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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토리 시소] 신센구미 (4) 곤도 이사미 아오조라문고


  이 포스트는 쇼와 시대 초중기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강좌파) 역사학자로 활약하신 故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1901~1956) 교수님이 1934년 9월에 집필하셨던,〈신센구미新撰組〉라는 기고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이 쓰여진 지 85년, 저자분이 돌아가신지 62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이러저러한 면에서 낡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아오조라 문고


곤도 이사미


  작년(1862년) 겨울, 에도江戸에서 로시구미浪士組에 참가한, 기요카와의 어투로는 '남다른 무사非常の士' 2백 수십 명 중에서 곤도 이사미近藤勇를 맹주로 하는 시에이칸試衛館 파 몇 명은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하는 별 볼일 없는 자들로 인식되었다. 이사미는 단순한 평대원, 세리자와 카모芹沢鴨는 본부에 배속된 간부, 교토로 올라가는 도중 각지의 역참에서는 세리자와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는 고생도 감수했다.

  이사미에게는 지금까지 국가의 대사를 위해 분주한 경력이 없었다. 특정한 번의 무사도 탈번자도 아니다. 우시고메 야나기쵸牛込柳町에 있는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 유파 검도도장 시에이칸의 젊은 도장주였는데 도장시합에서는 그닥 탁월하지도 못했고 이름도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사미의 가치는 오직 그 기개있는 성격과 배짱이었다고 패관사稗史는 입을 모아 말하는데 기개나 배짱만 놓고 보면 '남다른 무사' 250명 그 누구도 빠지는 자가 없었다.

  이사미의 시에이칸은 예를 들면 사이토 야쿠로오斎藤弥九郎의 렌베이칸練兵館 /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蔵의 시가쿠칸士学館(이 두 사람 모두 분큐 2년 12월, 기요카와 상소문의 취지에 따라 요리키与力 대우를 받고 막부에 등용되었다)에 비교하면 달과 자라껍데기 같은 격차가 있었고, 에도 시중에서 간판만 걸어놓은 무술도장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사이토, 모모노이들의 도당이 갖추지 못한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특징이란 건 다른 게 아니고, 시에이칸이 에도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부슈武州 타마多摩 군 일대의 농민을 대표하는 농촌 지주층들을 기반으로 하여 지어졌다는 점이다.

  그들은 직접경작도 하지만은 하인과 소작농들을 사역하면서, 그 마을이나 주변 마을에서 모두 그 유서를 인정받았고, 간토 8주関八州가 봉건시대로 접어든 후 끊임없이 들고 나는 무사 지배자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면서도 봉건제도의 근저적인 지위에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고 대대로 존속하여 온 특정 사회계층이었다.

  같은 간토 8주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일가나 다카지마 가에몬高島嘉右衛門, 지역은 다르지만 앞에서 나온 기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처럼 이들 사회계층에서 일제히 부르주아적 요소를 대표하는 무언가가 태어나 막부 말기의 정치사 / 경제사를 다채롭게 칠했다. 농촌의 부농 / 양잠중개업 / 양조장 / 산림업자 같은 부류가 파생되어 필연적인 발전논리를 따라 초기 자본가를 형성했지만, 다르게 보면 그들은 여전히 봉건적 질서의 근저에 있는 부농이란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지위가 서로 뒤얽혀버리면서 막부 말기 유신사의 한 가지 특질을 형성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선 많은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여기선 근대적인 자격을 사실상 거의 가지지 못한 농촌 부농층의 한 범주가 분큐의 비상시기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나왔을 때 어떠한 역할을 맡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를 살펴보는 데에는 시에이칸 일파의 역사가 귀중하다.

  텐넨리신류 2대 도장주 곤도 산스케近藤三助는 무사시 타마군 카즈미 마을加住村 출신으로, 하치오지八王子를 중심으로 하여 타마 지방의 농촌 부농 자제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면서 인맥을 쌓았다. 2대쨰를 계승한 곤도 슈스케도 타마 군 오야마 마을小山村 농부의 아들로 산스케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이었다. 이 3대째에 에도로 도장 이전이 행해졌는데, 이 슈스케를 계승한 것이 타마 군 초후 가미이시하라 마을調布上石原村의 농부 집안 셋째 아들 곤도 이사미였다.

  이사미와는 유파 동문이자 친구로 막하의 제 1 측근이 된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도 역시 타마군 이시다 마을石田村의 농촌 갑부집에서 난 막내아들이었다. 도장은 에도에 있으면서 수시로 타마 지방 농촌청년들과 합숙하며 출장지도를 했다. 시에이칸 몇천왕으로 불리는 오키타 소지沖田總司 / 야마나미 케이스케山南敬助 / 하라다 사노스케原田左之助 /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源三郞 / 나가쿠라 신파치永倉新八 같은 면면들은 시라카와白河 / 센다이仙台 / 마쓰야마松山 같은 번을 이탈한 로닌(무적자)들이 섞여 있지만 도장의 인연으로 그들 모두 타마 지방 부농지주계급과 수 년간에 걸쳐 엮여있는 사람들이었다.

  세리자와 파 숙청 후의 신센구미新撰組는 시에이칸 이래의 이들 동문인맥을 전면에 내세우고 국장 곤도와 부장 히지카타 두 사람이 완벽히 조직을 독재했다. 그 이후의 신센구미의 이합집산 / 출처진퇴는 이들 두 사람이 대표하는 사회적 기반을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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