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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 히고 토호 잇키肥後国人一揆 ┗ ウィキペディア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 통일에 저항한 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인물ㆍ세력들 위주로 올리는 일본위키 번역의 여섯 번째 포스팅입니다. 아래의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단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정확히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링크 : 히고 코쿠진 잇키(일본 위키피디아 2020년 7월 11일 버전)


  히고 코쿠진 잇키란, 텐쇼 15년(1587)에 발발한 히고 토호들의 잇키다. 히고 토호집단 잇키肥後国衆一揆라 부르기도 한다.


  1. 배경

  슈고守護 키쿠치 씨菊池氏가 쇠퇴한 후 전국시대에 돌입한 히고 주는 토호들의 할거상태가 계속되었다. 텐쇼 년간의 일시기엔 시마즈 씨島津氏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지만 텐쇼 15년(1587)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큐슈 정벌九州征伐이 개시되면서, 시마즈 씨는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굴복하고 사츠마薩摩ㆍ오오스미大隅 2주의 영주로 원상복귀되었다. 같은 해 6월, 히고 토호 52명이 히데요시로부터 영지를 보장받고, 히고 주를 배령한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의 가신단으로 편입되었다.(큐슈 영토 배분)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히고 주를 영지화하길 바랐던 나리마사가 성급하게 토지조사를 밀어붙이면서, 토호들의 불만이 폭발하기에 이른다.[1]

  [1]《호안타이코키》에 따르면 6월 6일 히데요시는 나리마사에게 “3년 동안 토지조사와 축조역을 유예하고, 토호들이 잇키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해주어라.” 는 내용의 정서定書를 발급했다고 하나, 이 정서의 수신명이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되어있기에 실물인지가 의심스럽다. 5월 말일자로 사가라 나가츠네와 오오야노 타네모토에게 발급한 공문서에서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무츠노카미羽柴陸奥守’, 6월 2일자로 나리마사에게 보낸 편지에선 ‘하시바 히고 지쥬 공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쿠마모토 현의 역사》(1999), p.151)

지도상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부분히고 주(지금의 쿠마모토 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肥後国'


  2. 경과

  같은 해(1587) 7월 쿠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ㆍ치카야스親泰 부자는 히데요시의 공문서朱印状를 방패삼아 토지조사検地를 거부하고 거병挙兵하였다. 나리마사는 즉각 7천 병력을 인솔하여 본거지本拠로 삼고 있던 쿠마모토 성隈本城을 출발, 치카나가가 농성한 쿠마후 성隈府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치카나가가 치카야스가 농성하고 있던 죠무라 성城村城으로 도망치자 나리마사는 죠무라 성도 포위했으나, 의외로 수비가 견고하여 공략하는데 애를 먹었다. 치카나가는 카이 치카히데甲斐親英와 공모하여 토호들을 위시한 약 3만 5천여 명의 거병을 이끌어냈고, 와니 치카자네ㆍ키쿠치 타케쿠니 등이 지휘하던 잇키군이 쿠마모토 성을 포위ㆍ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나리마사는 다급히 쿠마모토 성으로 회군했으나, 그의 조카인 삿사 나리요시佐々成能가 우치노코가 시게후사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 철수과정에서 수많은 가신들을 잃고 피해가 컸기에, 히데요시에게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같은 해 9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요청에 응해 치중대輜重隊를 파병하여 구원에 나섰으나, 히고 미나미가세키肥後南関에서 오오츠야마 데와노카미가 이끄는 복병의 습격을 받아 구원에 실패했다. 이어서 구원출격에 나선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ㆍ타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형제는 요청에 기반해 치중대를 포함한 1천 2백의 병력을 이끌고 야나가와 성을 출발했다. 타치바나ㆍ타카하시의 군세는 잇키 측의 복병 계책을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해 이들보다 앞서 병력을 기마화승총대ㆍ치중대ㆍ장창대 세 부대로 나누어 복병을 배치, 오노 시게유키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미나미가세키를 돌파하고 오오츠야마 데와노카미를 참한 후, 오오츠야마 성(츠즈라가다케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죠무라 성을 견제하기 위해 축성한 지성支城인 히라야마平山 동ㆍ서의 츠케지로付城에서 쿠마베 측의 우도 카네모토에게 포위당한 채 병량부족兵糧不足에 시달리던 삿사 나리마사군을 상대로 한 보급작전補給作戦에도 성공하였다. 타치바나ㆍ타카하시군은 하루에 13번의 전투를 치러가면서 잇키 측의 성 7개를 함락시켰고, 650여 명의 적병과 우도 시마노카미ㆍ우도 시모우사노카미ㆍ오오치 에치젠노카미를 비롯한 무장들의 목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

  큐슈를 ‘카라이리(唐入り, 대륙 침공)의 병참기지로 간주하던 히데요시는 히고 토호 잇키 문제를 조기해결할 목적으로 큐슈ㆍ시코쿠의 다이묘들을 총동원, 같은 해 12월에 이르러서는 코바야카와 히데카네가 잇키 토벌의 총대장総大将이 되어 출진했고, 타치바나 무네시게ㆍ타카하시 나오츠구ㆍ츠쿠시 히로카도ㆍ나베시마 나오시게ㆍ안코쿠지 에케이를 비롯한 큐슈의 다이묘들九州大名勢에, 토다 카츠타카ㆍ후쿠시마 마사노리ㆍ이코마 치카마사ㆍ하치스카 이에마사를 비롯한 시코쿠의 다이묘들四国大名勢까지 참진, 와니 치카자네 형제가 농성한 타나카 성을 포위, 전투 끝에 타나카 성을 공략했다.

