비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도하하여 공격하는 쪽 - 켄신이 불리해진다. 켄신은 여전히 여기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에스기 군은 점점 식량도 부족해져 갔고, 사기도 떨어졌다. 퇴각하면 우세한 다케다 군에 추격당할 것 같고, 열세한 부대로 카이즈 성을 공격하는 것도 무모하다. 장병들은 불안으로 인해 동요했다. 그러나 켄신은 유유히 비파를 뜯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켄신은 무라카미村上나 오가사와라小笠原의 옛 신하들이 다케다를 배신하여 모여들지 않은 현 상황을 보고, 시나노의 제장들을 단념하고, 철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켄신이 출병한 목적은 다케다에게 쫓겨난 시나노 제장들의 구원이다. 막상 구원 대상자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려 하지 않는데 에치고 병사들만이 피를 흘려 싸워야 할 필요는 없다. 장병들은 물론, 켄신도 이런 기분으로 철퇴의 기회를 기다린 것이 당연하다. 영토욕이 적은 켄신으로서는 최소한, 국경의 안전만 확보된다면 되는 것이었기에.  신겐은, 퇴로를 막고 협공태세를 취해도, 적 앞을 가로질러보아도, 카이즈 성에 집결하여 퇴로를 열어 주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켄신의 꿍꿍이를 읽기 힘들었다. 보급선이 긴 다케다 군은 우에스기 군 이상으로 힘들다. 거기에다 우에스기 쪽은 가스가 산성으로부터 원군을 불러오는 수단도 있다. 켄신보다 신겐 쪽이 초조함이 더했다.    


   <4> 적이 오기 전에 일거에 공격하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신겐은 9월 9일의 군사회의에서, 내일 10일 사이죠 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가 현책한 유명한 "딱따구리 전법"이다. 실제로는 야마모토 간스케가 다케다 군의 작전계획에 기여할 정도의 지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의문이다.

   어찌됐든, 이 계획에서는 코사카 마사노부가 이끄는 우회부대 1만 2천 명이 10일 오전 0시에 카이즈 성을 출발하여, 사이죠西条, 카라키도唐木道, 모리노히라森の平, 오오미네 산大峰山을 겨쳐 사이죠 산의 남쪽에 도착, 오전 6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한다. 신겐 본대 8천 명은, 오전 4시 경 카이즈 성을 출발, 히로세 나루터를 건너 하치만바라八幡原에 본진을 치고, 쓰나지마綱島에서 서 데라오西寺尾에 걸쳐서 서쪽을 마주하는 형태로【 12단 학익진 】을 쳤다. 우에스기 군은 이기든 지든 사이죠 산을 내려와 카와나카지마를 북상하여 8시 쯤에는 하치만바라에 나타날 것이니, 신겐 본대가 이를 측면에서 공격해서 큰 타격을 주겠다는 구상이었다.

  신겐은 6~7할의 승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우에스기 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남쪽 방향으로는 포진하지 않고, 적의 퇴로를 열어주는 서쪽 방향으로 포진해 있었다. 다케다 군은 내일 행동에 필요한 도시락을 싸기 위해서, 평소보다도 많은 양의 밥을 지었다. 

  싸움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켄신은, 이 취사연기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내일 다케다 군이 움직인다" 고 판단하여, 용사 100여명을 남겨서 곳곳에 종이깃발을 세우고, 35개 소에 화톳불을 피워서 주력부대가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9일 오후 11시 경에 전 병력을 이끌고 사이죠 산을 내려와,【 채찍 소리 고요하게 】3곳의 얕은 물을 건너서 치쿠마 강을 도하했다.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直江山城守를 단바지마丹波島로 선행시키고, 아마카스 오미노카미甘糟近江守의 1천 명을 치쿠마 강가에 남겨 다케다의 우회부대를 저지하게 한 후, 주력군 6천 명은 3개 종대로 단바지마의 나루터로 향했다.

  우에스기 군은, 이날 밤 적의 정찰병 17명을 모두 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우에스기 군의 행동은 완전히 비닉秘匿되어 다케다 군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신겐은 첩자와 닌자를 잘 썼다고 하지만, 우에스기 군의 대 정보조직은 그 이상으로 대단했던 것이다.

