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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칸]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 (7) ┗ 日本合戰譚



  이 글은 패전 이전 일본의 유명 대중소설 작가로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창립자 겸 초대 사장이자, (고인이 된 친구들의 이름을 따) 아쿠타가와 상芥川賞 / 나오키 상直木賞이라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만들어내기도 한 키쿠치 칸菊池寬 씨의 저서《일본합전담日本合戦談》에 포함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편을 번역한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의 내용은 일본 전국시대를 둘러싼 지금의 통설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자인 키쿠치 씨가 별세하신 때로부터만 쳐도 이미 74년이 지났으니 말이죠. 좋든 싫든 현대의 역사가들이 '1차 사료가 아니다'는 이유로 가지쳐낸 내용이 여기에는 제법 섞여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약 5년만에 다시 번역을 시도하려 합니다. 옛날만한 끈기도 열의도 없지만, 한번 벌여놓은 판은 정리를 해둬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어찌됐든 모리마사군은 하이고ㆍ아오키 등의 활약에 의해 어떻게든 퇴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동 트기 전의 어둠이 깔린 새벽 4시가 지난 시각, 히데요시는 사루가바바猿ヶ馬場에 걸상을 놓게 하고 거기에 앉아서 지휘를 하는 중이었다. 이때 야스이 사콘다이부ㆍ하라 히코지로 등도 드디어 물러나 모리마사와 합류했기에, 다소나마 기운을 되찾은 모리마사는 시미즈다니의 고개로 물러나 태세를 재정비하려 했으나, 히데요시군이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며 추격해왔기에 대오를 추스를 여유를 얻지 못하고 무너졌다.

  히코지로ㆍ사콘다이부 두 사람은 1정마다 화승총 사수 10명ㆍ궁수 5~6명을 매복시키고 그 두 사람은 교대로 후미의 역할을 맡으면서 퇴각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선봉부대가 곧장 밀어닥쳤기에 화승총을 발사할 틈도 얻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이이노우라飯之浦에서 버텨보려고 했다. 카토 토라노스케(加藤虎之助, 역주 : 키요마사淸正)ㆍ사쿠라이 사키치(櫻井左吉, 역주 : 이에카즈家一)가 나아가, “모리마사가 진용을 다시 정비하기 전에 깨뜨려야 합니다.”라고 히데요시에게 청했다. 히데요시는 웃으며 이를 허가하지 않고, “내 우마지루시馬印를 모리마사군의 배후에 있는 산에다 세우라”고 명하고서 과자를 씹고 차를 마시면서 유유자적하게 있었다.

  시바타 카츠마사는 3천여 기를 이끌고 시즈가타케의 봉우리가 늘어선 굴착 수로 부근에서 후미부대를 맡고 있었는데, 형 모리마사로부터 재삼에 걸쳐 퇴군을 명 받아 철수하다 히데요시군의 활과 화승총 사격에 노출되어, 그 부대는 난군亂軍이 된 끝에 팔방으로 흩어졌다. 도망치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히데요시의 열매 달린 표주박 우마지루시가 행로 앞에 아침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걸 보고, 당황하고 또 낭패하였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히데요시는 “자, 때는 지금이다. 모두 돌격하라!”고 지시하며, 그 스스로가 소라고둥을 불었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경에 히데요시는 총공격을 명한 것이다.

  그 친위대도 일제히 창을 꼬나쥐고 돌격하여, 앞장서 달리던 이시카와 효스케(石川兵助, 역주 : 카즈미츠一光)는 하이고 고자에몬과 1:1 대결을 벌였으나 고자에몬이 이겼다. 막 효스케의 목을 베려 하던 차에 모리마사의 사자가 달려와 상담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지금 당장 와 달라는 말을 전했다. 고자에몬은 이를 듣지 않고 “물러나야 할 곳에서 물러나지 않은 실패자 모리마사가 이제 와서 무슨 상담이냐! 이미 홋고쿠의 운명은 오늘로서 끝장났다!”며 다시 돌아가 싸움을 벌였다. 카스야 스케에몬(糟屋助右衛門, 역주 : 타케노리武則)이 좋은 상대를 만났다며 고자에몬과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웠다. 스케에몬이 드디어 위에 올라타 목을 베려고 하던 것을 고자에몬이 지체 없이 소도를 잡고 두 번 찔렀으나, 갑옷이 견고하여 칼날이 파고들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당했다.

