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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우에스기 켄신과 코노에 사키히사 (上)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던 잡지인《文藝春秋 Special》의 2016년 봄호 p.72 ~ 77, 역사학자 타니구치 켄고谷口硏語 님께서 집필하신《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 신이 된 명장, 칸파쿠와 교환한 ‘혈서’》를 번역한 글입니다.


  <타니구치 켄고谷口硏語>

  1950년 기후 현岐阜県에서 출생. 호세이대학法政大学 대학원 박사과정 단위취득. 저서로《유랑의 전국시대 귀족 코노에 사키히사》(츄코신서中公新書),《아케치 미츠히데》(요센사역사신서洋泉社歴史新書) 등이 있다.


 - 에치고의 강력한 군단을 이끌고 타케다ㆍ호죠에 맞선 칸토평정, 쇼군 가문을 향한 접근, 칸파쿠와의 혈맹... 명장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밝힌다. -

  우에스기 켄신은 여러 가지 의미로 돌출된 개성을 내뿜던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라 하겠다.

  우선은 그의 군사적 강력함. 타케다 신겐武田信玄과 벌인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가 유명하나 그 외에 수많은 전장에 임했으면서도, 적을 우려빼지 못하고 철수한 걸 제외하면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켄신은 무장이면서 그와 동시에 강렬한 종교적 카리스마를 가진 자이기도 했다. 비사문천毘沙門天을 향한 신앙은 대단히 돈독했으며, 전투를 앞두고선 군신軍神을 소환하는 ‘부테이시키武禘式’ 의식을 집전했다. 코우지 2년(1556)에 출가出家하겠다면서 본거지 카스가 산성春日山城을 떠나 코야 산高野山으로 가려 한 적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생 아내를 두지 않았으며, 만년에 들어선 밀교密敎에 더욱 깊이 귀의하며「아자리곤노다이소우즈阿闍梨権大僧都」위계를 받았고, 사후死後에 그 유체는 본거지에 모셔져 지금도「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의 주제신主祭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센고쿠다이묘’로서 가장 돌출突出된 면이 있다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나 조정朝廷 같이 이미 쇠퇴해버린 구체제旧体制를 진심으로 부흥시키려 생각하였던 점이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켄신은 스스로가 칸토 칸레이關東管領가 되었고, 여러 번 입경했으며, 당대의 칸파쿠關白인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를 칸토関東까지 데리고 가 공투共鬪하려 했다.

  어떤 의미에서 켄신은 ‘하극상下剋上’에 역행한 복고혁명復古革命을 지향하였던 것이다.


  칸토 칸레이의 수호자로서

  그렇다면 도대체「칸토 칸레이」란 무엇일까?

  무로마치 시대에 칸토에는 막부幕府의 출장기관인 ‘카마쿠라 부鎌倉府’가 놓여 있었는데, 이 카마쿠라 부의 우두머리인 '카마쿠라 쿠보鎌倉公方'가 칸토 무사들의 정점頂点에 선 존재였다. 카마쿠라 쿠보 지위에 앉는 건, 무로마치 막부의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의 동생, 아시카가 모토우지足利基氏의 후손들이었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어 그들은 쇼군 가문将軍家을 상대로 반항을 거듭하다 막부에 토벌당하기도 하면서, 카마쿠라 쿠보의 위세도 예전 같진 않게 된다. 결국 카마쿠라를 유지하지 못하고 시모우사 주 코가下總国古賀로 이주한 그들은 이후 코가 쿠보古賀公方라 불리게 된다. 그들을 대신해 칸토 무사들의 맹주격 존재로 자리를 잡아간 게 본래는 쿠보의 보필직이었던「칸토 칸레이」우에스기 씨上杉氏였다.

  그러나 그 칸토 칸레이도 이세 나가우지(伊勢長氏, 호죠 소운北条早雲)를 시조로 둔 오다와라 호죠 씨小田原北条氏의 압박을 받아 왕년의 실력을 잃어갔다. 종래의 권위가 통용되지 않는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전국시대 동일본에서는 카이 주甲斐国의 타케다 신겐이 시나노 주信濃国로 진출하는 등, 실력주의實力主義를 앞세운 영토 확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텐분 23년(1554)에는 사가미 호죠相模北条 / 카이 타케다甲斐武田 / 스루가 이마가와 씨駿河今川氏 사이에 속칭 ‘삼국동맹三国同盟’이 체결되어, 자기들 간의 직접대결을 회피한 세 다이묘는 제각기 다른 주변지역으로의 확장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이러한 대세 속의 이질분자가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훗날의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에치고 주의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爲景의 아들로 태어난 카게토라(이후의 본문에서는 ‘우에스기 켄신’으로 통일함)는 어린 시절 불문으로 보내졌다가 아버지 사후 환속하여, 그 후 형 하루카게晴景와 다툰 끝에 텐분 17년(1548) 슈고다이 지위를 차지해 카스가 산성 성주가 된다.

