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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타니 마사미츠] 장유유서長幼有序 역사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읽고 감명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다.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은《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서 "서적은 문집ㆍ문선ㆍ신부ㆍ사기ㆍ오제본기ㆍ천문ㆍ표ㆍ박사신문"이라 적고 있다.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로 백씨문집白氏文集ㆍ문선文選ㆍ신부新賦ㆍ사기 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ㆍ신불에게 바치는 기원문ㆍ상표문上表文ㆍ관직서임 신청서 등이 헤이안 시대에 있었고, 이 시대의 궁정인들은 당연히《사기》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기》가 사람의 인격을 일변시킨 경우가 에도 시대에 있었다.

  '미토 (토쿠가와德川) 미츠쿠니水戶光圀'가 그랬다. 미츠쿠니는 (미토 토쿠가와) 요리후사賴房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덧붙이자면 요리후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막내아들이다. 미츠쿠니의 생모는 히사코久子라는 여성으로, 그녀가 맨 처음 낳은 아이가 (마츠다이라松平) 요리시게賴重로 미츠쿠니의 동복형이다. 미츠쿠니의 둘째형은 이복형이었는데, 유소년기에 병으로 죽었다.

토쿠가와 요리후사의 초상화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德川賴房' 항목)

  생모인 히사코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요리후사는 그녀가 요리시게를 배었을 때도, 미츠쿠니를 배었을 때도, "낙태시켜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미토 가문水戶家의 중진인 미키 유키츠구三木之次의 도움으로 히사코는 중절을 모면했고, 이렇게 태어난 두 아이는 비밀리에 양육되었다.

  요리시게는 교토京都로 보내졌고, 미츠쿠니는 미토에서 양육되었다. 훗날 두 사람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미츠쿠니 쪽이 적자嫡子로 인정되었다. 이 결정에는 당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의 의향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미츠쿠니''미츠光'는 이에미츠家光에게 일자배령한 이름자다.

  17세까지의 미츠쿠니는 감당키 힘든 불량소년이었다. 그러나 18세 때《사기》「백이열전伯夷列傳」을 읽고 감동한 후, 사람이 변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훗날 미츠쿠니의 양자가 된 (미토) 토쿠가와 츠나에다德川綱條는 "선인은 18세 때 백이열전을 읽고 궐연히 그 높은 뜻을 사모하게 되었다."《대일본사 서문》에서 서술하였다, '선인'이란 물론 미츠쿠니를 지칭하는 것이다.

  백이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3남 숙제叔齊에게 후계를 물려주고 싶어하는 걸 알고, 나라를 떠났다. 그러자 숙제도 형을 제쳐두고 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여, 형을 쫓아 나라를 등졌다.

  고죽국 형제의 이야기가 맏형 요리시게와 미츠쿠니 본인의 관계에 투영된 것이다.

1969년작 TBS판 드라마 '미토 고몬'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미토 고몬(드라마)' 항목)

  그리고 미츠쿠니는《사기》「오태백세가吳泰伯世家」의 이야기에도 감동했다.

  주周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자기 자식들 중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에게 후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이를 눈치챈 고공단보의 장남 태백은 나라를 떠나 오吳로 흘러가, 거기서 자기 나라를 건국했다.

  미츠쿠니는《사기》를 통해 형의 괴로운 심정을 헤아렸고, 그 결과 형의 아들인 츠나에다를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미토 번의 가독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미츠쿠니는 오나라 태백이 거주하였다는 '매리梅里'란 지명을 자신의 호로 쓰기도 했다.

출처 : 미야기타니 마사미츠宮城谷昌光,《史記の風景》
p.44~45. 新潮文庫, 2000.


덧글

  • rumic71 2021/09/22 15:34 # 답글

    "이 문장이 네놈들 눈에 보이지 않느냐!"
  • 3인칭관찰자 2021/09/22 15:57 #

    소싯적에 왜 이 양반이 후대에 들어 권선징악극의 히어로가 되어버렸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 에도 시대의 높으신 분들 중에선 이 정도로 친근감 있는 캐릭터성을 가진 사람이 드무니까 그런 거 아닐까, 하고 지금은 멋대로(?) 납득해버렸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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