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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무장들이 본 오다 노부나가 (2) 역사



  이 글은《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激震 織田信長》P.110 ~ 113에 수록된, 일본 전국시대사의 저명한 권위자인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 시즈오카 대학 명예교수님께서 집필하신, <무장들이 본 노부나가 –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허망하게 쓰러지겠지요.>를 번역한 글입니다.


 “노부나가의 끝을 본 것 같구나”

  노부나가의 방식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당히 난폭’했다. 이는 히에이 산 방화ㆍ토벌, 각지의 잇코잇키를 상대로 저지른 잔학하다고 할 수 있는 전법에서 드러난다.

  그러한 노부나가의 수법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무장들이 많았으리라 추측되나, 노부나가 전성시대에 이를 입에 담기는 용이하지 않았으리란 생각도 들며, 실제로 남아있는 사료는 의외로 희소하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외교승外交僧 겸 휘하 무장이었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노부나가의 시대는 앞으로 5년, 3년은 더 갈 것 같습니다. 내년 즈음이 되면 조정 귀족公家의 반열에 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허망히 쓰러지겠지요.”(《킷카와 가문 문서吉川家文書》)라고 언급한 것은 주목받을 만하다.

  이는 텐쇼 원년(1573) 11월, 안코쿠지 에케이가 교토로 올라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처우를 둘러싸고 노부나가 쪽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ㆍ아사야마 니치죠朝山日乗와 협의, 그 교섭경과와 결과를 12개조 문서로 만들어 테루모토의 가신인 이노우에 마타에몬 하루타다井上又右衛門春忠와 야마가타 에치젠노카미山県越前守에게 보고한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에케이가 노부나가 본인을 직접 만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부나가의 가신들과 접촉하여 그에 관한 정보를 알아가면서 ‘의외로 권력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눈치 챘던 것이리라. “노부나가의 시대는 앞으로 5년, 3년은 더 갈 것 같습니다.”란 구절에도 위와 같은 낌새를 읽어낼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허망하게 쓰러지겠지요.”라는 예언을 했다는 점이다. 안코쿠지 에케이 같은 부류의 군사軍師는 주술ㆍ점성술 등을 익히고 주역점을 치거나 하면서 예언을 하는 경우 역시 있지만 이 같은 경우는, 노부나가가 지나치게 독재적이고 독단전행獨斷專行이 심해, 종국에는 가신들 중에서 이를 참아내지 못하고 모반謀反을 일으키는 자가 나올 거란 걸 내다본 것이리라. 그리고 이는 현실이 되어, 혼노사의 변本能寺の變이라는 형태로 실제 발발하고 만다.

  기실 이 시기, 노부나가의 장래를 위태롭게 여긴 무장은 한 명 더 있었다. 에치고 주越後国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그러했다. 사료 그 자체로 보면 앞에서 언급한 안코쿠지 에케이의 조문과 달리, 에도 시대로 접어든 후에 쓰인 군담서적軍記物 부류에 속하는 책에 기록된 것이므로 사료적 신빙성은 몇 수 정도 떨어지나,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흥미롭다는 점에서 이어서 소개하겠다.

  텐쇼 3년(1575) 11월, 교토에서 보내진 정보가 카스가 산성春日山城에 있는 우에스기 켄신에게 당도했다. “노부나가가 곤다이나곤權大納言에 임관했으며 우코노에타이쇼右近衛大將를 겸직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보고를 들은 켄신은 두 명의 양아들 –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ㆍ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景虎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졌다.

  [ “노부나가의 천하창업이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못했음에도 다이나곤에 타이쇼라니, 도리를 모르는구나. 호죠 씨北条氏가 카마쿠라의 부총수로 권력을 잡은 후에도 오랫동안 낮은 관위에 머물며, 천하의 제후들에게 겸양했던 선례를 사모해야 할 시기인데 말이다. 자기가 있어야 할 분수를 몰라서는 국가를 오래 보전하기 힘들지. 너희 둘은 젊으니 앞으로 어떠한 행운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비해 시세ㆍ처세ㆍ분수 세 가지에 대해 어긋난 생각을 품지 않도록 경계하여라. 어쨌든 노부나가의 끝을 본 것 같구나.”고 말씀하셨다. ]

  아시카가 요시아키 쇼군을 추방하고 천하에 호령하기 시작한 노부나가를 향한 시기와 질투가 켄신의 마음속에 전혀 없었으리라고 할 순 없지만, 두 명의 양아들을 상대로 “지금과 같은 양태라면, 노부나가의 앞날도 그리 길지는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는 건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부나가와 켄신이지만 한때는 강화를 맺은 적도 있다. 현재 요네자와시립우에스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교토 시내시외 그림병풍>은 노부나가가 켄신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증정한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동맹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고, 텐쇼 5년(1577)에는 테도리 강 전투手取川の戰い가 발발했다. 켄신 본인은 노부나가의 최후를 보지 못한 채, 텐쇼 6년(1578)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덧글

  • 함부르거 2021/07/14 14:11 # 답글

    야마가타 에치젠노카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조상일까요? 일본 위키 보니까 대충 일족인 거 같긴 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21/07/14 15:29 #

    약간의 혈연관계가 섞여 있을 수는 있어도 밀접한 혈연관계나 연관성은 없었을 겁니다. 야마가타 에치젠노카미의 직계후손은 모리 가문의 일족가로인 아가와 모리 가문의 가로 지위를 세습했는데 아무리 에도 시대 당시에 이와 같은 바이신(가신의 가신)의 대우가 낮았다지만 에치젠노카미와 밀접한 혈연이라고 생각하기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가족의 처지는 좀 심했거든요.

    아리토모는 아시가루보다 못한 츄겐(무사를 섬기는 잡역부)의 아들로 무사계급을 통틀어 최하층 신분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농민의 아들인 이토 히로부미보단 좀 나아도 그때가 난세가 아니었다면, 일평생 무사들의 가방모찌나 해야 할 운명이었을 정도인지라...
  • 함부르거 2021/07/14 15:45 #

    떨거지 방계(...)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우리 나라에서도 전주 이씨라고 다 양반 노릇했던 건 아니니 말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21/07/14 16:26 #

    네 조선으로 치자면 양반가의 떨거지 잔반 정도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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