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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조정귀족ㆍ승려들이 본 노부나가 (下)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激震 織田信長》P.102 ~ 105에 수록된, 역사학자 故 타치바나 쿄코立花京子 님께서 집필하신, <조정귀족ㆍ승려들이 본 노부나가 – 노부나가 타도계획에 가담한 면종복배의 속내>를 번역한 글입니다.


  요시미츠 시대를 능가하는 조정귀족 지배

  새로운 패권자가 된 노부나가를 상대로 일체감一体感을 느끼던 건 토키츠구뿐만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텐노지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승전했다는 소식에,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사주社主 요시다 카네미吉田兼見는 [공사의 크나큰 경사에 안도했다.]고 일기인《카네미쿄키兼見卿記》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쁨도 카네미가 노부나가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던 사람이기에 벅차올랐던 것이리라.

  카네미는 겐키 원년(1570) 무렵부터 노부나가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다. 무라이 사다카츠가 교토 행정관을 단독으로 맡게 된 텐쇼 3년(1575) 이후부터는 사다카츠의 거처에 실로 뻔질나게 출입했다. 술을 못 했다고 전해지는 사다카츠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는지, 선물로 자주 애용되었던 물건이 ‘만쥬饅頭’였다.

  카네미는 조정과 노부나가 사이의 교섭업무에서, 언제나 노부나가의 편에 서서 노부나가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러한 활동이 주효했는지 텐쇼 7년(1579) 11월 21일 그는 노부나가의 상주에 의해 당상관殿上人이 되었고, 텐쇼 9년(1581) 4월 1일에는 노부나가의 측근 타케이 세키안武井夕庵에게, 요시다 신사 수리를 할 수 있도록 노부나가를 상대로 주선을 놔 달라고 의뢰했다. 토키츠구와 마찬가지로 카네미에게도 노부나가는 구세주 그 자체였다.

현존해 있는 요시다 신사의 경내(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吉田神社' 항목)

  그 외 노부나가에게 봉사한 조정귀족으로 카라스마 미츠노부烏丸光宣ㆍ히노 테루스케日野輝資ㆍ아스카이 마사노리飛鳥井雅教ㆍ아스카이 마사아츠飛鳥井雅敦ㆍ타카쿠라 나가스케高倉永相, 그리고 오오기마치 스에히데正親町季秀를 들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의 최성기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ㆍ요시노리義教 대에, 조정의 귀족들 중에서 히노日野ㆍ카라스마烏丸ㆍ아스카이 가문飛鳥井家 등이 짓킨슈昵懇衆라 불리며 무로마치 쇼군과 주종관계를 형성해 그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ㆍ요시즈미義澄 때에도 “무로마치도노의 유사시”엔 몇 명의 짓킨슈 조정귀족들이 무로마치도노 저택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요시아키가 친형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살해당한지 3년 후에 입경하자, 카라스마 미츠노부 등은 단박에 요시아키 밑으로 모여들어 짓킨슈가 재생되었다. 요시히데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던 타카쿠라 나가스케는 반대로 이 때 교토에서 도망쳤지만, 이후 이들이 노부나가의 짓킨슈로 갈아타 재편이 되었을 땐 나가스케도 그 일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노부나가는 주인主人이나 다름없었다 하겠다.

  미츠노부 등은 對 아사쿠라전朝倉戰, 對 혼간사전本願寺戰을 비롯한 노부나가의 출진出陣을 수행해 함께 종군했으며, 노부나가 군단의 퍼레이드였던 텐쇼 9년(1581)의 교토 열병식에서는 노부나가로부터 ‘진산슈陣参衆’로 참가할 것을 명 받아 승마한 채로 열병식에 참가했다. 오오기마치 스에히데의 경우, 텐쇼 10년(1582) 6월 2일 혼노사의 변이 일어나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가 농성한 사네히토 신노의 니죠고쇼二条御所에서 아케치군 병사와 싸우다 부상까지 당했다. 오오기마치 스에히데가 혼노사의 변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야말로 ‘노부나가 유사시’에 달려온 ‘노부나가의 짓킨슈’로서 면목을 약여한 것이라 하겠다. 아마 당초에는 혼노사로 달려갔다가, 때가 늦은 걸 알고 니죠고쇼로 뛰쳐들어간 것이리라.

