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동시대 몇몇 유럽인들의 오다 노부나가 평가 역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 예수회 순찰사로서 세 번에 걸쳐 일본에 체류한 이탈리아인 사제. 첫 번째 체류 시기(1579~1582)에 노부나가를 직접 만나 교류를 가졌고 노부나가로부터 아즈치 성 그림병풍을 선물받기도 했다.


  .....드디어 우리들의 주님이신 하느님은 노부나가를 세우셨다. 그는 새로운 쿠보를 추방하고 앞에서 기록한 여러 영주를 모두 살육한 후, 근 500년간의 일본에서 최대의 지배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제들을 소환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깊이 보호해주었기에, 교토(의 민중)가 모두 이교도이며 할 수 있는 온갖 방해를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사제들은 교토의 우아한 성당에 위치한 한 건물에 수도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노부나가의 키리시탄=천주교도 보호)

  ....사제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또 그 후 오랜 기간동안 일본에서는 불교를 믿는 승려들이 거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존경도 받고 있었기에 우상숭배는 정점에 달해있었는데, 시간의 경과와 함께 사제들이 그들 종교의 기만을 발견하고 일본인들로부터 신용과 권위를 획득해감에 따라 불교 승려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용과 존경심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드디어 노부나가가 "이들 종파는 모두 잘못되었다. 다대한 재력을 지닌 불교 승려들이 저렇게나 일본에서 판을 치는 건 쓸데도 없고 성가시기만 하다"고 여러 번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가신들에게 하사해버리자, 그들과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불교 승려들 다수는 이에 저항하여 전단을 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하고 고립되면서 그들이 영유하고 있던 여러 주에서 우상숭배는 불교 승려들과 함께 몰락해갔다.(노부나가의 불교 탄압)

  "내가 교토에 있었을 때, 여러 번 노부나가에게 가서 선물을 지참하여 황제(皇, 天皇)를 방문할 수 있도록 힘을 써 달라고 은혜를 청했다.....(중략) 헌데 노부나가는 오만하고 대단히 불손한 자로,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이 "내가 있는 곳에서 그대들은 다른 사람의 총애를 얻을 필요가 없소. 왜냐면, 내가 국왕國王이고 대궐内裏이기 때문이오."라고 내게 말했다."(노부나가에게 일본 조정이란)


  루이스 프로이스 : 노부나가를 수십 번이나 만나며 그와 교류했던 포르투갈인 사제. 그의 기록들은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오오타 규이치가 집필한《信長公記》와 쌍벽을 이루는, 노부나가 연구의 대표적 동시대 문헌으로 대접받고 있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주 3분의 2의 주군인 토노(殿,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이었다. 천하를 통치하기 시작할 때 37세 정도였던 걸로 보인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로, 수염이 얼마 없고 그 목소리는 대단히 카랑카랑했다. 극도로 호전적이고 군사적 수련에 여념이 없었으며, 명예심이 가득하고 정의에 관해 까다로웠다. 그는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에 대해서는 징벌을 가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때론 인정미와 자애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수면(시간)은 짧으며 아침 일찍 일어난다. 탐욕스럽지 않고 웅대한 결단을 감추고 있으며, 전술능력은 대단히 노련하고, 대단히 성미가 급하며 격앙하기도 하나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극히 드물게 가신들의 충언을 따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들로부터 대단한 외경대상이 되어 있다. 술을 꺼리고 음식을 절제하며, (사람을) 교제할 때는 대단히 진솔하고 자신의 견해에 거만하였다.

  그는 일본의 모든 왕후를 경멸하며, 하급관리를 대하듯 거만하게 그들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절대군주(를 대하듯) 복종하였다. 전운이 자신을 등지고 있어도 심기활달한 모습을 보였으며 인내심이 강했다. 훌륭한 이성과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신이나 부처에 대한 일체의 예배ㆍ존숭과 온갖 이교도적인 점복ㆍ미신적 관습을 경멸하는 자였다. 형식적으로는 당초 법화종法華宗에 속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현관顯官에 취임한 후론 거만해져 모든 우상을 깔보게 되었고, 약간은 선종禪宗의 견해를 따르지만 영혼의 불멸ㆍ내세의 상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자택에서 대단히 청결하게 살았으며, 자기가 내린 갖가지 지시에 대단히 양심적이었고, 대담을 하는 가운데 뜸을 들이는 것과 장황하게 전제를 다는 것을 싫어했다. 극히 비천한 자와도 친근하게 대화했다. 그가 특별히 애호한 건 저명한 다도도구ㆍ좋은 말ㆍ도검ㆍ매사냥으로,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를 가리지 않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스모를 겨루는 걸 관전하기를 대단히 즐겼다. 어느 누구도 무기를 소지한 상태로 그 앞에 나서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약간 우수어린 표정을 짓고 있으나 곤란한 일에 착수할 때는 지극히 대담무쌍하여, 사람들은 만사 그의 명령에 복종하였다.(노부나가 인물평에 절대 빠지지 않는 유명한 대목. 나무위키에까지 올라와 있다)

  본래 욱하는 성격에다, 자기 명령에 반대(의견)하는 걸 참아내지 못하는 성질이 있었던 탓에....(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츠히데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이는 당 82년 6월 20일(텐쇼 10년 6월 1일) 수요일 사건이다. 한편 모든 총을 화승에 점화시켜 방아쇠에 끼우도록 명하고, 창 부대도 정렬시켰다. 부하들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의심을 했고, 혹자는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가 노부나가의 의동생인 미카와의 왕(토쿠가와 이에야스)을 죽이려는 게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했다.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숙박하던 곳으로, 승려들을 모두 내쫓고 상당히 공들여 꾸민 텐노사(혼노사의 오기)란 이름의 승원 부근에 도착해, 3만 명이 날이 밝기 전 승원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시내에선 이 완전한 의외의 사태 앞에 무슨 소동이 일어났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 소식을 전파했다. 우리 성당은 노부나가의 거처에서 고작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을 뿐이라, 키리시탄들이 곧장 찾아와서는 아침 미사를 드리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나(프란시스코 카리얀 사제이리라)에게, "궁전 앞에서 소동이 났습니다. 중대한 사건으로 보이니 잠시 기다리십시오."라고 권해 주었다.

