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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우에스기 켄신과 코노에 사키히사 (下)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던 잡지인《文藝春秋 Special》의 2016년 봄호 p.72 ~ 77, 역사학자 타니구치 켄고谷口硏語 님께서 집필하신《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 신이 된 명장, 칸파쿠와 교환한 ‘혈서’》를 번역한 글입니다.


  <타니구치 켄고谷口硏語>

  1950년 기후 현岐阜県에서 출생. 호세이대학法政大学 대학원 박사과정 단위취득. 저서로《유랑의 전국시대 귀족 코노에 사키히사》(츄코신서中公新書),《아케치 미츠히데》(요센사역사신서洋泉社歴史新書) 등이 있다.


  피로 맹세한 기밀사항

  그 해 6월 10일 전후, 사키히사는 수행원 두 명만을 거느리고 “지극히 내밀한” 모습으로 오우미 사카모토에 있던 켄신을 찾아가 중요회담을 나누었다. 그 직후, 사키히사는 켄신에게「요리키나 다름없이 대해달라.」란 각오覚悟를 표명한 편지를 보냈고, 21일 피로 글자를 쓴 혈맹서약서를 상호간에 교환하였다.

  켄신과 사키히사가 교환한 이 혈맹서약서 중에 사키히사가 켄신에게 주었던 서약서 쪽은 우에스기 가문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이란 건,

  1. 켄신을 한결같이 의지하여 먼 땅으로 내려가겠다고 결의한 건 추호의 거짓도 없다.
  2. 켄신과 진퇴進退를 함께 하겠다. 다른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3. 기밀사항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겠다.
  4. 교토에 있을 때도 켄신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재능이 미치는 한 거리낌없이 도와주겟다.
  5. 나중에 켄신에 대한 수상쩍은 이야기가 들려오면, 이를 켄신에게 통지하여 확인하겠다.
  6. 서로의 마음 속에 거리낌이 없는 만큼,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유한遺恨을 품지 않겠다.

  여기에 나오는 ‘기밀사항’이란 건 무엇이었을까? 훗날의 행동을 감안해 추량해보자면, 두 사람이 상의했던 기밀사항이란 다음과 같은 전략구상이었으리라 상정할 수 있다.

  “즉 켄신이 칸토 칸레이에 취임하여 몇 년 내로 칸토 평정関東平定을 완수한다. 그리고 켄신은 입경하여 키나이 지방도 평정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왕년의 모습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이를 실현키 위한 수단으로서 두 사람이 결정한 건, 일본 역사상 전례前例가 없는 계획이었다. 다름이 아닌 “현직 칸파쿠가 직접 칸토에서 싸운다”는 것이었다.

  칸토 칸레이인 켄신이 코가 쿠보 아시카가 씨뿐만 아니라 교토 조정의 칸파쿠 코노에 사키히사까지 옹립한다면, 칸토 평정은 더욱 더 용이해질 것이리라. 칸토에는 코가 쿠보를 두고, 켄신과 사키히사는 곧장 칸토의 군대를 이끌고 입경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기밀사항’이었다.

  실제로 켄신이 에이로쿠 2년(1559) 10월 에치고 주로 돌아간 후,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오오기마치 텐노의 즉위식 등 제반 사정들을 처리한 사키히사가 에치고로 내려왔다. 에이로쿠 3년(1560) 9월 18일, 텐노에게 휴가를 받아 다음날인 19일 교토를 떠나, 역사상 최초로 현직 칸파쿠가 동일본 땅에 내려온 것이었다.

  사키히사가 카스가 산성 성하城下에 도착했을 땐 이미 켄신은 칸토로 출병한 상태였다. 켄신 본인이 지휘한 칸토 출병은 이번이 최초였다.

  칸토 전역을 제패하려던 호죠 우지야스의 움직임에 대항해 칸토의 反 호죠 세력은 켄신에게 출마出馬를 요청, 드디어 켄신은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봉대한다는 명분하에 8월 말, 카스가 산성을 진발했다. 그 병력은 8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 켄신의 칸토 출병 시기는 사키히사의 에치고 하향 결정을 감안한 것임이 분명하다.

  켄신은 다음 해인 에이로쿠 4년(1561) 3월, 호죠 씨의 본거지인 사가미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하였다. 켄신이 남하하자 칸토 제장들은 줄줄이 빌붙어, 오다와라 성 포위 때의 병력은 무려 1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켄신은 1개월 동안 칸토 제일의 견성堅城이라 일컬어지던 오다와라 성을 포위했으나 결국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윽고 포위를 푼 후 윤 3월, 칸토 제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마쿠라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 사전鶴岡八幡宮社前에서 칸토 칸레이 습직襲職ㆍ우에스기 가문 습명식襲名式을 거행하고,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이름자를 받아 ‘마사토라政虎’로 개명했다.

