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쓸데없는 일이지만 후기를 쓴다. 이 소설을 완결한 지금도 내 마음 속을 휘젓고 다니는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 후기를 써서 남기려고 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쓰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어떤 때는 요시노부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3년 전 정월에 가고시마鹿兒島로 여행을 떠났을 때가 그러했다.
- 시내를 돌아보다가 서점에서 《로바타난코쿠키炉辺南國記》라는 책을 샀다. 작가인 시마즈 다다시게島津忠重 씨는 메이지明治 19년(1886년)에 태어나신 분이다. 시마즈 전 공작가문의 당주로 히사미쓰久光의 직계 손자에 해당된다. 전전戰前 일본해군 내에서 영국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소장小將으로 예편한 후에는 귀족원貴族院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옛 사쓰마 역대 번주 순으로 따지자면, 이 사람의 아버지가 29대 다다요시忠義이니 30대에 해당한다.
- 여행기간 동안 가고시마에는 이상하게도 우박이 내려서 외출하기가 불편했다. 별 수 없어 다음 날은 여관에 틀어박혀 어제 산 책이나 파고 있었는데, 이 자서전 느낌이 나는 수필로 인하여 요시노부가 메이지 말기에 이르기까지 이 시마즈 공작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내겐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 【 때는 바야흐로 메이지 극말년의 어느 날 】 이라고 저자 시마즈 다다시게 씨는 썼다. 극말년이라고 하니 메이지 42, 43년~45년(1909, 1910~1912) 무렵이리라. 다다시게 씨는 당시 해군 소위, 내지 중위였다. 요시노부는 70을 약간 넘긴 나이였는데 그다지 노쇠한 구석도 없어 그 다방면으로 뻗은 취미활동을 계속하면서 매일 아침에 오는 신문을 빠짐없이 읽었고, 메이지 유신 당시의 인물을 다룬 전기가 나오면 반드시 책을 구해 읽었다. 특히 그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내린 사쓰마薩摩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 책략가로서는 불세출의 인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의 전기는 한 권도 빠짐없이 읽어서 당시 요시노부 스스로가 알지 못했던 장기판의 내막을 알려고 하는 데 열심이었다. 말하자면 지적 정신력이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은 상태였다.
- 시마즈 다다시게의 책에 따르면 그를 요시노부에게 소개시킨 것은 도쿠가와 종가宗家의 당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씨였다. 면회장소는 황궁 안, 아래로는 무단전재가 되겠지만 다다시게 씨의 책 문장을 인용하겠다.
「요시노부의 인상은, 균형잡힌 작은 체구를 가진 인물로 내가 처음 만났을 당시는 이미 노령인지라 안색은 좋아보이지 않았고, 대단히 입이 무겁고 온후한 인물로 비쳤다. 그리고 이에사토가
"이쪽이 시마즈 다다요시의 친아들 다다시게라고 합니다. 현재 시마즈 가문의 당주지요." 하고 소개하는 것을 듣고서도,
"아아, 그렇습니까." 하는 간단한 인사밖에 듣지 못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15대 쇼군의 눈은 그늘이 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은 얼마 하지 않지만은 감개무량해 하는 듯한 모습으로 내 눈에는 비치었다. 이 때는 나 자신도 그 곳의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그다지 놀리지 않았다. 요시노부는 그 후인 191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 자체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요시노부와의 대면 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 아니었나 하고 생각한다.」
- 대면에 관한 문장은 이것 뿐이다.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과거에 자신을 권모에 빠뜨려 몰락시킨 사쓰마 시마즈 가문의 젊은 당주를 만났을 때 요시노부는 냉정하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요시노부는 조슈長州 사람들을 미워하진 않았다. 단지 사쓰마 사람들에게는 응어리가 쌓여서 유신維新 후에도 몇 번 내심을 털어놓은 걸 보면 꽤나 골이 깊었던 것 같다. 이 다다시게 씨를 보면서 요시노부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이리저리 생각하면서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기이하게도 이날 내가 묵고 있던 숙소가 시마즈 영주의 별장으로 현재 여관으로 쓰이는 이소磯의 시게토미장重富莊이었다. 옆에 있던 이불에는 시마즈 가문의 정식 문장이 수놓여 있었고, 빈지문 밖으로는 시마즈 히사미쓰도 바라보았을 소귀나무와, 드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역사적 가해자의 대표가 살던 이 저택에서 밤을 보내면서 역사의 피해자가 겪었을 입장과 심경을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로 요시노부가 역사에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더욱 통절하게 다가왔다.
- 언젠가 요시노부에 대해서 쓰겠다고 이 때도 결심했다만, 작업이 용이하게 진척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소재를 소설로 만들기가 나로선 어려웠기 때문이다. 요시노부는 정치가이다. 정치가를 소설 주인공으로 삼아 성공한 사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조제프 푸셰》를 비롯한 극소수의 사례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치가는 정치현상 속에서밖에 존재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정치적 사항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묘사할 수 밖에 없다. 정치적 사항을 여러 항에 걸쳐서 줄줄 늘어놓아야 그 말미에 드디어 몇 행 정도 그 인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정치현상 같은 건 까닥 잘못하면 헌 신문의 정치면만큼이나 독자에게 소외받는다.
- 천만다행으로 필자가 조금 다행하다고 생각하는 건, 요시노부가 활동하던 시기의 정치현상이 헌 신문의 정치면이 아닌, 이미 역사로서 응결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이 점이 필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 이 작품은《별책 문예춘추別冊文藝春秋》에 나눠서 연재하였다. 당초 예정은 연재하지 않고 1회로 완결하는 것이었으나, 최초의 120매를 채워서는 도저히 끝이 나지가 않아 결국 다음 호에 백 수십매를 이어서 연재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끝이 나지 않아 또 그 다음호에 200매 가까이를 기고하고서야 완결이 났다. 내가 멍청했던 것이다. 요시노부가 쇼군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꼴랑 2년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이렇게 많은 단어들이 필요하리라고는 당초에는 예상하지 못했다.
- 그런데도 아직까지 좀 더 써야 했다는 회한이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건 어찌된 일일까. 필력이 모자랐던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이 대상의 소재 자체가 원체 발효도수가 높아서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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