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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 토다 나가시게富田長繁 ┗ ウィキペディア



  중국인이 만든 삼국지 조조전 MOD <몽환과 같이> 에서 인상 깊게 나와서 기억하게 된 인물입니다. 정작 자기 나라의《노부나가의 야망》이나《태합입지전》등에선, 능력치 낮고 배신 잘 하는 써먹기 힘든 잡어무장 신세를 면치 못하며 안습한 대우를 받는 중이지만요.

  (<패왕전>에서 전투 72ㆍ지휘 69, <태합입지전 3>에서 군사력 10점 만점에 8점 받은 게 최고 리즈시절로 <람세기> <창천록>에서는 백하팔인급 무장으로 추락했으며, <천하창세> <혁신> <천도>엔 등장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


원문 링크 : 토다 나가시게(일본 위키피디아 2020년 10월 30일 버전)

  토다 나가시게 내지 톤다 나가시게는, 전국시대戦国時代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걸쳐 활동한 무장武將.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가신. 이름을 ‘나가히데長秀’라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나, 편지문서書状상으론 ‘나가시게長繁’라고만 적혀 있다.


  1. 출신

  나가시게는 본래 이즈모 주出雲国 출신으로 에치젠 주越前国로 흘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를 섬겼다고 한다.[1]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텐분 20년(1550) 당시 난죠 군南条郡에 영지를 갖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토다 요시요리富田吉順로 추측되며[2], 요시요리는 자기 할아버지가 스젠사로부터 매수한 자영용 밭名田畠을 소유하고 있었다.[3]

  그러므로 이즈모 주 출신(이즈모 겐지)이라는 기록의 진위는 불명이지만 적어도 나가시게의 대에 에치젠에 거주하게 된 건 아니며, 증조부 시대 이래 이미 에치젠에 뿌리를 내리고 영지도 갖고 있었던 일족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의 성은 ‘토다’ 내지는 ‘톤다’라 읽는다.[4]


  2. 약력

  2.1.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갈아타다

  처음에는 에치젠 주의 다이묘 아사쿠라 씨를 섬겼고, 겐키 원년(1570) 4월에 벌어진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침공에 맞서 1천 기를 이끌고 출진한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첫 등장.[5] 그러나 겐키 3년(1572) 8월, 오우미 주 오다니 성近江国小谷城에서 오다군과 아사쿠라군이 한창 대치하고 있을 때, 마에바 요시츠구前波吉繼에 뒤이어 케야 이노스케毛屋猪介ㆍ토다 요지로戶田與次郞와 같이 오다군의 진영으로 뛰쳐들어가 배반했다.[6] 같은 해 11월 3일 아자이 씨의 가신 아자이 이노리淺井井規가 토라고세 산虎御前山에서 미야베宮部로 이어지는 도로에 만들어진 축조지築地를 파괴하려 공격을 가했을 때, 수비대장守將인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의 응원군으로 출격해 케야 이노스케 등과 함께 공명을 세웠다.[6]

  텐쇼 원년(1573) 8월 아사쿠라 씨가 멸망하자, 카츠라다 나가토시(桂田長俊, 마에바 요시츠구에서 개명)가 에치젠 슈고 대리越前守護代로, 나가시게는 에치젠 후츄越前府中의 영주[7]로 각각 임명되어, 이후 현지에서 거주했다.[5] 같은 해 9월~10월에 걸친 제 2차 나가시마 공격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5] 그러나 오다 가문 내에서 받는 카츠라다와의 대우차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한편 카츠라다 쪽도 “토다와 그 요리키인 케야ㆍ마스이가 받는 영지가 과분過分합니다.”, “토다를 후츄에 거주시키는 건 무익無益합니다.”라고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였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이윽고 나가시게는 카츠라다 살해를 도모하게 된다.[8]

