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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아츠시] 산월기 (2) 아오조라문고



이 글은 일본 쇼와昭和 시대 초기의 작가로 역사소설을 주로 쓰셨으며,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신 소설가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의 작품《산월기山月記》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가독성을 고려해서 몇 번에 걸쳐 나눠서 도서밸리에 올리겠습니다.
  



  돌아보면 신기할 정도로, 이 때의 원참은 이 초자연적인 괴이함을 실로 솔직하게 수용하며, 조금도 괴이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부하에게 명령하여 행차를 멈추게 하고 스스로 수풀 옆으로 다가가,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수도(장안)의 화젯거리, 옛 친구들의 소식, 원참의 현재 지위와 여기에 대한 이징의 축하. 청년시절 절친했던 자들 특유의 그 격의 없는 어조로 위의 것들을 이야기한 후, 원참은 이징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를 물었다. 수풀 속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정도 전에, 내가 여행을 떠나 여수 강변에서 묵던 밤중이었네. 한 숨 자고 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집 밖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네. 목소리를 따라서 건물 밖으로 나가보니,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더라고.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목소리를 쫓아 달려갔네. 아무 생각없이 달려가는 동안 언제부턴가 길은 산림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나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서 달리고 있었네. 왠지 온 몸에 힘이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경쾌하게 바위들을 박차 올라다가 정신이 들었을 땐 손가락과 손목 근처에 털이 숭숭 나고 있었네. 약간 날이 밝자 계곡으로 걸어가 모습을 비추어 보니 이미 호랑이가 되어 있었어."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네. 다음에는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었지. 꿈 속에서 '이건 꿈이다'고 자각했던 꿈들을 몇 번인가 꾼 적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나는 어찌해야 될지 몰랐고, 그리고 무서웠네. '이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자 더욱 무서웠다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도 몰라.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네. 영문도 모른 채 떠맡겨진 짐을 얌전히 짊어지고서,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우리들 생물의 숙명이지 않나. 나는 이윽고 죽음을 생각했네. 그러나 그 때, 눈 앞에 한 마리 토끼가 뛰어가는 모습을 본 순간에, 내 마음 속의 <인간>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리더군. 다시 나에게서 <인간>이 눈을 떴을 때는, 내 입은 토끼의 피로 젖어 있었고 입가에는 토끼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네. 이것이 <호랑이>로서의 첫 경험이었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어떤 짓을 저질러 왔는지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단지 하루에 몇 시간은 꼭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돌아온다네. 그럴 때는 예전처럼 사람의 말도 할 수가 있고, 복잡한 사고에도 견뎌낼 수 있으며, 경전의 문구를 읊을 수도 있었지. 이러한 <인간>의 마음으로 <호랑이>로서 스스로가 저지르는 잔학한 행동의 결과물을 보고, 스스로의 운명을 절감할 때가, 가장 처량하고 무섭고 분했었지. 그러나 이 <인간>으로서 돌아오는 몇 시간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다네. 지금까지는 어찌하여 <호랑이>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묻고 있던 것이, 이젠 불시에 정신이 돌아오면 '나는 어째서 이전에 인간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네. 무서워. 얼마 안 가서 나의 <인간>으로서의 마음은 야수로서의 습관 속에 완전히 묻혀 사라지고 말 것이야. 마치 고궁(옛 궁궐)의 주춧돌이 서서히 흙과 모래에 묻허져 가듯이,"


  "그렇다면 결국 나는 내 자신의 기억을 망각하고서, 한 마리 호랑이가 되어 사납게 배회하다 오늘처럼 길에서 자네와 만나도 옛 친구인지도 모른 채, 갈기갈기 찢어서 꿀꺽 삼켜도 아무런 회한이 남지 않게 되겠지. 야수도 인간도, 원래는 또 다른 어떤 존재였는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가 점차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스스로가 이런 존재였다고 덥석 믿어버리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내 안의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깨끗이 지워져버리면, 아마 그렇게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내 인의 <인간>은 그것을 더없이 두려워하고 있다네. 아아, 정말로 얼마나 무섭고 슬프고 애잔하게 내가 <인간>이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집착하는지 - 이런 기분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보지 못한다면... -


  "그건 그렇고... 그래. 내가 완전히 <인간>이 아니어버리기 전에, 한 가지 부탁해 두고 싶은 게 있네."
원참을 비롯한 그 일행들은 숨을 삼키며, 수풀 속의 목소리가 말하는 신비한 무언가에 매료되어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나는 원래 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라고 싶었네. 그러나 제대로 및을 보지도 못한 채 이런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어. 과거에 지어진 시 수백 편이 지금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고, 유고를 어디 놔뒀는지는 이미 잊어버렸네. 하지만 그 중에도 지금까지 기록하고 읊을 수 있는 시가 십 수편 정도 있네. 이것들을 나를 위하여 기록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야. 이걸로 어엿한 시인이란 평가를 받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네. 작품의 잘 되고 못 됨을 묻기 전에, 좌우간 몸을 해치고 마음을 망가뜨려서까지 스스로의 생애를 걸고 집착했던 것들을, 일부라도 후세에 남기지 못한다면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네."


   원참은 부하에게, 붓을 잡고 수풀 속의 목소리가 읊조리는 것들을 받아 쓰게 했다. 이징의 목소리는 수풀 속에서 낭랑히 들려온다. 장, 단편 합쳐 30편. 고상한 격조와 탁월한 문제의식, 한번만 읽어봐도 작가의 비범한 재능을 느낄 수 있을 만한 것들 뿐이었다. 그러나, 원참은 감탄하면서도 막연하게 이런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작가로서의 소질이 1류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1류의 작품이라기엔 어딘가 - 대단히 미묘한 부분에서 - 결여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고.


  옛 시를 다 읊은 이징의 목소리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스스로를 조롱하듯 말한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어 버린 지금도 나는, 내 시집이 장안 풍류인들의 책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아직도 꿈꾸곤 한다네. 암굴 속에서 누워자면서 꿈을 꾸었다네. 비웃어 주게. 시인이 되지 못하고 호랑이가 되어버린 불쌍한 남자를."(원참은 옛날, 청년 이징이 스스로를 자조하던 버릇을 떠올리면서, 씁쓸하게 듣고 있었다)


  "그래. 웃음거리가 된 김에 지금의 마음을 즉석에서 시로 남겨보겠네. 이 호랑이 속에서 아직도 과거의 <이징>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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