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가 키운 무사들이었던 시즈가타케 일곱 자루 창 멤버와 그 자제들은 에도 시대가 된 후 어떻게 살았는지, 그 후손들은 어떤 입장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고 메이지 이래 화족 작위를 받은 건 어느 가문들인지를 대강 정리했습니다.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이들 중 에도 시대에 가장 영달했던 건 와키자카 '가문'입니다만, 정작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혈통'은 종가에서 밀려나고 의외의 가문에서 들어온 양자의 후손이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아이러니랄까요.
(제 포스트를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 다이묘 3 : 와키자카 가문(자작가), 카토 요시아키 가문(자작가), 히라노 가문(남작가)
- 막부 하타모토 2 : 후쿠시마 가문, 카스야 가문
- 대촌주 1 : 카토 키요마사 가문
- 가문단절 1 : 카타기리 가문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토쿠가와 막부의 2천 석 하타모토)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아키ㆍ빈고 2주 49만 8천 석에 봉해졌다. 본인과 양아들 마사유키正之 모두 이에야스의 수양딸과 결혼했지만 이후 마사유키와의 불화로 그를 폐적하였고, 자기 친아들인 타다카츠忠勝에게 며느리를 개가시키려 하다 막부가 개입해 그녀를 친정으로 데려가버리면서 쇼군 가문과의 이중 혼인관계는 무너졌다.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해, 오사카 여름 전쟁 당시까지 에도 잔류를 강제당한 유일한 다이묘로 남았을 정도로 토쿠가와 막부에게 마음을 허락받지 못했고,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이에야스 사후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가면서 마사노리의 입지도 더욱 좁아졌다.
1619년, 홍수로 무너진 히로시마 성広島城을 막부의 허가없이 무단보수한 죄를 추궁받아 시나노 카와나카지마信濃川中島 4만 5천 석으로 감봉ㆍ영지 이전되었다. 1624년 64세 나이로 별세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이 오기 전에 가신들이 시신을 화장한 죄를 추궁받아 후쿠시마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훗날 마사노리의 증손자가 2천 석의 막부 하타모토로 등용되면서, 증손자의 후손들이 이 지위를 세습하며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쇼나이 번庄內藩의 대촌주大庄屋)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코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흡수해 52만 석 다이묘가 되었다. 그 본인은 이에야스의 수양딸과 재혼했고, 그의 어린 아들 타다히로忠広도 막부의 후견까지 받으면서 성인으로 장성했고 이에야스의 친손녀와 결혼하여 막부와 이중 혼인관계를 구축하였다.

카토 가문의 앞날은 무난해 보였으나, 타다히로의 적자 미츠히로光広가 모반혐의를 뒤집어쓰면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미츠히로는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와 3대 쇼군 자리를 다투었던 토쿠가와 타다나가德川忠長의 절친이었기 때문에 2대 쇼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은 후 이에미츠에게 보복당한 거라는 말이 있다.
타다히로는 쇼나이 마루오카庄內丸岡 1만 석을 영유(영지 상속은 금지)하는 유배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 자손은 막부 하타모토조차 되지 못했고 적계 혈통도 끊어졌지만, 유배지의 현지처에게서 얻은 서자가 쇼나이 번의 대촌주가 되었고 이쪽 후손들은 자리를 세습하며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오우미 미나구치 번近江水口藩 2만 5천 석 번주, 자작子爵)

