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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조정귀족ㆍ승려들이 본 노부나가 (上)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激震 織田信長》P.102 ~ 105에 수록된, 역사학자 故 타치바나 쿄코立花京子 님께서 집필하신, <조정귀족ㆍ승려들이 본 노부나가 – 노부나가 타도계획에 가담한 면종복배의 속내>를 번역한 글입니다.

  故 타치바나 여사는 90년대 말~0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혼노사의 변 흑막설黑幕說’의 주요 논자 중 한 분으로 그전까지 일본 역사학자들이 ‘소설가의 썰’이라 애써 무시하고 있던 흑막설을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학계 무대로 끌고 와, 흑막논쟁에 불을 붙이신 분입니다. 그 본인은 처음엔 ‘조정 흑막설’의 지지자여서, 이 글 역시 그 당시의 타치바나 여사 주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흑막설'을 제기한 타치바나 여사의 저서《노부나가와 십자가》(슈에이신서)

  그러나 2004년부터 타치바나 여사는 기존의 주장을 수정, “예수회イエズス会가 혼노사의 변의 배후에서 암약했다”는 내용을 덧붙인 ‘혼노사의 변 예수회 흑막설’로 주된 학설을 바꾸셨고, 2011년 별세하셨습니다. 요즘의 일본에선 흑막설 자체가 비주류인데다, 특히 이 글 내용의 상당 부분은 당사자조차 긍정하지 않은 허공에 뜬 주장이 되어버렸기에,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결론과 일부 해석을 뺀 빌드업 과정에서 보이는 세부적 내용들은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구세주로 비쳤던 노부나가의 허상

  에이로쿠 11년(1568)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봉대奉戴하여 기후岐阜를 떠나 상경하던 때, 롯카쿠 씨 가신들인 고토後藤ㆍ나가타永田ㆍ신도進藤ㆍ나가하라永原ㆍ이케다池田ㆍ히라이平井ㆍ큐리九里들이 노부나가와 내통內通하여 9월 13일, 칸논지 성観音時城의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때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는 그의 일기인《토키츠구쿄키言継卿記》[7명이 적에게 호응했다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당초 노부나가는 토키츠구의 적敵이었다. 왜냐하면 토키츠구는 그 직전까지 요시아키의 대항마인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와 그를 봉대하던 미요시 3인중三好三人衆과 친밀한 관계로, 뻔질나게 사자를 보내어 가문 영지 회복운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난 시 민속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시카가 요시히데(1538~1568)의 좌상.
재임기간도 짧고, 병약하여 요절해버렸기에 이렇다 할 임팩트를 남기지 못함.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足利義栄' 항목)


  이 시기 대다수의 조정귀족公家들은 제각기 그들 집안의 생활비용을 확보하는 데 급급한 상태로, 그 중에서 토키츠구는 당시 조정 정치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집안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상경上京을 “적의 도래”로 간주하고 있던 토키츠구도 전황이 요시아키와 노부나가군에게 유리하게 기우는 걸 보고, 10월 4일 잽싸게 노부나가의 비서祐筆 묘인 료세이明院良政에게 자신의 집사와 대면해줄 것을 의뢰했다.

  요시아키ㆍ노부나가에 대한 기술도 10월 6일자 일기에선 [무가武家 / 오다 탄죠노츄織田彈正忠]란 경칭을 담은 정식 호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 그는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들의 정치활동을 이모저모 힘써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실력実力을 상실했다고는 하나 명목적名目的으론 일본의 지배계급이었던 조정귀족ㆍ사원寺院ㆍ신사神社 권문세력이 보기엔, 그들의 지배권을 빼앗아 교토京都가 자기 것인양 활보하는 새로운 하나의 틈입자闖入者였다. 카마쿠라 막부 성립 이래 무사계급인 카마쿠라도노鎌倉殿와 무로마치도노室町殿가 사다이진左大臣 / 우다이진右大臣, 사다이쇼左大将 / 우다이쇼右大将 등의 관직에 보임補任되고, 관위를 받아 ‘무가武家’라 불리고 조정귀족과 같은 반열에 오르면서, 조정귀족은 무사들 없이는 생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배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특히 오닌의 난応仁の乱 이후 무로마치 막부 자체가 쇠퇴하고, 호소카와細川ㆍ하타케야마畠山ㆍ미요시三好ㆍ마츠나가松永 같은 무사들이 차례차례로 괴뢰 쇼군傀儡将軍을 앞세워 교토 근변을 제압하고 권력투쟁을 뻔질나게 벌인 결과, 새로운 틈입자가 입경하여 지배권을 휘두르는 광경에 조정귀족들은 심히 익숙해져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패권자에 영합해 온 조정귀족들이 패권자가 교체되고 그 입장이 역전됨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현상 정도였달까.