   우에스기 군이 미리 수레바퀴 회전진(車懸りの陳, 차륜진)을 쳐 놓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신겐 본대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설이 있으나, 3개 종대로 전진하는 도중, 오전 6기에 안개가 걷히자 오른쪽 편에 신겐의 본대가 보였기에, 선두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는 게 실상일 것이다. 지켜보니 병력은 아군보다 적고, 신겐 자신도 이 곳에 있다. "신겐을 쓰러뜨릴 기회다!" 고 하여, 맹렬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신겐 본대에서는 신겐의 동생 노부시게信繁, 모로즈미 마사키요諸角昌淸, 야마모토 간스케 등이 전사, 장남인 요시노부義信도 부상당하고 신겐 자신도 켄신이라고도 하는 인물이 휘두른 칼에 부상을 입는 등,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밥 짓는 연기를 보고 적의 의도를 알아채고 적보다 한 발 앞서 행동하여, 우회부대에게는 사이죠 산을 헛돌게 하고 소수의 신겐 본대에 공격을 가하여 괴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여기까지는 켄신의 의도대로다. 다케다의 우회부대는 산지에서의 야간행군에 시간이 걸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사이죠 산에 도착했으나, 여기는 이미 모두가 철퇴하고 없는 빈 진채로, 멀리 하치만바라 방면에서는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우회부대가 급히 치쿠마 강을 건너, 아마카스 부대를 구축하고 우에스기 군의 배후에 다다른 것은 오전 10시 경이었다. 형세는 역전, 협공받은 우에스기 군은 서서히 압박당하여, 오오츠카大塚, 단바지마 부근에서 사이가와 강을 건너 젠코사善光寺 방면으로 퇴각했다. 궤주 상태였다고 한다. 신겐은 하치만바라에서 승리의 나팔을 불었다. 이 때가 오후 4시였다고 한다. 전반부의 전투는 4시간, 후반부의 전투는 6시간이 약간 안 되는 동안 행해진 것이다.

  켄신은 젠코사에서 남은 병력 4000명을 장악하여, 10월 상순 가스가 산성으로 돌아갔다. 신겐은 일단 하치만바라에 전군을 집결시킨 후 오후 10시 경 카이즈 성에 들어가, 다음 날 성을 나와 고후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손실은 우에스기 군 사상자 72%, 다케다 군 사상자 88%라고 한다. 전국시대에서도 드문 격전으로, 보통이라면 패닉에 빠질만한 사상률이다. 이렇게까지 싸운 양군의 정예함은 대단한 것이다.  

  이 싸움에 대해선, 양군 모두 자신의 승리를 선언한 바 있다. 공평하게 보아, 전반은 우에스기의 승리 / 후반은 다케다의 승리, 데미지를 더 준 쪽으로 본다면 우에스기의 승리 / 지역확보의 점에서 본다면 다케다 군의 승리, 종합하여 무승부다.


  《제 5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 시오자키鹽崎의 대진 

  하치만바라의 싸움에서 우에스기, 다케다 양군 모두 커다란 손해를 내었음에도, 그 후 양군은 모두 간토關東, 호쿠리쿠北陸, 도카이東海 방면에서 활발한 군사행동을 하였다. 이 무서울 정도의 계전繼戰 능력은 살아 남기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쌍방의 수장들의 강고한 의지에 기반한 것이었다.

  에이로쿠 7년(1564) 5월, 켄신은 쇼군 요시테루의 조정에 의해 호죠와 화해. 간토에서의 작전을 중지했다. 켄신은 간토에서 지배권을 획득해도 토지의 영주에게 맡길 뿐, 직할령으로서 직접지배를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곧바로 분쟁이 일어나, 호죠나 다케다의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었다. 자신의 영토로 만들면 보다 통치하기 쉬워지나, 그래서는 다케다나 호죠와 같은 침략자가 되고 만다. 켄신의 정의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 해, 신겐은 아이즈會津의 아시나 모리우지盧名成氏와 결탁하여 켄신 협공 태세를 취했다. 켄신은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아키佐竹義昭에게 호죠, 다케다를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8월 10일 카와나카지마로 출진했다. 신겐도 여기에 대응하여 출동, 시오자키鹽崎 부근으로 진출했다. 양군은 카와나카지마 서남쪽에서 67일 간 대진했으나 결국 결전을 벌이지 않은 채, 10월에는 양군 모두 철수했다.

  《카와나카지마에서 다섯 번에 걸쳐서 행해진 전투의 경과川中島五箇度合戰之次第》에 의하면 "신겐은 테루토라(輝虎, 켄신)의 용맹함을 겁내고, 테루토라는 신겐의 지모를 두려워하여 서로가 가볍게 싸움을 걸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서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굴리며..." 라고 한다. 쌍방 모두 서로가 가볍게 싸움을 걸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와 같은 무승부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카와나카지마 부근에서의 코에쓰(甲越, 신겐과 켄신) 간의 싸움은 없었다. 켄신은 호쿠리쿠 / 간토 빙면에서 활동하고, 신겐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죽은 후의 이마가와 영토를 빼앗는 데 힘을 쏟아, 겐키元龜 3년(1572) 10월, 켄신이 엣츄越中 도야마 성富山城을 공략하고 있던 때에, 신겐은 교토 입경을 위해 대군을 일으켜 스루가駿河, 도토우미遠江에서부터 서진을 시작했다. 다음해, 신겐은 정복전 도중 병으로 죽었다. 이로써 켄신과 신겐의 오랜 항쟁도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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