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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후유]《고 류큐古琉球》저자 서문 아오조라문고



  오키나와(류큐) 문화를 근대적인 학문으로 체계화시킨 선구자로 "오키나와학의 아버지沖縄学の父"라 불리는 이하 후유(伊波普猷, 1876~1947)가 쓴 첫 번째 저서의 저자 서문입니다. 이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 평생 노력한 인물로 근대 초기의 오키나와 관련 학문연구를 그야말로 하드캐리하다시피 하고 많은 오키나와 지식인들을 키워낸 사람입니다.

  단지 그는 차별받는 오키나와인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오키나와인들이 일본이란 틀 안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을 주된 지향점으로 삼고 있었기에 현대의 오키나와 독립주의자 같은 급진파들, 뭐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오키나와가 일본 내에서 받고 있는 처우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애증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아래의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단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정확히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고 류큐》를 공개하기에 앞서 먼저 언급해야 하는 분이 내 은사이신 타지마 리사부로 선생님田島利三郎氏이다. 타지마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국어교사였던 분으로, 류큐어에 정통하였으며 류큐인을 크게 동정하던 분이셨다. 선생님은 언어학자 '체임벌린 씨チェムバレン氏'"일종의 해석 불가능한 음운"이라며 손을 든《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연구에 발을 깊이 들이시며 체임벌린의 성과를 단서로 고 류큐를 연구하고자 하셨다. 선생님이 오모로 연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선생님을 "일종의 기인奇人"으로 취급했을 정도였다. 내가 중학교 5학년 때, 타지마 선생님은 교장에게 밉보여 유시면직諭示免職을 당하신 후 '류큐신보사琉球申報社'에 입사하셨다.

  - 이 때의 교장은 일종의 '애국자愛國者'로, "류큐인에게 고등교육高等教育을 받도록 하는 건 나라를 위한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다."는 의견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그런 면모가 동기가 되어 메이지 28년(1895) 가을, 오키나와중학교에서 미증유의 휴학사태ストライキ가 일어났다. 나는 칸나(漢那, 憲和. 지금의 중의원 의원 겸 해군 소장) 군, 그리고 다른 세 명의 동급생들과 함께 그 희생양이 되어 메이지 29년(1896) 여름, 도쿄東京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꽤나 우물쭈물하는 청년이었음에도 언젠가 정치가政治家가 되서 모욕당하는 동포들을 위해 분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2~3번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경쟁시험에 응시하는 과정에서 제법 쓰디쓴 경험들을 맛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내 자신의 성격과 처지가 정치적 인생을 영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자각하고 단호히 지금까지의 지망을 내던졌다. 메이지 33년(1900) 교토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엔 "역사학을 배워 류큐 고대사를 연구해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 중 두 셋은 내가 목표를 바꾼 걸 애석히 여기며 수없이 내게 충고하였으나, 메이지 36년(1903)엔 드디어 문과대학(文科大學, 역주 : 도쿄대학교 문과대학을 의미. 이하는 오키나와인 최초로 도쿄대에 합격한 사람이기도 하다. 도쿄대학이 세워진지 26년만에 처음으로 오키나와 출신 토다이생이 탄생한 것)에서 언어학言語學 강의를 듣게 되었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시기 타지마 선생님도 상경하시어 니혼여학교日本女学校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내가 언어학을 공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졌던 답례라며 몇 년간 힘들게 수집하신 류큐어 어학자료들을 싸그리 내게 넘겨주시며, "언젠가 이 연구를 대성시켜주게." 라고 하셨다. 나는 타지마 선생님과 함께 혼고 니시가타마치郷西片町에서 자취하고 있던 것을 기화로, 류큐 연구의 단서로 삼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오모로 과외를 받았다. 2~3장 정도 넘어갔구나 싶었을 때, 갑작스럽게 타지마 선생님은 동도(東都, 도쿄)를 떠나 대만台湾으로 가 버리셨기에 나는 지극히 실망했다. 그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오모로를 독자적으로 연구해보려 했으나 그야말로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느낌이라 한떄는 연구 중지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모로가 아무리 해독하기 어려운 음문이라고 해도 결국은 본래 우리들의 선조가 남긴 문학임을 감안한다면, 연구 방법만 제대로 잡으면 해독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끈기있게 연구를 계속했다. 이 시기에 듣던 고고학 강의 중 프랑스 학자가 '로제타 스톤'을 연구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내 호기심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류큐 고어와 관련된 유일한 사전인《혼효험집混効験集》의 도움을 받아 오모로를 읽기 시작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절반 정도를 해독할 수 있었다. 해독하지 못한 부분은 시골이나 외딴 섬들의 방언을 통하여 읽어나갔다. 2년도 채 되지 않아 70~80% 정도를 독해했다. 메이지 39년(1906),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로 돌아갔다. 내 전공지식은 지극히 어정쩡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오모로의 권위자オーソリチー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그렇게 오모로를 알아가게 되자,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古 류큐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역사가도 아니었지만 오모로의 빛으로 고대 류큐를 비추어 보았다. 때때로 묘한 발견을 하기도 했고, 이렇게 발견한 것들을 향리의 신문에 기고했다. 그 글들을 읽고 "이하 군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냐?"며 괴이쩍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 그런 식으로 과거 수 년간 신문에 기고한 초고가 지금은 누적되어 20여 편에 달한다. 본래는 공공연히 발표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나, 친구 오오시로 히코고로 씨大城彦五郎氏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제 이들을《고 류큐古琉球》란 제목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학우 테루야 히로시 군照屋宏君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타지마 선생님은 내가 신문 등지에 빈번히 기고하는 걸 보고 "이하 군도 꽤나 현세의 시류를 따르는 학자当世流の学者가 되어버렸어." 라며 개탄하셨다고 하니, 이 책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타지마 선생님은 아마 눈썹을 찌푸리실 것 같다. 타지마 선생님의 희망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이런 소책자를 공개하게 된 건,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이 책이 오키나와의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라 생각한다.

  근래 대만에서 돌아온 사람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타지마 선생님은 승려 차림으로 남중국을 방랑하고 계시다는데, 나로선 내가 보다 가치 있는 저서를 출간하게 되는 날, 타지마 선생님께서 표연히 이 남해의 낙원에 재림하시기를 기도드릴 따름이다.

메이지 44년(1911) 7월 초순, 오키나와 도서관에서. 이하 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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