  요시아키는 10월 18일 쇼군 선하將軍宣下를 받고 막부 지배를 시작했으나, 토키츠구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노부나가라는 걸 간파했는지 곧장 노부나가를 상대로 집안 영지 회복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 에이로쿠 12년(1569) 2월 이후 노부나가와 그 밑의 축조행정관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를 상대로 선물을 챙겨 빈번한 방문공세를 벌인 결과, 봉사의 효험이 있었는지 노부나가가 ‘관문 철폐関所撤廃’라는 새로운 정책을 벌였을 때도 야마시나 가문山科家의 솔분관은 예외적으로 존속이 허가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정권 당시 교토 지배ㆍ관리의 핵심인물이던 무라이 사다카츠
일본 역사 최초의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교토 정무대리자)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村井貞勝' 항목)


  그리고 노부나가는 황실의 영지御料所를 회복시켜 주었고, 황태자 사네히토 신노誠仁親王의 성인식 비용을 조달해주었으며, 궁궐禁裏을 수리修理해주는 데서 시작해, 일상생활을 보장해줄 목적으로 헌상품을 바치고, 조정귀족들과 몬제키(門跡, 역주 : 텐노의 자제를 위시한 귀인이 출가하여 주지가 되어있는 절)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영지를 급여하고 채무債務를 탕감해주는 등, 황실과 조정귀족ㆍ사원ㆍ사찰의 권문들을 대상으로 한 보호정책을 실시했다. 이 점에서 노부나가는 종래의 패권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노부나가의 정책은, 실질적으로 그들의 생활근간을 이루던 장원제莊園制에 숨통을 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당장의 경제적 곤궁을 모면한 조정귀족들은 그를 마른하늘에 내린 단비처럼 여겼을 것이다.

  텐쇼 4년(1576) 5월 텐노지天王寺에서 벌어진 혼간사本願寺와의 싸움에서 노부나가군의 전황이 유리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토키츠구는 곧장 일기에다 [경사로다. 경사로다.]라는 기쁨의 구절을 적고 있다. 토키츠구의 의식은 비호자인 노부나가의 그것과 완전히 일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에치젠 주越前国로 시집간 토키츠구의 딸 아챠도, “조정귀족들이 노부나가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을까요?”라고 기대하는 편지를 아버지 토키츠구에게 보내고 있다.

이 시기의 텐노였던 오오기마치 텐노(正親町天皇, 미치히토方仁. 1517~1593)
조정 흑막설이 한창 유행할 떈 이 사람을 주모자로 간주한 학설까지 나왔었다.
(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正親町天皇' 항목)


  애초에 노부나가는 자신의 전국 제패전에 ‘역적 토벌전’이란 정당성正当性을 오오기마치 텐노의 공인하에 끌어와 그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 대가로 황실ㆍ조정귀족ㆍ신사ㆍ사찰의 권문을 대상으로 한 최저한도의 보호책을 마련해주었던 것으로, 노부나가의 근황정책勤皇政策은 공리적公利的이고 의태적擬態的이었다. 그렇지만 곤궁困窮이 극한極에 다다라 있던 조정귀족들에게, 노부나가는 구세주救世主 그 자체였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 명절節日과 매달 초하루朔日마다 무로마치도노 저택을 찾아와 참례하는 조정귀족들을 세츠사쿠슈節朔衆라 불렀는데 텐쇼 4년(1576)의 일기에 따르면, 토키츠구는 노부나가 밑의 교토 행정관에 불과한 무라이 사다카츠의 저택을 명절과 초하루마다 참례한 바 있다. 그토록 조정 내부 실력자였던 토키츠구도, 만년晩年에 들어 노부나가와의 사이에서 맺은 의례적 거리는 무로마치 막부기의 세츠사쿠슈-무로마치도노의 그것보다도 유리되어 있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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