  2.2. 에치젠의 지배자가 되다

  같은 해 12월 14일. 나가시게는 호엔사宝円寺에 병사들의 포진을 금지시키라고 명하는[9] 등 군사행동을 일으킬 조짐을 드러내며, 에치젠 주 내부에서 잇키一揆를 선동煽動하기 위한 책략을 짜고, 카츠라다의 악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들과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8]

  텐쇼 2년(1574) 1월 18일, 나가시게는 카츠라다의 가혹한 압정에 신음하고 있던 민중을 선동하여 대규모 츠치잇키土一揆를 일으켰다. 19일 3만 3천여 명으로 불어난 잇키 세력을 직접적인 대장으로서 인솔, 남쪽과 북쪽에서 이치죠다니一乗谷로 침공해 나가토시를 죽이고, 다음 날인 20일에는 산만다니三万谷를 향해 도망치던 나가토시의 가족들도 포박捕縛하여 남김없이 살해하였다.[8]

  기세를 타고 키타노쇼北ノ庄에서 대관代官을 맡고 있던 키노시타 스케히사木下祐久ㆍ츠다 모토요시津田元嘉ㆍ미사와 히데츠구三沢秀次 등이 몰려있던 아사쿠라 토사노카미의 옛 저택舊朝倉土佐守館을 습격했으나, 안고 카게타케安居景健ㆍ아사쿠라 카게타네朝倉景胤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공격을 중단하고 세 사람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 대신 추방처분을 내린 후, 케야 이노스케에게 이 저택의 수비守備를 맡겼다.[8]

  그리고 같은 前 아사쿠라 가신인 우오즈키 카게카타魚住景固를 경계하여 1월 24일, 카게카타와 그 차남인 히코시로를 아침식사에 초대해 현장에서 두 사람을 베어 죽였고, 다음날인 25일에는 우오즈미 씨의 거성인 토바노 성鳥羽野城에 쳐들어가 우오즈미 일족을 멸족시켰다. 그러나 적대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원한을 가진 것도 아닌, ‘어진 사람仁者’이라 불리며 영지 민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우오즈미 카게카타를 억지로 죽여버린 건은 민중의 반발을 샀고, 다른 구 아사쿠라 가신 출신 무장들 역시 이를 경계하여 면회하러 찾아오지도 않게 되면서, 고립이 시작되었다.[8]

  2.3. 잇키 세력과의 항쟁

  오다 가문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게 된 에치젠 주를 일시적으로 지배하에 둔 나가시게는 1월 29일, 영내에 3개 조목의 금제를 내걸어 지배권 확립을 시도. 에치젠 내의 군자금 부과를 금지시키고 토민의 직소를 허용하는 등 포용정책을 펼쳐 민중의 지지를 얻어보려 했으나[10], "나가시게가 오다 노부나가 앞에서 사죄하고 에치젠 슈고 지위를 인정받는 공문서를 발급받는 대신, 자기 동생을 기후에 인질로 보내려 하고 있다." 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건을 들어 잇키 세력은 나가시게와의 관계단절을 선언하고, 카가 주加賀国로부터 잇코종一向宗의 (간부인) 시치리 요리치카七里頼周를 불러들여 자기들의 대장으로 봉대했다. 이렇게 하여 토다 나가시게가 인솔하던 츠치잇키는 시치리 요리치카가 인솔하는 잇코잇키一向一揆로 발전하였다.[8]

  잇키 세력 약 14만 명은 나가시게를 죽이기 위해 에치젠 도처에서 봉기. 2월 13일에는 아사쿠라 토사노카미의 옛 저택을 지키던 케야 이노스케, 카타야마 저택을 지키던 마스이 진나이노스케増井甚内助 등이 살해당했고, 다음 날인 2월 14일에는 후츄에 있던 나가시게도 잇키 세력에 포위되기 시작했다. 그 내역은 후츄 남쪽의 이마죠 유노오 고개今庄湯尾峠에 잇키 세력 2만 명이 포진했고, 서쪽에서 몰려온 잇키 세력 3만 5천 명이 사바에鯖江에 포진했으며, 북쪽에서는 잇키 세력 5만 명이 아사미즈浅水~키타노쇼에 걸쳐 모여들었고, 동쪽에서 모여든 잇키 세력 3만 3천 명은 이미 그 선봉부대가 히노 강日野川을 사이로 후츄 정동쪽에 위치한 호야마 강변帆山河原까지 진출해 있었다.[8]

