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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켄신》카와나카지마 전투 (3) 역사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8 上杉謙信》에서 우에스기 켄신의 전투를 다룬 파트 세 번째 장으로, P. 45~52에 수록된 글입니다. 필자는 고노 오사무河野收 씨. 위 서적은 1988년에 출간된 책이라 시대에 따른 한계가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쓴 글들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주시기를.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하치만바라八幡原 전투

   
  <1> 켄신, 간토로 출병하다

  코지弘治 3년(1557) 10월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의 즉위식이 있었고, 다음 해인 에이로쿠永綠 원년(1558) 9월에는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켄신에게 교토로 올라올 것을 촉구했다. 에이로쿠 2년(1559) 4월, 켄신은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두 번째로 입경하여, 10월에 에치고越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에이로쿠 3년(1560) 5월, 교토로 입경하려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저지당하여 패사敗死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텐쇼天正 원년(1573) 6월, 교토로 입경하려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노부나가에게 저지당하여 웅대한 꿈도 덧없게 병으로 죽었다.

  도카이도東海道와 호쿠리쿠로北陸路라는 차이는 있으나 켄신은 2번에 걸친 입경을 이룬 바 있다. 아사쿠라朝倉, 아사이淺井, 롯카쿠六角 등은 노부나가에게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켄신의 입경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켄신은 수구파의 사람들에게는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켄신의 안타까운 매력이었으며, 사회변혁기의 센코쿠 영주로서의 한계이기도 했다.

  에치고로 돌아온 켄신은 간토關東 출병을 결정했다. 간레이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겐의 세력이 북 시나노를 침략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간토에서 호죠北条와 일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 그러나 켄신의 정의감이 이를 행하게 했다. 단지 호죠를 타파하고 간토에 지배권을 확립한다면, 그 동맹자 신겐을 약화시키고 시나노信濃의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담백하다고는 해도 켄신도 전국시대에 웅비한 무장이므로, 그 정도의 계산은 했으리라 생각된다.

  에이로쿠 3년(1560) 8월, 켄신은 노리마사와 함께 미쿠니三國 고개, 누마타沼田을 경유하여 우마야바시(厩橋, 지금의 마에바시前橋)로 전진하여, 간레이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11만의 대군을 모으고, 고즈케 일대를 평정했다. 이는 대단한 병력이었다. 케이죠慶長 년간의 동원병력은 1만 석당 250명이었다. 이를 적용하면 4백 수십만 석에서 동원한 병력과 맞먹는다. 전국시대에 10만 이상의 병력을 지휘한 것은 천하통일 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도이다.

  에이로쿠 4년(1561) 3월, 켄신은 이 대군을 이끌고 호죠 공격에 나섰다. 우지야스는 결전을 피하고 오다와라小田原에 농성, 그러나 1개월 반의 공격과 포위에도 불구하고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양식도 바닥이 드러나면서 켄신은 포위를 풀고 가마쿠라로 전진轉進, 하치만 궁八幡宮의 신사 앞에서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기上杉의 성과 간토 간레이 직위를 물려받았다. 사실 켄신이 우에스기 성을 쓰게 된 것은 이 때부터로, 이전에는 나가오長尾였으나 본문에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라고 한 것이다.

  이후로 호죠를 타도하기 위하여 켄신은 그 후에도 여러 번 간토로 출병했으나, 결국 간토의 질서를 회복하고 간토 간레이의 책임을 다하는 데는 실패하고, 훗날에는 호죠와 타협하여 화평을 맺기에 이르렀다. 

  켄신이 약 1년간 간토에 출병해 있는 동안, 에이로쿠 3년(1560) 가을에는 카이즈 성(海津城, 현 마쓰시로松代)이 완성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를 제압하고, 이듬해 6월에는 와리가타케 성(割ケ獄城, 현재의 노지리 호수 동남쪽)이 다케다 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본거지인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에 위기가 닥쳤다.


  <2> 사이죠 산妻女山을 점령하다

  에이로쿠 4년(1561) 7월 2일, 켄신은 가스가 산성으로 귀환했으나,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8월 8일 다시 가스가 산성을 출발, 2열 종대로 국경을 넘어서 젠코사善光寺에 도착, 여기서 보급부대荷駄部隊를 남기고 병사 8천 명을 인솔하여 코이치小市 나루터에서 사이가와 강犀川을 건넌 후, 아메미야雨宮의 나루터에서 다시 치쿠마 강千曲川을 건너 8월 14일, 사이죠 산을 점령하고, 카이즈 성을 서남쪽에서 위압하는 태세를 취했다.

  이 대담한 행동에 기반해 켄신의 심리를 추측하자면, 신겐이 나오지 않을 경우 카이즈 성을 공략하고, 신겐이 나온다면 자웅을 결정할 싸움을 벌일 생각이었을 것 같다. 사이죠 산에 올라간 병력에 대해서《호쿠에쓰군단北越軍談》권 23에는 "예와 같이 전투병력 8천, 보급, 유격군 합쳐서 1만 3천" 이라고 되어 있다.
   
  하치만바라 전투에서 켄신이 선두에서 돌진, 신겐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건 잘못 전해진 이야기인 듯 싶으나, 켄신은 자신의 눈이 닿는 범위의 병력을 지휘하는 데 뛰어나, 8천 명에서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선호했다. 신겐의 배하에는 아키야마秋山, 야마가타山縣, 코사카高坂 등의 독립군단장이 있다. 노부나가의 배하에는 시바타柴田, 니와丹羽, 하시바羽柴, 아케치明智, 타키가와瀧川 등 독립된 군단장이 많이 키워졌다. 

  우에스기 군은 켄신이 지휘할 때는 대단히 강했으나, 독립군단장이 없기 때문에 커다란 전략적 작전은 전개할 수 없었고, 켄신도 누군가에게 배후를 맡기고 한 면의 작전에 전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점은 켄신이 간토제패도, 쿄토 제패도 할 수 없게 만든 원인 중 한 가지였고, 켄신 자신의 수명을 줄어들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켄신은 조금 더 독립군단장을 양성해야 했었다.
 
  어찌됐든 사이죠 산 진출은 대단한 위험을 내포한 한 수로, 카이즈 성을 도륙하든지 신겐과 결전을 치르든지 어느 쪽이든 간에, 간토와 호쿠리쿠 방면에서의 행동자유를 얻기 위해서 카와나카지마를 둘러싼 분쟁에 결착을 지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고요군칸甲陽軍鑑》에 의하면, 사이죠 산에는 무라카미 가문村上家 선조들의 무덤이 있어서, 무라카미의 옛 신하들이 참배하며 옛 주인을 추억하였기에 옛 주인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리기 위해 신겐이 묘역을 불태웠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켄신이 사이죠 산을 점령한 것은 이 무라카미 일족의 성지를 다케다 군으로부터 탈환함으로써 다케다에 복속한 무라카미의 옛 신하들을 규합하려고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를 전장에 데리고 온 것을 보면, 1년 전에 전 간레이 노리마사를 데리고 간토로 출격하여 11만의 대군을 모은 실적을 올린 데서 학습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라카미의 옛 신하들이 모여든다면, 다른 호족들과도 함류할 수 있을 것이며, 대병력을 장악하여 가이甲斐까지도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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