카토 요시아키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오사카 겨울 전쟁 때는 후쿠시마 마사노리ㆍ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ㆍ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와 함께 에도 잔류를 강제당했지만, 여름 전쟁 때는 마사노리를 제외한 3명이 모두 막부 편에 가담해 참전하였다.
일곱 자루 창 중 이에야스가 가장 총애했던 인물로 만년엔 아이즈会津 40만 석의 대다이묘로 영전했으나, 그 아들 아키나리明成는 정치적 재능이 없었고 명신 호리 몬도堀主水와 불화하여 '아이즈 소동会津騷動'을 초래했다. 소송에서 승리하여 호리 몬도 일족을 포박해 주멸하긴 했으나 이후 평판이 땅에 떨어져, 다이묘들의 괄시와 가신들의 사보타주를 견디지 못한 아키나리는 결국 아이즈 40만 석을 막부에 반납하고 은거했다.
아키나리의 아들 아키토모明友는 이와미 요시나가 번石見吉永藩 1만 석의 다이묘를 거쳐 오우미 미나구치 번 2만 석으로 가봉되었고, 그 아들 아키히데明英 대에는 번조 요시아키가 본래 미카와三河 출신이라는 점 + 아키토모와 아키히데가 막부 정치에 봉사한 공적을 평가받아 준 후다이로 승격되었다. 카토 가문은 미나구치 번 2만 5천 석의 다이묘로서 메이지 유신을 맞았고, 메이지 정부가 화족 제도를 만들었을 땐 자작이 되었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하리마 타츠노 번播磨龍野藩 5만 3천 500석 번주, 자작子爵)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반해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를 공격한 공으로 3만 3천 석 영지를 보장받았고, 이후 이요 오오즈 번 5만 3500석으로 가봉ㆍ영지이전되었다.
그의 아들 야스모토安元는 시나노 이이다 번信濃飯田藩 5만 5천 석을 영유했는데, 자식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은 동생 야스츠네安經도 다른 번 무사와의 갈등으로 시비가 붙어 살해당하자, 토쿠가와 막부의 후다이 중신인 홋타 가문(堀田家, 3대 쇼군 이에미츠의 유모이자 당대의 막후 실력자였던 카스가노츠보네와의 연줄로 후다이다이묘가 된 두 집안 중 하나)에서 양자를 들여 그에게 집안을 넘겨주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와키자카 종가는 더이상 야스하루의 혈통이 아닐 뿐더러, 이후 와키자카 종가에 몇 번의 혈통 단절 위기가 생길 때에도 홋타 가문에서만 후계자를 공급받는 등, 사실상 홋타 가문에 먹힌 데 가깝다는 소리다. 그러나 그 덕에 도자마였던 와키자카 가문의 격은 준 후다이급으로 올라가 이후의 후손들은 막부 정치에 관여했으며, 몇 명은 토쿠가와 막부의 상설 최고지위인 로쥬老中까지 역임(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정식 후다이가 됨)하기도 했다.
와키자카 가문은 하리마 타츠노 번 5만 3500석 다이묘로 메이지 유신을 맞았고, 화족 제도가 만들어진 후엔 자작이 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혈통'이 끊어진 대신 와키자카 '가문'은 일곱 자루 창 멤버의 가문들 중 에도 시대에 가장 성공했던 집안이었다.
◆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가문 단절)
오사카 전쟁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카츠모토는 기존의 2만 8천 석에서 4만 석으로 가봉되었지만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적남 타카토시孝利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막부는 카츠모토의 4남 타메모토爲元의 가문 상속을 허락하는 대신 3만 석을 거둬들였는데, 결국 타메모토의 직계가 1655년 단절되면서 카타기리 가문의 영지는 거둬들여졌고, 타메모토의 차남 카츠아키且昭가 3천 석 교대 하타모토로 막부에 등용되었지만 이 혈통도 결국 대가 끊어졌다.
◆ 카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토쿠가와 막부의 500석 하타모토)
타케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에 가담하면서 카코가와加古川 1만 2천 석 다이묘 지위를 상실했고, 이후 500석의 막부 하타모토로 막부에 등용되었으나 그도 아들도 얼마 안 가 죽었기에, 조카가 타케노리의 집안을 물려받았고 메이지 유신까지 500석 하타모토 지위를 후손들이 세습했다.
◆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타와라모토 번田原本藩 1만 석 번주, 남작男爵)
오사카 겨울 전쟁 때는 오사카 편에 참전하려 했으나 막부의 제지를 받고 후쿠시마 마사노리ㆍ카토 요시아키ㆍ쿠로다 나가마사와 함께 에도 잔류를 강제당했지만, 여름 전쟁 때는 마사노리를 제외한 3명은 모두 막부군 편에 가담해 참전하였다.

나가야스의 핏줄은 그 아들 대에 끊어졌고, 4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츠나德川家綱 생모의 이복동생을 양자로 맞아들여 가문은 존속하였다. 이후 5천 석 하타모토 신분을 세습하며 히라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을 맞았고, 당시의 당주였던 히라노 나가히로平野長裕는 메이지 정부의 코쿠다카 재산정 작업의 수혜를 입어 단 3년간(1868~1871)이긴 했지만 타와라모토 번 1만 석 다이묘로 신분상승, 이 덕택에 히라노 가문은 훗날 남작 자리를 얻게 된다.
덧글
실제 역사에서도 오사카 성 여름 전투 이후 곧 사망했다는 걸 알고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문까지 끊겨버렸었군요.
히데요시 생전엔 석고가 1만 석으로 묶여있던 소다이묘가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중직을 떠맡은 케이스라 이에야스를 상대해서 토요토미를 대변할 입장은 도저히 아니었다는 게 좀 안타깝다 싶습니다.
위안부 문제 클래식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性’ 23년만에 한국어판 출간
https://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6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