  궁지에 몰린 나가시게는 “이대로 잇키를 설치도록 놔두는 건 너무 분하다”며, 호령하여 돌격명령을 내렸다. 2월 16일 이른 아침 가장 후츄와 가까운 곳에 포진하고 있던 호야마 강변의 잇키 세력 2만 명을 상대로, 히노 강을 도하하여 강습을 시도했다. 나가시게의 병력은 7백 명 정도였으나 모두가 죽을 각오를 했기에 사기가 드높아서, 호야마 강변의 잇키 세력을 격파했다. 이후 궤주하는 적을 상대로 2~3리(약 8km~12km)에 걸친 집요한 추격전을 벌여 2~3천여 명의 목을 벤 후, 후츄로 귀환했다.[8]

  이 전승을 계기로 크게 기세를 회복한 나가시게는, 그날 중으로 “영구히 3천 석을 세습토록 해주겠다.”는 은상을 약속하며 후츄의 시민들ㆍ혼간사와 대립하고 있던 진종 3문도파真宗三門徒派 도합 6천 5백 명을 회유해 아군으로 가담시켜, 동원병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2월 17일, 나가시게는 키타노쇼 성을 탈취하기 위해 후츄를 출진, 북상하여 사바에를 우려빼고 일거에 아사미즈까지 진출했다. 이에 맞서 시치리 요리치카는 신도들을 남하시켜, 양군은 아사미즈 부근에서 격돌하였다. 증원増員이 성사되었음에도 토다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태였으나, 경험經驗에서 앞서는 토다군이 공격에 나서 잇키 측의 선봉을 무너뜨리자 결국은 오합지졸인 잇키 세력은 도주하기 시작했고, 잇키들은 혼란에 빠져 사방으로 달아나 토다군은 승리를 거두었다.[8]

  2.4. 최후

  나가시게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쉴 틈도 주지 않고 일단 남쪽으로 회군하여, 17일 저녁에는 지금까지 전투를 방관傍觀하면서 병력을 진군시키지 않았던 안고 카게타케ㆍ아사쿠라 카게타네가 주둔한 쵸센지 산長泉寺山의 영채를 기세를 몰아 습격했다. 이때 나가시게의 모습은 “잔챙이 무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카게타케의 본진만을 노려 돌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다군의 피로疲勞는 너무 심했고, 성채의 수비대장인 아라키 형제荒木兄弟의 목을 베는 등 일정한 전과戰果를 거두었음에도, 함락시키지는 못한 채 밤이 되어 일단 병력을 물렸다.

  다음 날인 2월 18일 이른 아침에 다시 돌격명령이 떨어졌으나, 무리한 전투를 강행하는 나가시게에게 불만不滿을 품은 자가 나오기 시작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도중, 아군인 코바야시 요시타카小林吉隆가 배반하여 등 뒤에서 나가시게를 화승총鐵砲으로 사살射殺한 후 그 목을 잘랐다. 향년 24세. 그 수급은 2월 19일 잇키 세력의 사령관 중 하나인 스기우라 겐닌杉浦玄任의 진채에 도달했고, 류타쿠사竜沢寺에서 수급 검사가 행해졌다.[8]

  젊은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국무장으로서도 치세자로서도 대단히 공격적攻擊的이어서, “에치젠의 미친개越前の狂犬” 같은 야유를 받기도 한다.[12]

  후쿠이 현 사바에 시의 하즈카다이곤겐歯塚大権現에 나가시게의 자손이 건립한 공양탑이 잔존해 있다.