  12월 26일, 삿사 나리마사ㆍ타치바나 무네시게ㆍ안코쿠지 에케이들은 잇키 주모자인 쿠마베 치카나가가 농성한 죠무라 성을 함락시키고 잇키 진압에 성공하였다.


  3. 전후

  다음 해인 텐쇼 16년(1588), 사죄謝罪를 하기 위해 오사카로 출향한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면회를 거부당하고 그대로 아마가사키尼崎에 유폐되었다. 잇키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같은 해 윤 5월 14일, 나리마사는 셋츠 주 아마가사키 호엔사에서 할복형에 처해졌다. 히데요시는 잇키에 참가한 토호들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킨 토호들까지도 처벌했다. 일부 잔당들은 사츠마 주로 도망쳤으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義虎가 나와 아키히로名和彰広를 살해, 카토 키요마사에게 아소阿蘇를 하사받은 키타자토 미카와北里三河는 시모죠 우콘다이부下城右近大夫를 살해했다. 히고 주 토호 52명 중 48명이 전사戰死 내지 처형処刑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다. 쿠마베 일족 12명은 5월 27일, 야나가와 성柳川城 동남쪽 구석 쿠로몬黒門에서 “쿠마베 일족의 무사로서의 명예를 지켜주겠다.” 며 쿠마베 일족과 동일한 숫자인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가신 12명으로 구성된 토벌자들과 진검승부, 하나시우치放し討ち를 벌인 끝에 전원이 전사했다.

  그리고 병력동원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ㆍ이쥬인 타다무네伊集院忠棟에게도 참가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이 떨어졌으나, 이것을 자기를 토벌하는 걸로 착각한 삿사 나리마사의 지시에 따라 쿠마球磨 군의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가 시마즈군의 행군을 저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데요시는 사가라 씨의 행동에 격노했으나, 요리후사의 가신 후카미 나가토모深水長智가 오사카로 올라가 열심히 사죄했기에 사가라 씨는 영지몰수를 면할 수 있었다.

  나리마사 사후 히고 북반부는 카토 키요마사에게, 쿠마 군을 제외한 남반부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용서를 받은 히고 토호인 죠 히사모토와 나와 아키타카는 치쿠젠 주筑前国로 이봉되었고, 이들을 대신해 나가노 시게노부ㆍ하라다 노부타네ㆍ쿠사노 시게나가가 히고 주에 입봉했다.

  이로 인한 여파로 같은 해 11월에는 아마쿠사天草의 아마쿠사 5인중天草五人衆이 잇키를 일으켰고, 이쪽은 키요마사와 유키나가 두 다이묘에 의해 진압당했다.


  3.1. 영향

  이 잇키에 농민百姓들이 다수 참가하였고, 이들 농민이 각기 칼과 단도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진압에 애를 먹었다고 하여 토요토미 정권은 텐쇼 13년(1585) 키슈 공격紀州攻め 때 발포했던 것보다 더욱 철저해진 ‘무기 몰수령刀狩令’을 텐쇼 16년(1588) 7월 8일에 발포했다.[2] 명목은 “호코사 대불方広寺大仏 건립을 위한 못과 걸쇠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으나, 법령의「조목」에서부터 이미 농민들의 무기를 탈취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하였음이 명백하다.

  [2] 오와다 테츠오 <큐슈 정전령과 큐슈 공격>《전쟁의 일본사 15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전쟁》요시카와코분칸, 2006년 9월. ISBN 4-642-06325-0


덧글

  • 함부르거 2021/03/10 10:45 # 답글

    히데요시가 삿사 나리마사를 제거하려고 히고를 줬다는 설도 있더군요. 나리마사의 성격이나 그 동네 인심을 잘 아는 사람이 그렇게 한 건 일부러 잇키를 유도한 거 아니냐는 거죠. 진실은 저승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물어 봐야겠습니다만... ^^;;;
  • 3인칭관찰자 2021/03/10 12:12 #

    다수의 기존 가신들을 데리고 입봉한 나리마사의 입장에선 기존 부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해서라도 대규모 토지조사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히고는 큐슈에서 토호들의 독립성이 유난히 강한 동네였던지라.

    히고에 입봉한 시점에서 이미 나리마사의 앞날은 위태위태했다 할 수 있는데, 그 히데요시가 이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 rumic71 2021/03/11 04:10 #

    나리마사 본인은 아무것도 몰랐을까요...
  • 3인칭관찰자 2021/03/11 07:59 #

    추측에 불과하지만,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영지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였던 당시의 나리마사로선 좀 무리를 해서라도 이걸 히고 지방에서 만회하려는 욕심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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