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핫토리 시소] 신센구미 (1) 기요카와 하치로 아오조라문고


  이 포스트는 쇼와 시대 초중기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강좌파) 역사학자로 활약하신 故 핫토리 시소(服部之総, 1901~1956) 교수님이 1934년 9월에 집필하셨던,〈신센구미新撰組〉라는 기고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이 쓰여진 지 85년, 저자분이 돌아가신지 62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보기엔 이러저러한 면에서 낡았다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아오조라 문고


기요카와 하치로


  "대저 비상의 변에 처한 자는 반드시 비상한 선비를 쓴다..."

  기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자부하는 한문으로 분큐 2년 겨울, 이러한 건백서를 막부의 정사총재 마쓰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에게 바치면서 신센구미新撰組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 건백서에서 말하는 비상한 변이란 이미 이 시기에는 외교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내치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부 말기 비상시의 주역은 판에 박힌 것처럼 로시(浪士, 적or직업을 갖지 않은 무사층)라 불리는데 그 사회적 본질은 무엇일까.

  분큐文久 2년 봄의 후시미 데라다야伏見寺田屋 소동 / 여름의 막부정치개혁 / 가을의 칙사 에도 재파견 - 이들 사건의 결과 쇼군가문은 양이기한 봉답을 위해 교토로 올라오게 되었고 그 교토는 이미 로시들의 조종을 받는 '가쿠슈인学習院' 당이 은연히 정계를 주무르고 있었다. 때를 만난 로시의 비상수단이란 분큐 2년 12월 이후의 날짜만 쫒아가 봐도, <시나가와 고텐야마品川殿山 영국공사관 방화>, 덴노 폐위사례를 조사한다는 소문이 나돈 <하나와 지로塙次郎 암살>, 교토 쪽은 더욱 더 악랄하여 <천벌天誅>의 희생양이 된 자들의 잘린 사지에다 편지를 매달아서 정적들의 집에다 내다던지고 있었다. 이듬해 2월이 되자 교토의 순사 끄나풀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사직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기요카와 하치로의 건백(상소)으로 인해 로시구미浪士組가 조직되었고, 얼마 안 가 분열하여 그들 중의 일부가 신센구미新撰組가 되어 막부토벌파 로시들을 탐색하는 교토의 특별경비대 역할을 맡지만, 이쪽도 엄연히 똑같은 로시였다. 이 로시 아닌 로시들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밝히려면, 이를 다뤄서 넓게는 막부 말기라는 비상시 여러 전사들의 사회적 정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센구미의 역사를 정의하는 운명적인 지반에 도달할 수 있는 후시미 데라다야 사건을 들춰보는 게 첩경이리라.

  막부정치 개혁을 추구하는 절충파의 맹주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가 상락하는 그 직전시점을 노려 700 동지를 이끌고 후시미와 에도에서 동시에 거사를 일으켜, 교토 쇼시다이所司代와 에도 가쿠로閣老를 살해하고 공무합체파를 억누르면서 일거에 "가마쿠라鎌倉 이전 덴노가 다스리던 시대를 만회" 하는 것이 테라다야에서 분하게 죽은 로시파의, 대략 반여 년에 걸친 공작의 목표였다.

  이 공작 과정에서(특히 전반부) 대단히 장대한 선전선동가 역할을 한 게 기요카와 하치로이다. 쇼나이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는 지주계 하급무사 집안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에도로 나가서 <문무도장文武道場>을 열였다. 부르주아 지주집안에서 난 인텔리에다 잘 생긴 얼굴에 키가 크고, 엄청난 패기에다가 매춘부를 산 일까지 일기에 적는 성실함이 있었다. 분큐 원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뒤젚어서 나가는 것도 흥미롭다.