  사쿠마 카츠마사도 니와토하마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카토 토라노스케와 카토 마고로쿠(加藤孫六, 역주 : 요시아키嘉明)가 그대로 돌진하여 이를 쉽게 무너뜨렸다. 아사이 키치베에浅井吉兵衛ㆍ야마지 쇼겐도 이젠 방어해낼 힘도 없이 시모요고下余吾를 향해 도망치고 있던 것을 와타나베 칸베에渡辺勘兵衛, 아사이 키하치로浅井喜八郎가 큰 목소리로 “누군지 알고 있다! 두 사람, 돌아와서 싸워라!”고 도전했으나 아사이와 야마지 두 사람은 산의 낭떠러지를 잘못 디뎌 산골짜기로 굴러 떨어졌다. 이때 산기슭을 지나치던 오오시오 킨에몬 휘하의 무사 호즈미 고자에몬八月一日五左衛門이 이들의 목을 잘랐다고 하나, 일설에 따르면 카토 키요마사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다 절벽에서 2~30간 아래로 굴러 떨어진 끝에 카토가 쇼겐의 수급을 취했다고도 한다.

  나오키 산쥬고直木三十五 씨가 “카토 키요마사는 야마지 쇼겐을 죽인 것 외엔 그다지 무공이 없지.” 라고 깐 적이 있는데, 사실 야마지 쇼겐을 죽였다는 이야기조차 전설담에 가깝다.

  야도야 시치자에몬은 토리우치사카 남쪽에서 사쿠라이 사키치와 맞붙어 사키치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카스야 스케에몬이 합세하면서 둘의 협공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사쿠마 카츠마사도 이노우라에서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市松, 역주 : 마사노리正則)ㆍ카타기리 스케사쿠(片桐助作, 역주 : 카츠모토且元)ㆍ히라노 곤페이(平野権平, 역주 : 나가야스)ㆍ와키자카 진나이(脇坂甚內, 역주 : 야스하루安治) 등의 무사가 창끝을 나란히 하고 덮쳐오는 가운데, 4명의 병사를 베어 죽이면서 싸움을 계속했지만 끝내 참살을 당했다.

  모리마사 역시 분전하였으나 전군은 이미 난맥상태로 지리멸렬하게 퇴각하고 있었다. 모리마사는 평소처럼 크게 호통을 치며, “아군의 무사들에겐 겁쟁이 신이 붙었는가!” 하고 매도했으나 하라 히코지로가 “말씀하신 것처럼 아군 병사가 내빼고 있는 건 대장에게 겁쟁이 신이 달라붙어, 철군하여 태세를 정비할 수단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퇴군하는 마당에 승리가 있을 리 없지 않소.” 라고 내뱉자, 모리마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에다 토시이에 부자는 2천 기를 이끌고 포진하고 있었으나, 패군하는 모습을 보자 화려한 활약 한 번 하지 않고 조속히 후츄로 철수했다. 토시이에의 출진은 딱히 그가 카츠이에의 가신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접경을 접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한편으론 히데요시와도 대단히 사이가 좋았던 만큼 허울 좋은 중립을 가장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 앞서 히데요시와 토시이에 사이에 모종의 협정 정도는 맺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니와 나가히데가 이를 보고 ‘때가 됐다’며 여러 성채에 돌출을 명령했다. 홋고쿠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북쪽과 서쪽을 향해 도망쳤다. 오하라 신시치小原新七 등 7~8기가 모리마사 등을 도망보내기 위해 약간 높이가 있는 고지대에 머물러, 추격해오는 히데요시군을 떠밀어내며 방어전을 벌이던 걸 이키 한시치(伊木半七, 역주 : 토오카츠遠雄)가 맹렬히 돌진해 끝내 오하라 등을 물리쳤다.

  이때의 전투에서 두 카토(역주 : 키요마사와 요시아키)ㆍ카스야ㆍ후쿠시마ㆍ카타기리ㆍ히라노ㆍ와키자카 일곱 명의 활약이 발군이었으므로 히데요시는 이를 칭찬하며 각각 감사장을 수여했고, 본래 몇백 석 정도의 영지를 갖고 있던 그들 모두에게 3천 석을 주어 동렬로 올려주었다(역주 : 필두인 후쿠시마는 5천 석, 나머지는 전원 3천 석을 수령). 이들이 그 유명한 '시즈가타케의 일곱 자루 창賤ヶ岳七本槍'이다. 이시카와 효스케, 이키 한시치, 사쿠라이 사키치 세 사람의 활약도 일곱 자루 창에 밀리지 않았으므로 ‘세 자루 타치三振太刀’라 부르며 두둑히 상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역주 : 본래는 이시카와 효스케, 사쿠라이 사키치도 일곱 자루 창이라 불리던 자들과 동렬이었다. 이시카와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므로 그의 동생 요리아키賴明에게 1천 석이 주어졌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시카와와 사쿠라이는 '일곱 자루 창'에서 누락되었다. '세 자루 타치'는 후대에 만들어진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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