  짓킨슈를 제외하고 노부나가에게 신종한 조정귀족이라면 조정과 노부나가 권력 사이의 연락역인 무가전주로서 활약한 4명의 조정귀족을 꼽을 수 있으리라. 즉 나캬아마 치카츠나(中山親綱, 초기에는 그의 아버지 나카야마 타카치카中山孝親)ㆍ니와타 시게야스庭田重保ㆍ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経元ㆍ카쥬지 하레토요(勧修寺晴豊, 초기엔 그의 아버지 카쥬지 하레스케勧修寺晴右)란 면면들이다. 그들은 실로 충실히 노부나가의 의뢰 내지는 명령을 따라 행동하였다.

  무가전주武家伝奏란 카마쿠라 막부 초기, 조정이 칸토에 보내는 연락책으로 규정한 ‘칸토 모우시츠기関東申次’를 그 연원으로 삼고 있지만, 무로마치도노 아시카가 요시미츠 대에 와서 무가전주는 조정귀족의 신분이면서도 요시미츠의 가신家司이라는 위치였고, 요시미츠는 무가전주들을 통해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카야마 등의 움직임을 볼 때 노부나가의 시대도 정말로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 중 제일 가는 전제군주였던 아시카가 요시미츠(1358~1408)의 초상화.
 은근 텐노天皇 지위를 노렸다 설이 있는 유이(요시미츠, 노부나가)한 무사 정권의 수장이다.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足利義満' 항목)


  노부나가는 전주들을 임명하기도 하고 처벌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전략에 따라 그들에게 교토에서 내려오라고 요청하며, 사실상 그들을 턱으로 부리다시피 했다.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 조정귀족 지배의 강도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그것을 능가하는 데가 있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무리하는 거다

  무가전주 공경들이 노부나가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카쥬지 하레토요의 일기인《하레토요키晴豊記》《니치니치키日々記》에도 단편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그들이 노부나가에게 봉사한 상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을지언정 사적인 감정을 드러낸 경우는 전무하다. 그런 하레토요가 유일하게 한 번 노부나가를 향해 비판적인 사견을 기록한 사례가 혼노사의 변 전날인 6월 1일자 일기다.

  노부나가는 혼노사에 집결한 조정귀족들 앞에서, 대승을 거두고 막 개선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토멸전 이야기를 늘어놓은 후, 뒤이어 6월 4일 출진이 예정되어 있던 시코쿠 공격四国攻め 역시 “별 것 아니다.”고 호언했다. 이 말을 들은 하레토요는 [자신만만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말의 의미에는 ‘내일 아케치 미츠히데가 기습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기세등등해 있구나,’라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 자리에서 노부나가는 역법暦法 문제를 꺼냈다. 노부나가는 12월에 윤달을 두자는 역법논의를 같은 해 정월부터 조정에 제기하였고, 6월 1일에도 이 건을 다시 꺼냈다. 하레토요는 이 건에 대해 [이것은 노부나가가 무리하는 거다.]라는 문장을 일기에다 남기고 있다. 1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노부나가로부터 그 어떠한 무리난제無理難題를 제시받아도 투덜거리는 소리 하나 일기장에 남기지 않았던 하레토요가, 이때만큼은 분명히 [무리無理]라고 적었다.

  이는 혼노사의 변 전날이 되자 하레토요가 내일 결행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궐기 성사를 믿고 비로소 본심을 적은 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레토요가 면종복배面從腹背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정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외에, 노부나가로부터 급여받고 있던 새 영지가 다른 조정귀족들에 비해 많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일 수 있다.

