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링크 : 아사쿠라 카게아키라(일본 위키피디아 2020년 12월 27일 버전)
아사쿠라 카게아키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걸쳐 활동한 무장武將. 아사쿠라 씨 일문朝倉氏一門으로, 훗날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일자배령을 하여 츠치바시 노부아키라土橋信鏡로 개명했다.
1. 생애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孝景의 동생인 아사쿠라 카게타카朝倉景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사촌동생뻘이 된다.(그 외에 여러 설이 있다[1])
아사쿠라 가문 내에서 오오노 군 군시大野郡司를 맡으면서 에치젠 주 오오노 군 이야마 성亥山城[2]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식전式典에서의 석차 같은 걸 보면 아사쿠라 일족들 중에서 으뜸가는 지위에 있었으리라 추정되며, 아사쿠라군의 총대장(總大將, 당주 대리 등)으로 여러 번 출진하기도 했다. 특히 에이로쿠 7년(1564)의 카가 잇코잇키 정벌전加賀一向一揆征伐이나, 겐키 원년(1570)의 카네가사키 전투金ヶ崎の戰い 당시의 오다군 추격, 오우미 주近江国ㆍ미노 주美濃国로의 출진(시가 대진志賀の陣) 등에서 카게아키라는 총대장이 되어 지휘채를 잡았다.
이후 주로 키나이畿内~오우미에 걸쳐 벌어진 오다 세력과의 사투와, 아사쿠라 가문 내에서의 권력투쟁을 거치며 카게아키라와 당주 요시카게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이 생겨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겐키 3년(1572)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우미 북부의 아자이 씨(淺井氏, 아사쿠라 씨와 동맹관계)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 코앞에 성채를 축조하자[3] 카게아키라는 2차례에 걸쳐 오다니 성에 원군으로 파견되었으나, 이 출진 중에 마에바 요시츠구(前波吉継, 훗날의 카츠라다 나가토시桂田長俊)ㆍ토다 나가시게富田長繁ㆍ케야 이노스케毛屋猪介 등이 오다군으로 배반했다.
텐쇼 원년(1573) 8월, 오다니 성을 포위한 오다군에 맞선 북 오우미 출진 때, 연속된 군사행동에 따른 피로를 호소하며 출진을 거부했다. 요시카게는 직접 아자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가 패배하고, 이는 역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越前侵攻을 초래한다.(이치죠다니 성 전투一乘谷城の戰い) 카게아키라는 요시카게에게 이치죠다니에서 철수하여 자기 영지인 오오노 군에서 재기再起를 도모하라고 진언했다. 카게아키라는 철수해 온 요시카게 일행에게 숙사宿舍를 제공한 후, 곧장 군대를 동원해 이곳을 포위, 요시카게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그 처자를 포박捕縛했다. 카게아키라는 요시카게의 수급과, 포박한 요시카게의 어머니 코토쿠인高德院ㆍ아내와 자식ㆍ측근近習들을 노부나가에게 헌상하여, 항복 승인을 받았다.
이후 입경해 본래의 영지를 보장받고, 노부나가로부터 일자배령을 해 ‘츠치바시 노부아키라’로 개명했다. 그러나 텐쇼 2년(1574)에 카츠라다 나가토시를 멸살하기 위해 토다 나가시게가 일으킨 츠치잇키가 잇코잇키로 발전하면서, 잇키군의 표적標的이 된 그는 헤이센사平泉寺에 농성했으나 전사했다. 전사할 때 그는 자군의 열세와 자신의 운명運命을 체감하고, 고작 3기만을 이끌고 적중에 돌입하여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남겨진 12세(10세?)ㆍ6세의 두 아들도 생포된 후 처형당했다.(《朝倉始末記》)
탄생 : 타이에이 5년(1525?)
사망 : 텐쇼 2년(1574) 4월 14일(서력 1574년 5월 4일)
개명 : 츠치바시 노부아키라
별명 : 마고하치로孫八郎
관위 : 시키부다유式部大輔, 에치젠 주 오노 군시
주군 : 아사쿠라 요시카게 -> 오다 노부나가
씨족 : 아사쿠라 씨
부모 : (아버지) 아사쿠라 카게타카 (어머니) 카라스마 후유미츠烏丸冬光의 딸
형제 : (동생) 카게츠구景次, 아리시게在重
자식 : 2명
2. 인물ㆍ일화
요시카게를 배신해 실질적으로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시킨 것 때문인지, 카게아키라는《朝倉始末記》등의 군담물에서 상당히 음험한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도 에이로쿠 7년(1564) 9월 카가의 진중에서 동족인 아사쿠라 카게미츠朝倉景垙와 말싸움을 벌인 끝에 말싸움에서 진 카게미츠가 자결한다든가[4], 카네가사키 전투에서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景恒의 구원군으로 출진하였음에도 후츄에 머무른 채 이 이상 진군하지 않고 일관되게 방관하였다든가[5], 요시카게의 마지막 출진 때도 ‘피로하다’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한다든가[6] 하는 음험한 일화들이 많이 남겨져 있다.
주군을 배신하는 등의 변절자로서의 모습은 “일본에 빛나는 그 이름 새삼스레 이제 오오노의 츠치바시가 되다”는 노래로 풍자되었다.
3. 각주
[1] ‘아사쿠라 요시카게#이설’ 항목을 참조하라.
[2] 별칭은 ‘츠치바시 성’. 이누야마 성戌山城이나 오오노 성大野城과는 별개의 성이다.
[3] 토라고세 산성. 수비대장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4] 스이토 마코토水藤真《아사쿠라 요시카게》p.67. 요시카와코분칸 <인물총서>, 1981년.
[5] 스이토 마코토水藤真《아사쿠라 요시카게》p.117. 요시카와코분칸 <인물총서>, 1981년.
[6] 스이토 마코토水藤真《아사쿠라 요시카게》p.88. 요시카와코분칸 <인물총서>, 1981년.
4. 참고문헌
- 스이토 마코토水藤真《아사쿠라 요시카게》요시카와코분칸 <인물총서>, 1981년.
- 역사군상편집부 편집《[전국판] 전국시대인물사전》각켄퍼블리싱, 2009년.
5. 관련작품
- 아카가미 료赤神諒《취상의 기술 아사쿠라 성쇠기酔象の流儀朝倉盛衰記》(코단샤, 2018년 12월 18일)
덧글
정신적으로 상대를 무섭게 압박하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군요. 주군도 몰아서 자결시키고. 일본인 특유의 이지메하는 재주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일본이 명목상 리더와 실세가 따로노는 경우가 많은데, 천황제부터 그렇고 사실상 씨족내 실세였던 것 같습니다.
노부나가가 아사쿠라씨와 아사이에 대해서는 아주 격한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전해지는데, 자기 사촌의 가족들을 그 원수에게 갖다바쳤으니 처형되든지 노비로 전락하든지 했겠네요.
저때 노부나가에게 바쳐진 요시카게의 어머니와 애첩, 애첩이 낳은 아들 등은 호송 중에 모두 살해당합니다. 이들의 처형을 지휘한 인물이 오다 가문 중신 중 하나인 니와 나가히데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