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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 이르기까지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8호(2003년 4월호) 98~105쪽의 기사인,《격투 쿠마모토 성熊本城 - 정예 사츠마군薩摩軍을 저지한 타니 타테키谷干城의 결단!의 초반부 내용만을 발췌번역한 것입니다.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메이지 10년(1877)에 발발한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은 메이지 유신의 기간전력基幹戰力이었던 사츠마 무사들이 자기들의 복권復權을 걸고 징병제도徵兵制度로 인해 설립된 정부군政府軍에 도전한, 구식 군사체제와 신식 군사체제간의 싸움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축성한 전국시대 축성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던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유신 완수의 원동력이 된 근대장비와 전술을 보유한 사츠마군이 공격하는 역전현상이 일어난 전쟁이기도 했다.

  사츠마ㆍ쵸슈ㆍ토사를 비롯한 웅번雄藩들에 의해 성취된 메이지 유신은 토쿠가와 막번체제에 종언을 고하고 왕정복고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전국의 270여개 번들은 여전히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유지한 채로 건재하였다. 이는 메이지 정부에겐 세상이 다시 무사武士의 것으로 역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위험요소로 비쳤다. 그리하여 정부는 메이지 2년(1869)에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실시하고, 뒤이어 메이지 4년(1871)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여, 무가사회武家社會를 완전한 붕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무사들에게 결정적인 치명타를 날린 건, 평민들을 징병해서 정부군을 조직하겠다는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였다. 이에 따라 ‘무사’라는 특권계급은 순식간에 ‘사족士族’이란 이름의 실업자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후, 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각지에서 매년 사족들의 폭동暴動이 일어났다. 그 주된 사건들만 해도 30개가 넘는다. 이들 모두가 무사로서의 자부심과 직업을 빼앗긴 사족들이 자신들의 복권을 걸고서 벌인 싸움들이었다.

  메이지 6년(1873),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가 속칭 ‘정한론 논쟁征韓論論爭’에 패배하여 카고시마로 낙향.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를 위시한 사츠마의 사족들도 행동을 같이 하면서 큐슈의 정세는 일거에 긴박해졌다. 사츠마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기라도 하듯 사가의 난佐賀の亂이 발생했고, 쿠마모토에서도 진푸렌의 난이 일어나는 등, 사족들의 반란이 속출했다.

  특히 진푸렌의 난神風連の亂은 세이난 전쟁의 발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메이지 9년(1876) 10월 24일 오후 11시 30분, 케이신당敬神党이 중심이 된 쿠마모토 사족 170여 명이 쿠마모토 성 서쪽에 위치한 후지사키하치만 궁藤崎八幡宮에 집결한 후 쿠마모토 성내의 병영兵營과 현청縣廳 등지를 습격하였다.

  이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자택에 있던 쿠마모토 현령 야스오카 료스케安岡良亮와 쿠마모토 진대 사령장관 타네다 마사아키種田政明 소장, 참모장 타카시마 시게노리高嶋茂德 중령 등은 참살당했고, 제 13연대 연대장 요쿠라 토모자네与倉知実 중령도 부상당했으며, 영내에서 지내던 병사 65명이 전사하고 167명이 부상을 당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연대기連隊旗까지 탈취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부상을 무릅쓰고 출격한 요쿠라 연대장은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제 13연대 3대대를 중심으로 부대를 재정비, 연대기를 탈환하여 면목面目을 세운 후 반란사족들을 괴멸시켜 난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징병으로 소집된 진대병들의 취약성은 이 사건으로 폭로되었고, 이 사건은 쿠마모토 공방전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복선이 되었다.

  메이지 10년(1877) 1월 말, 카고시마 사학교당鹿兒島私學校党이 일으킨 화약고 습격사건火薬庫襲撃事件과 메이지 정부의 사이고 암살계획 의혹 발각으로, 사츠마 사족들의 거병擧兵은 결정되다시피 했다.

  그들의 목적은 “사이고를 중심으로 정부를 쇄신해 다시 한 번 유신을 단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여타 사족반란들과 별 차이가 없는, 무사계급을 복권시키기 위한 결기에 불과했다.

  메이지 유신은 이를 단행한 무사계급의 세습적 직업을 소멸시켜버렸고, 결국 무사들은 자기들의 보신을 위해 구체제 부활을 도모해야 했으니, 세이난 전쟁에는 이런 아이러니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덧글

  • BigTrain 2021/07/29 10:53 # 답글

    사쓰마 무사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릴 줄 몰랐던 걸까요? 조슈의 기병대는 그냥 옆 동네 이야기고 유신되면 내 세상이다!라고만 생각했던 걸까요..
  • 3인칭관찰자 2021/07/29 13:03 #

    일단 사츠마 번의 실권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츠부터가 막부가 쓰러지면 시마즈 가문이 주도하는 신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단 말까지 있으니까요. 아무리 왕정복고 어쩌고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현실에선 토쿠가와 막부를 대신한 시마즈 막부나 모리 막부가 출현할 거란 관측도 널리 퍼져 있었다더군요.

    그런 상황이었으니 메이지 유신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 메이지 정부가 무사들을 토사구팽하리라는 것까지 예견하였던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던 것 같습니다.

    사츠마 번은 메이지 유신과 보신전쟁의 1등 공신이었기에 신정부의 근위군단 장병, 육해군 장교, 경시청 경찰 등으로 사츠마 무사들이 많이 특채되어서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었습니다만 채용에서 밀려난 사람 역시 무지 많았고, 마초이즘과 밀리터리즘이 유독 강렬했던 사츠마 무사들로선 무사계급으로서의 기득권을 빼앗긴 게 다른 번 무사들의 곱절로 분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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