  그 후 총성이 울리고, 불길이 올랐다. 이어서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아케치가 노부나가에게 반역하여 그를 포위한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아케치의 병사들은 궁전 문 앞에 도달해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이와 같은 모반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저항하는 자도 없었기에, 내부로 들어가 노부나가가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닦는 모습을 목도했다. 곧장 그 등을 향해 활을 쏘았다. 노부나가는 그 화살을 뽑아내고 나기나타, 즉 칼자루가 긴 낫 같은 무기를 잡고 얼마간 싸웠으나, 팔에 탄환을 맞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혹자는 그가 할복했다 하고, 다른 사람들은 궁전에 불을 질러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들이 그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했던 그 인물이 모발조차 남기지 않고서 먼지와 잿더미로 돌아갔다는 것뿐이다.(카리얀 사제 등에게 청취한 혼노사의 변 당시의 일을 예수회 총장에게 보고한 글)


  아빌라 히론 : 에스파냐의 상인.《일본왕국기》의 저자. 위의 두 사람과 달리 노부나가와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인물이라, 그의 노부나가 기록은 당시를 겪었던 서양 상인들이나 예수회 관계자들, 자기가 아는 일본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 특히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신부가 해준 이야기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위인 노부나가의 죽음은 그 용기, 관용성, 그리고 그 드높은 마음의 품격을 아는 많은 사람들을 애석해하게 만들었다. 그는 체격 좋고 키가 큰, 균형이 잘 잡힌 체구의 인물로 눈이 크고, 콧대는 높았으며, 보릿빛 피부에 강인한 신경을 가졌고, 날씬했으며, 털이 많이 났다. 탁월한 무사로, 언제나 싹싹했고 허례허식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일본의 오야카타(屋形, 역주 : 다이묘)와 거물 영주들은 지면에 발을 붙이거나 도보로 걷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 용맹한 왕자는 "국왕과 태수는 무인다워야만 한다. 절대로 건물 밖에 나오지 않는 고위 여관上臈처럼 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렇기에 그는 짚신이라든가 짚으로 만든 여타 신발을 신고서 시내를 활보하였고,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한편 어느 성 내지 궁전을 조영할 때는 공사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내려, 한 장의 호랑이가죽을 허리에 두르고 다녔다. 그리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나 그 편이 편리하다고 생각될 때는 지면에 호랑이가죽을 깔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자기 자신이 조영하는 공사를 감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섬기는 토노殿나 가신들이 짓고 있는 저택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여, 자주 그들에게 설계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구조가 마음에 들면 "훌륭하다"고 시인했으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폄하하면서 그 부분을 손질해 고치게 했다.

  그는 스님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고 그들을 기피하고 혐오하는 반면, 키리시탄의 좋은 벗이었다. 그렇기에 그 무렵 이 땅에 36년간 체류하던 예수회의 사제들에게 여러 가지로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グレゴリオ・デ・セスペデス 사제는 그와 이야기했던 걸 내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는 노부나가와 매우 사이가 좋은 친구사이였다. 그러므로 "만에 하나 그의 앞날이 차단당하는 일이 없다면, 그는 분명 키리시탄 신도들을 지원해줄 것임이 틀림없다."는 다대한 기대가 그에게 모이고 있었다 한다.”(야마자키 전투 전야 상황을 서술하며 노부나가의 인물됨을 회고한 부분에서

  노부나가는 무예와 용기가 뛰어나고 명예심도 왕성한 인물로, 그 배하에 다수의 탁월한 무장들을 두었고 그들에게 막대한 은상을 두둑히 내렸기에, 좀 안다 싶은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해보면 "교토로 밀고 올라가 천하의 주인이 된 노부나가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갖게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군대의 대장이 될 만한 자를 임명하였고, 그들에게 영지를 수여했으며, 병사들에겐 급료를 지불하여 모든 일에 빈틈없이 준비를 진척시켰다. 그렇기에 가면 갈수록 수많은 무장들이 그에게 귀복해왔다.”(포상에 인색하지 않았던 노부나가의 일면)

  "나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구나."(히론이 전하는 노부나가의 생전 마지막 말)


참조 :《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激震 織田信長》P.106 ~ 109(小和田哲男)
《歷史群像シリーズ 50 戰國合戰大全 上》P.227(小和田哲男)


덧글

  • 존다리안 2022/05/28 13:24 # 답글

    불교의 제육천마왕이지만 천주교에게는 따뜻하지
  • 3인칭관찰자 2022/05/28 14:48 #

    그래서인지 천주교(특히 예수회)와 불교(주로 노부나가에게 직접적으로 핍박당한 종파들)의 노부나가 평가는 판이하죠
  • 無碍子 2022/05/29 16:30 # 답글

    일본의 개방이 이리도 빨랐다는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22/05/29 17:42 #

    중국, 류큐, 일본 등이 빨랐다기보단 조선이 서양과의 접촉ㆍ왕래는 유독 뜸했던 것 같아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451
346
438880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