  혼노사의 변 전말에 관해서라면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는 더욱더 복잡한 감개를 품고 있었을 것이나, 그의 본심이 어떠했는지는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키히사는 [혼노사의 변 직후 노부나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삭발ㆍ출가하였다.](《후소슈요슈扶桑拾葉集》)고 훗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겉치레였을 것이다. 혼노사의 변 전후사정을 취합해 볼 때, 사키히사는 미츠히데를 실행자로 삼은 노부나가 타도계획의 중심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

  노부나가의 對 타케다전武田戰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해 카이 주甲斐国까지 종군하였던 사키히사는 현장에서 “코노에. 자네는 키소지를 거쳐 돌아가게.”(《코요군칸甲陽軍鑑》)라는 폭언까지 들으며, 노부나가의 귀로에 동행하는 걸 거부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혼노사의 변 1개월 전의 노부나가 3직추임三職推任 건은 사키히사의 타죠다이진太政大臣 사퇴를 전제에 깔고 있는 것으로, 사변 직전의 시점에서 사키히사가 노부나가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으리란 건 확실해 보인다.

  토키츠구ㆍ하레토요ㆍ카네미 같은 중류귀족中流貴族들 중엔 노부나가로부터 은혜를 입으며 그에게 협력한 자들이 많았다. 사키히사도 노부나가의 은혜를 많이 입은 부류에 속하나, 다른 고셋케급五摂家級 조정귀족들이 입은 피해는 심대했다. 노부나가가 텐쇼 3년(1575) 이후 “계속 승진” 노선을 밟아나간 결과로 생긴 돌발적인 인사이동에, 이치죠 우치모토一条内基와 쿠죠 카네타카九条兼孝가 농락당했다.

  후시미노미야 가문 출신인 산젠인 사이인 홋신노三千院最胤法親王와 쇼렌인 인존 홋신노青蓮院尊朝法親王는 노부나가의 타케다 공격 때 “동이 정벌東夷征伐”의 노고를 치하하며 편지ㆍ선물을 증정하였다. 이는 노부나가와의 일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되나 자세한 진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부나가를 향한 증오심을 숨기지 않았던 정삼위 타케노우치 스에하루竹内季治는 처형処刑당했고, 노부나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카이센 화상快川和尚은 불에 타 죽었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던 자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오오기마치 텐노의 동생으로 천태종天台宗의 좌주座主였던 만쥬인 카쿠뇨 홋신노가 히에이 산 방화ㆍ토벌로부터 6일 후 좌주직에서 사퇴한 건, 노부나가의 폭거에 따른 결과로 봐도 그릇됨은 없을 것이다.

35세의 나이에 요절해버렸던 사네히토 신노(1552~1586)의 초상화.
 그의 아들인 카즈히토和仁가 고요우제이 텐노後陽成天皇로 즉위했다.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誠仁親王' 항목)


  사네히토 신노는 노부나가로부터 니죠고쇼를 진상받았으나 이것이 순수한 근황정신勤皇精神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라는 건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새로운 틈입자가 지향하는 체제가 종래의 패권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왜곡되기는 했을지언정 숨을 이어나가고 있던 구질서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할 것임은 명백해보였다. 사다카츠로부터 3직 중 하나의 관직에 추임해 줄 것을 요구받은 신노가 (3직 중) 어느 쪽도 좋으니 자세한 건 입경한 후에 논의하자.”고 답변하였을 때 신노는 이미 노부나가 타도계획에 참가하기로 결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21/05/06 23:01 # 답글

    요절한 텐노의 초상화의 모자가 제대로 씌어진 상태로 그린 것이 저런걸까요?

    포토샵으로 모자를 반쯤 옮긴것도 아니고 저런식으로 쓰는 모자가 있었나 보군요.

    조정흑막설을 진실이라 가정한다면 미츠히데는 왜 쓰고 버렸나 의문입니다. 거사후의 미츠히데가 조정의 인정이라도 받으려고 재물을 마구 뿌려대는데도 별다른 힘을 안 실어줬는데 말이죠._ 실어줄 힘이나 있었나도 의문입니다.