  기요카와 일당을 교토의 막부토벌파討幕派 거두 다나카 가와치노스케田中河内介에게 소개한 건 교토의 동지로서 의사직업을 가진 니시무라 케이조西村敬蔵. 가와치노스케 자신도 원래 다지마但馬 지방의 의사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구게 나카가와 가문의 가신諸大夫인 다나카 집안에 양아들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만엔万延년(1860년) 이래 가고시마의 도시민이자 하급무사인 코레에다 류에몬是枝柳右衛門을 통하여, 나카야마 다다나루中山忠愛 공경의 교지를 품에 숨긴 기요카와들이 히고肥後로 떠났다. 히고의 동지들은 직접적인 부르주아적 기반이 없었다는 점이 특색이었는데, 이 때문에 극단적인 과격파로, 국학자 신관들을 중심으로 하급무사들이 다수 포진해있었다. 그런데 히고에서 회동한 기요카와 외에도 사쓰마 번薩藩藩 좌파의 대두를 보고하고, 이윽고 사쓰마 극좌파와 연결고리를 만든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조슈 다케자키의 상인 시라이시 렌사쿠白石廉作(쇼이치로)였다. 사쓰마 번은 분큐 원년 10월 이래 공무합체 영향인 세이츄구미誠忠組의 세상이 되었고, 거기에 따라 극좌 존왕양이파도 나타났는데 그 우두머리는 번교의 국학교사인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 여러 가지 세포로 도시민계급과 겹치는 성외거주 하급무사층으로 구성되었다.

  데라다야 사변 전후 그들은 깡그리 번을 뛰쳐나가 그 대부분이 무적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데라다야파를 곰곰히 삺펴보면 열렬한 무사 내지는 농민적 요소는 단편적인 것으로, 어디엔가 부르주아적 도선으로 연결된 한 자루 누르스름한 폭탄이 점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도선'이 바로 유신변혁사 전체에 일관된 좌파의 특징이었다.

  여기에 비해 기요카와 하치로의 상소로 만들어진 관허 로시구미는 이미 데라다야파 같은 부류와는 단절된 존재였다. 이쪽에는 지나치게 다양한 성향을 가진 로시가 뒤섞여있었다. 개별적인 요소로만 보면 좌파 단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여기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무도장>의 관장으로 민간에 이름을 알린 사람도, 미토水戸 / 조슈長州 등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번을 이탈한 무사도, 농촌 지주계급도, 가이甲斐의 유텐祐天으로 불리는 야마모토 센노스케山本仙之助 일파같은 무직 건달패도...

  그것도 이쪽도 그들 모두가 신분제도에 대한 / 언로차단에 대한 / 외국의 침탈에 대한 / 물가폭등으로 인한 민생고에 대한 / 각각의 축적된 사회적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아름다운 존왕양이尊攘라는 슬로건 아래 모여든 것이다.

  "막부의 후원으로 상경하였지만 한 점의 녹도 받지 않았고 존양의 대의를 좇아 섬기려고 합니다. 만일 황국을 어지럽히고 사욕을 채우려는 무리가 나온다면 아무리 지위 있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용서없이 꾸짖으려고 하는 한마음 충심이옵나이다(조정에 대한 로시구미 상소문)"

  이것은 거짓말도 야바위도 아니었고 딱히 막부에 대한 모반으로 간주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분큐 시대의 비상시 슬로건인 존왕양이는 막부정치 개혁이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막부 - 사쓰마薩 / 에치젠越 / 히토쓰바시一橋 / 미토水戸 등 공무합체파들의 지도를 받는 개조막부의 슬로건이 되기도 했으니까.

  기요카와 하치로의 역할은(그 본심은 별개로 하고) 단치 스위치만 바뀐 것 뿐이다. 근대 자본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선에서 봉건지배 중앙부에 직접 연결하는 쪽으로. 이미 그는 데라다야 사건 직전 그 선동가적 자질이 화근이 되어 종전의 동지로부터 떨궈난 바 있었다. 로시구미 조직 후는 옛 간사이 동지들로부터 변절자라는 욕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치로의 뜻은 로쥬 이타쿠라 스오노카미板倉周防守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그 순간까지 조금도 변치 않은 존왕양이의 충심으로 가득했다는 건 유고만 살펴봐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하치로의 의도는 '막부의 힘으로 로시들을 모아 기회를 봐 이들을 막부 토벌에 역이용하는 것' 이라는 패관사稗史의 억측을 옳게 생각하고 보아도 상관없다. 문제는 의지 - 단지 이 경우 막부토멸의 그것이 아니다 - 였다. 비상시 건백(상소)을 올린 그 순간부터, 의지를 실현할 객관적 지반은 영원히 상실되었다는, 의지 저편의 사실 속에 가로눕혀져 버렸다는 것이다.



핑백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1864
460
346334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