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링크 : 스기우라 겐닌(일본 위키피디아 2022년 1월 8일 버전)
스기우라 겐닌(스기우라 겐토라고도, 생년불명~1575)은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다. 관위는 이키노카미壹岐守로, 스기우라 이키노카미杉浦壹岐守 내지 이키 법교壹岐法橋라 불렸다. 그 아들로 스기우라 마타고로杉浦又五郞가 있다. 에치젠 오오노 성주越前大野城主, 이야마 성주를 지냈다.
1. 생애
법교. 혼간사의 방관坊官으로 카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의 대장 중 하나였다.
에이로쿠 10년(1567), 시모츠마 라이소下間賴總를 대장으로 삼은 카가 잇코잇키의 에치젠 침공군에 참가하여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와 싸움을 벌였고, 전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중재로 아사쿠라 씨와 혼간사 간의 화목이 성립되었을 때, 잇키 측의 인질로 겐닌의 적자인 마타고로의 신병이 일시적으로 에치젠에 위탁되었다. 겐키 원년(1570)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를 양도하라는 서찰을 켄뇨顯如에게 들이밀었을 때는 맹렬히 반발하며, 항전을 촉구한 주전파였다고《石山軍記》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겐키 2년(1571) 4월 28일에 카이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賴가 편지를 보내, "카가ㆍ엣츄의 잇코잇키를 동원하여, 전력을 다해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엣츄越中 진출을 막아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겐키 3년(1572) 5월, 카가 잇코잇키를 인솔하여 엣츄로 진군, 시이나 야스타네椎名康胤ㆍ엣츄 잇코잇키들과 합류하여 연합군의 총대장으로 우에스기군과 싸워,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8월, 우에스기 켄신이 우에스기 본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후로는 점차 열세로 몰려, 카나자와고보金沢御坊에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9월 초순 벌어진 시리타레자카 전투尻垂坂の戰い에서 참패를 당하여, 토야마 성富山城을 지켜내지 못하고 패주했다.
텐쇼 원년(1573) 8월에 카가로 쳐들어온 켄신에 맞서 카가ㆍ엣츄 접경지대 부근인 야사히 산성朝日山城에서 이를 요격, 대량의 화승총을 이용한 일제사격 등으로 우에스기군에 손해를 입혀, 그를 격퇴하였다.
텐쇼 2년(1574) 2월, 내란상태에 빠진 에치젠에서 잇키 측의 대장이 되어 카나즈金津에 도착했다. 에치젠 잇코잇키의 총 숫자는 2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겐닌은 잇키군을 인솔해 오다 가신 미조에 나가야스溝江長逸ㆍ토가시 야스토시富樫泰俊 등을 죽였다. 에치젠 전역을 혼간사 신도들이 지배하게 되자, 혼간사로부터 오오노 군시大野郡司로 임명되어 이야마 성(亥山城, 별칭은 츠치바시 성土橋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4월에는 츠치바시 노부아키라土橋信鏡를 멸망시켰다.
텐쇼 3년(1575),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ㆍ하라 마사시게原政茂가 미노 주의 여러 고개를 넘어 에치젠을 공격해오자, 오오노 군시 신분이었던 겐닌은 잇키군을 인솔해 하치부세 산성鉢伏山城에 입성해 이들을 요격했으나, 노부나가의 대군 앞에 배신자와 도망자들이 속출하면서 대패하였다. 겐닌은 여기서 전사헀다고도, 카가로 돌아간 후 책임을 추궁받아 카나자와고보에서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2. 혼간쇼즈本願淸水
겐닌이 이야마 성주였을 때 오다군과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해자를 파서 이 성을 방호하려 했고, 신도들을 동원해 성 주변에 용수지를 파게 하여 물을 충당했는데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이 용수는 '혼간쇼즈'라 불리게 되었다.(《大野市史》) 잇코잇키가 괴멸당한 후 새로운 오오노 군의 지배자가 된 카나모리 나가치카의 정비사업과 치수공사가 행해진 끝에, 이곳은 생활용수로 폭넓게 이용되면서 오오노 주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현재는 민물 큰가시고기 서식처의 남방 한계선으로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수원지 주변은 '혼간쇼즈 큰가시고기 마을'로 개발되어 있다.
3. 참고문헌
《越州軍記》
《北陸七国志》
《朝倉義景》(요시카와코분칸)
《遠山文書》
후쿠이신문福井新聞 2010년 5월 15일(토요일)자 카나즈, 미즈에, 타시로ㆍ난세를 헤쳐나온 남자들 ④(아와라 시 묘류사妙隆寺 주지 코다마 죠세이児玉常聖)
아카가미 료《인왕의 본원仁王の本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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