  이윽고 에치고 주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 켄신은 텐분 21년(1552), 칸토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호죠 씨의 압박을 받아 본거지 코즈케 히라이 성上野平井城에서 도망쳐오자, 그의 코즈케 주 복귀를 성사시키기 위해 지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에이로쿠 원년(1558), 이번에도 호죠 씨의 압박을 받은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또다시 켄신의 밑으로 도망쳐 왔다. 말하자면 켄신은 칸토 칸레이라는 구체제의 수호자격 포지션을 더욱 명확히 해 갔던 것이다.


  입경의 진정한 목적은

  이와 같은 정세 속에서 에이로쿠 2년(1559) 켄신은 입경하였다. 그에게는 두 번째 입경이었다.(첫 번째는 텐분 22년=1553년. 입궐하여 에치고 주와 그 주변의 적 - 구체적으론 시나노 주 제압을 밀어붙이던 타케다 신겐 -을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그 전년인 에이로쿠 원년(1558) 11월, 키나이 지방畿内地方에서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와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화목和睦이 이루어져 요시테루는 5년 만에 오우미 주 쿠츠키다니近江国朽木谷를 떠나 교토京都로 귀환했다. 켄신의 입경은 표면적으론 교토 귀환을 경하드리기 위함이었지만, 실질적 목적은 따로 있었다.

  5천 명이라 일컬어지는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에이로쿠 2년(1559) 4월 3일 에치고 카스가 산을 출발한 켄신은 27일 입경하여 5월 1일 입궐했고, 5월 하순에 쇼군 요시테루를 배알했다. 그리고 6월 26일, 네 통의 요시테루 지령서(指令書, 고나이쇼御内書)가 발령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쇼군 일가將軍家와 산칸레이 가문三管領家에 준하는 문서양식 사용을 허가한다.
  2. 옻칠한 가마 탑승을 허가한다.(쿠니모치다이묘에 준하는 예우)
  3. 칸토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에 대한 처우를 켄신에게 일임한다.
  4. 타케다 문제에 대해선, 시나노 제장들에 대한 켄신의 지휘권을 승인한다.

  이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건 당연히 3, 4번 항목이다. 이로써 켄신은 칸토 지방의 제장들 - 특히 사가미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와 카이의 타케다 신겐 -을 상대로 막부 질서상으로는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즉 쇼군의 권위를 등에 입고 칸토를 경략經略하겠다는 것이 켄신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쇼군 요시테루와 켄신 간의 교섭은 교토의 정치정세와도 연관되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무로마치 막부 권력회복에 우에스기의 군사력을 이용한다는 선의 이야기 정도는 협의가 됐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상대에게 불신감을 품으면 교섭 그 자체가 결렬될 미묘한 상황이었을 터이다. 교토는 아직도 미요시 씨의 지배하에 있었고, 켄신의 수행원들 중에서도 전란이 끊이지 않는 칸토를 떠나 입경한 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 세력 역시 있었을 터이다.

  이런 미묘한 교섭을 중개해준 사람이 바로 코노에 타네이에近衛稙家ㆍ사카히사(前久, 이 시점의 이름은 사키츠구前嗣) 부자였다.

  이 중 코노에 사키히사는 다름아닌 전국시대 조정朝廷ㆍ쿠게公家 권력의 키 퍼슨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훗날엔 노부나가信長와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 사이의 조정역할에 힘썼으며, 히데요시秀吉를 유자猶子로 삼아 칸파쿠 정권이 출범하는 길을 터주었고, 이에야스家康가 토쿠가와 성德川姓을 쓰는 문제를 알선해주는 등, 천하통일天下統一 사업과 깊이 연관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요시테루-켄신 회담 당시 24세였던 사키히사는 이미 칸파쿠 지위에 있었다.(18세 나이에 취임) 칸파쿠라면 텐노를 보좌補佐하여 조정의 정치를 집행하는 조정관위의 최고위직으로, 쇼군 요시테루의 모친은 사키히사의 숙모였고 사키히사의 누나가 요시테루의 정실正室이었기에, 아시카가 쇼군 가문과도 지극히 가까운 입장이었다.

  조정ㆍ쿠게의 권위가 조락凋落하던 이 시대에 사키히사는 실력회복을 목적으로 삼은 행동에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에게 비중 있는 정치적 입장을 가져다 줄 무장이 출현하길 간절히 고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사키히사 앞에 켄신이 나타났다. 교섭을 중개하는 과정에서 사키히사는 켄신에게 경도되어, 급속히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젊은 칸파쿠가 원하고 있었던 것 - 복고주의復古主義적 정치성향과 불패의 군단을 거느린 군사력 - 을 켄신은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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