  탄생 : 텐분 21년(1551)
  사망 : 텐쇼 2년(1574) 2월 18일(서력 1574년 3월 11일)
  별명 : 나가히데, (통칭) 야로쿠로弥六郎
  계명 : 츄도인겐쥬슈운호인中道院現住秀運法院
  묘소 : 후쿠이 현 사바에 시 쵸센지 쵸
  주군 : 아사쿠라 요시카게 -> 오다 노부나가
  씨족 : 이즈모 겐지出雲源氏의 지파인 토다 씨?
  부모 : (아버지) 토다 요시요리
  자식 : (아들) 쇼자에몬庄左衛門


  3. 인물과 일화

  나가시게는 무예와 용기가 탁월해, “번쾌樊噲의 용맹도 능가할 거다.”라며 전한시대前漢時代의 맹장에 비견되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한편으로 “무武를 감추고 인심을 얻어야 합니다.”라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영내통치의 졸렬함 역시도 언급되고 있다.

  에치젠에서 반란叛亂을 일으켜도 노부나가가 대응하지 못할 거라는 걸 내다보고 카츠라다와 우오즈미를 살해했으나, 이후 '동생을 노부나가에게 바치고 에치젠 슈고가 되어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한다,' 는 소문이 퍼지는 등의 사유로 잇키 세력의 뜻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갔고, 이것이 대립에 이르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4. 각주
  [1]《석일북화록昔日北華録》
  [2] 코이즈미 요시히로《토다 나가시게》
  [3] 마츠우라 요시노리《센고쿠다이묘 아사쿠라 씨의 영지제도 전개》
  [4] 타니구치 카츠히로《오다 노부나가 가신인명사전 제 2판》
  [5]《아사쿠라키》
  [6]《신쵸코우키》
  [7] 그 거성居城은 후츄 류몬지 성府中龍門寺城.
  [8]《엣슈군키》
  [9]《호엔사 문서》
  [10]《지간사 문서》
  [11] 지금의 후쿠이 현 후쿠이 시 아사미즈 쵸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21/05/24 17:53 # 답글

    짧은 인생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군요. 잇키를 이용해 적을 치고 그 잇키에 자신도 당하고

    용맹은 하지만 앞뒤 안가리고 성격만 격하여 민중의 지지가 있던 영주를 죽이고 전장에서 아군에게 당한거 보면 큰 인물의 그릇은 아니군요. 번쾌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부하 마구 부려먹는 그런 종류의 상관을 군대에서 겪어봐서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 사람 지금 결국 별을 몇개 달긴 했는데, 그 성과를 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간부와 병사들을 쥐어짜 고통 주었을까 겨우 반년정도 겪어본 저도 상상이 안 갈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아사쿠라씨와의 싸움에서 오다군으로 누가 투항했다는 사실은 이 글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내통을 받아놓고도 처참하게 깨져 노부나가마저 위태롭던 오다군은 얼마나 약했던 건지 모르겠군요.
  • 3인칭관찰자 2021/05/24 22:56 #

    네 잇키를 끌어들여 에치젠을 지배했는데 그들과 틀어져 다른 대빵을 구해온 잇키들과 싸우다 죽은.... 700명~6천 명으로 14만 명한테 포위된 상황에서 여러 번 이기긴 했어도 정치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전형적인 맹장 타입같습니다.

    자기 영달을 위해 아랫사람 함부로 굴려대는 상사들이 많지요. 군대에서도 진급 욕심 강한 지휘관은 유독 부하들에게 무리하게 많은 걸 요구했던 기억이... 뭐 저는 진급 떨어지고 말년 마인드로 부대 이끌던 지휘관 밑에 가장 오래 있었긴 합니다만.

    아사쿠라같은 경우 처음 싸움을 시작해서 노부나가를 한창 괴롭히던 1570년 기준에는 배반자나 투항자가 없었습니다. 전황이 기울어지면서 점차 배반자가 나왔고 1573년에 아사쿠라가 망할 땐 일족의 장로가 앞장서서 당주 요시카게를 살해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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