  에이로쿠 4년 5월 하순~6월 초순, 사키히사는 에치고 후츄越後府中를 떠나 칸토로 향해 코즈케 우마야바시上野厩橋에 다다랐고, 켄신 역시도 우마야바시로 개선했다. 켄신은 곧바로 에치고로 돌아갔으나 사키히사를 대동하는 대신, 이후 그를 코가 성에 입성케 했다. 코가 성 입성에 대한 전략은 켄신과 사키히사 사이에 미리 의사통일이 되어 있었던 걸 이행한 것이리라.

  사키히사의 코가 성 입성에 앞서, 켄신을 위시한 칸토 제장들에 의해 코가 쿠보古賀公方로 옹립된 아시카가 후지우지足利藤氏 역시도 코가 성에 입성한 상태였다.

  이렇게 하여 켄신은 칸파쿠와 코가 쿠보라는 두 권위를 코가 성에 집결시켰다. 즉 켄신은 시모우사 코가를 호죠 씨의 사가미 오다와라에 대항하는 칸토의 ‘수부首府’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 사키히사는 지금까지의 이름인 ‘사키츠구前嗣’에서 ‘사키히사前久’로 개명하고, 사인도 쿠게公家의 양식에서 무가武家의 양식으로 바꾸었다. “켄신의 요리키와 같이”, “켄신과 진퇴를 함께 하겠다”며 칸토로 찾아온 칸파쿠 사키히사의 결의가 얼마만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사키히사는 “전국시대 무장이 되려 했던 것이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권위權威가 아무리 집결해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권력權力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켄신ㆍ사키히사의 “권위에 의한 칸토 평정” 기도를 좌절시킨 최대의 원인은, 카이 타케다ㆍ사가미 호죠 간에 체결된 코소동맹甲相同盟이었다.


  타케다ㆍ호죠 동맹에 농락당하다

  코가 성에서 에치고로 돌아온 켄신은 쉴 틈조차도 없이 이번엔 시나노 주로 출진해 에이로쿠 4년(1561) 9월 10일, 타케다 신겐을 상대로 역사상 유명한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第四次川中島の戦い를 치렀다.

  켄신이 칸토를 떠나자마자 호죠 씨는 반격에 나섰다. 그 해 10월 초 호죠 우지야스는 무사시 주 마츠야마武蔵松山 방면으로 포진하여, 켄신이 부재한 칸토의 제장들 사이에선 동요動搖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호죠 씨가 반격에 나서면 중소 무장들의 실력으로는 단독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연스럽게 호죠 편으로 갈아타는 무장들이 속출했다. 이윽고 시모츠케 사노 씨下野佐野氏가 이반離反하면서 코가 성 주변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제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결국 우에스기ㆍ타케다 쌍방에 통렬한 타격을 입혔을 뿐, 타케다 신겐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는 실패했다. 11월에 들어 타케다 신겐은 호죠 씨에 호응하여 코즈케 주를 침공했고, 켄신 역시도 칸토로 출병했다. 이후 칸토 각지에서 우에스기 VS 호죠ㆍ타케다 간의 싸움이 벌어진 끝에 켄신의 칸토 점령 구상은 돈좌頓挫되고 말았다.

  에이로쿠 5년(1562) 2월 중순, 결국 켄신은 사키히사를 코가 성에서 탈출시킨 후, 4월에는 그를 대동하고 에치고 후츄로 귀환했다. 이후 아시카가 후지우지도 코가를 떠나 아와 사토미 씨安房里見氏에게로 돌아갔다.

  코노에 사키히사는 켄신의 위류慰留를 뿌리치고 7월, 교토로의 귀로에 올라 8월 2일, 보고를 올리기 위해 입궐했다. 사키히사의 귀경에 “분개했다”는 켄신은, 그럼에도 칸파쿠의 ‘이용가치’에 환상을 품고 있었을까.

  켄신은 “내가 칸토 칸레이가 되면 일거에 일이 성취될 것이다.”고 의기양양해 있던 모양이나, 눈이 깊이 쌓이는 에치고 주 한쪽 구석에서 칸토 북부와 시나노를 향해 양면 군사작전을 전개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덧붙이자면 타케다ㆍ호죠 두 가문의 실제적實際的인 연대 앞에 교토 칸파쿠ㆍ코가 쿠보ㆍ칸토 칸레이란 고루한 권위를 앞세워 대치한 켄신의 전략 자체가 이미 시대적 흐름에 결정적으로 뒤쳐진 것이었다, 고 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동일본의 무사들에게 교토 조정이란 건 거의 익숙지 않은 권위에 불과했다. 켄신과 칸토 무사들 사이의 가치관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우에스기 켄신이 좋든 나쁘든 간에 독자적인 대방침, 다른 센고쿠다이묘들과 판이한 천하구상을 제시하며 싸운 건 에이로쿠 2년(1559) 입경 때부터 에이로쿠 5년(1562) 사키히사 귀경에 이르는 기간까지였다. 이후 켄신은 호죠ㆍ타케다와 다를 바 없는 종류의 힘, “현실주의에 의한 영지 유지와 확대”를 지향하는 ‘보통의 센고쿠다이묘’로 돌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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