    진실을 알 수 없는 과거사를 상대로 어떻게든 실적을 내고 자기 이름을 알려야 하는 입장에서 여성특유의 자극적인 막장드라마 선호경향에 의해 음모론 뇌피셜 시나리오를 장하게 쓴 듯 합니다.

    제육천마왕이라 불리며 대적자들을 싸그리 멸하던 노부나가에게 감히 잃을 것이 '많은' 지체높은 그들이 여럿이서 음모를 꾸밀 담량이 있었나

    아니면 일본인 종특대로 강자에게는 납작엎드려서 그저 보신하고 있었느냐. 가능성이 높은 쪽을 생각해봐야죠.
  • 3인칭관찰자 2021/05/07 09:35 #

    저런 식으로 모자를 쓸 수 있는가 싶어 신기하긴 하더군요.

    조정흑막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말씀하신 그거지요. 아시카가 요시아키 흑막설도 그렇지만, 높으신 분이 한편이라면 대의명분을 잡기 위해서라도 노부나가를 죽인 후에 그 사람들이 자기 편이란 걸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홍보해야 했을텐데 그런 흔적이 아예 없다는 게...

    조정흑막설의 경우 '현직 텐노의 양위'라든가 더 나아가 '노부나가의 천황가 장악' 내지 '노부나가의 천황제 타도' 같이 노부나가의 장래구상을 좀 과격하게 잡고 조정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심정으로 아케치 미츠히데를 포섭했다는 이야기가 거의 공통되어 있는데 요즘엔 노부나가와 조정간의 관계란 게 그런 가정을 할 정도로 위태롭지가 않았다는 주장이 우세한 것 같더군요.
  • 함부르거 2021/05/11 14:38 # 답글

    조정 귀족들이 노부나가 덕에 먹고 살았는데 자기들 밥줄 끊을 짓을 했을까 싶습니다. 미츠히데가 조정과 아무리 친했다 한들 노부나가만큼 확실하게 뒷배를 봐줄 역량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말이죠.

    히데요시가 조정의 권위를 필요로 했어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권좌를 잡았으면 더 어려워졌을텐데 그걸 예상 못했을까도 싶습니다. 당장 에도 막부 시절에 조정이 받던 취급을 보면 더욱 그렇구요.
  • 3인칭관찰자 2021/05/11 17:26 #

    전국시대가 본격화된 이래론 노부나가(+히데요시)만큼 조정에게 후했던 무가 실권자는 거의 없지요. 조정과 귀족의 스폰서 역할(특히 물질적인 후원)을 충실하게 잘해줬기에.. 적어도 조정은 노부나가(+히데요시)의 비호를 받던 시기엔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실권을 잡아서 조정에 대한 대접이 나아졌을 확률은 희박했으리라 저도 생각합니다. 당장 이에야스만 봐도...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정부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에 비해 대중적 이미지가 나빴던 노부나가를 근황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고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띄워준 걸 봐도 조정은 노부나가에겐 그리 나쁜 기억을 가지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미츠히데에 대한 근래의 이미지도 '자기 사람은 잘 챙겨도 근본적으론 노부나가와 죽이 잘 맞는, 전국시대 위인다운 효웅'으로 바뀌어가는 추세로, 조정흑막설에서 전제로 삼는 '교양있고 고지식한 보수적 지식인'의 이미지가 많이 옅어져가고 있어서,,,
  • 도연초 2021/05/26 13:20 # 답글

    사실 오다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만 해도 조정에 헌금(대표적으로 이세신궁 건축비, 정확히는 식년천궁 의식에 쓸 경비로 황금 200매의 큰 돈을 조정에 바쳤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을 여러 차례 해 왔으니 노부나가와 조정의 커넥션은 생각보다 오래 된 것으로 보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21/05/26 16:49 #

    문화인이기도 했던 노부히데가 이미 상류층 문화(렌가, 케마리 등)를 매개로 삼아 (위 글에서 언급된) 야마시나 토키츠구 같은 유력 쿠게들과 친밀한 교류를 가진 적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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