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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 ウィキペディア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 통일에 저항한 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인물ㆍ세력들 위주로 올리는 일본위키 번역의 네 번째 포스팅입니다. 아래의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단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정확히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링크 :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일본 위키피디아 2020년 7월 8일 버전)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이란 텐쇼 19년(1591), 난부 씨 일족의 유력자 쿠노헤 마사자네가 난부 가문 당주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와 오슈 처분을 행한 토요토미 정권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다. 근년에 들어「쿠노헤 마사자네의 결기」등으로 칭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1, 경위

  1.1. 배경

  난부 씨의 최성기를 구축한 제 24대 당주当主 난부 하루마사南部晴政가 텐쇼 10년(1582)에 세상을 떠나자 난부 가문 내부는 후계자 문제로 분열하였다. 이전부터 난부 하루마사&난부 일족 유력세력인 쿠노헤 씨의 연횡連衡과, 탓코 (이시카와石川) 노부나오田子信直를 맹주盟主로 삼은 키타 노부치카北信愛&미나미 나가요시南長義의 연합連合이란, 난부 일족간의 대립이 불거졌다. 그들의 맹주인 산노헤 난부 가문三戸南部家의 당주 지위를 계승한 난부 하루츠구南部晴継가 같은 해 13세의 나이로 급사急死하자, 쿠노헤 가문과 탓코 (이시카와) 가문 간의 난부 종가 후계자 다툼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탓코 (이시카와) 노부나오가 쿠노헤 사네치카九戸実親를 물리치고 반강제로 산노헤 난부 가문 당주가 되어 난부 씨 총령 자리에 오르면서, 사네치카의 형 쿠노헤 마사자네는 커다란 불만을 품었고, 난부 노부나오와의 관계는 균열상태龜裂狀態에 돌입했다. 난부 씨는 산노헤 난부 씨를 중심으로 하치노헤 씨八戸氏ㆍ쿠노헤 씨ㆍ쿠시비키 씨櫛引氏ㆍ이치노헤 씨一戸氏ㆍ시치노헤 씨七戸氏 등의 난부 일족이 연합한 ‘군중群中’들의 동족연합체였으나, 텐쇼 18년(1590) 7월 27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공문서朱印状에 의해 산노헤 난부 씨의 당주인 노부나오가 난부 씨 종가宗家의 지위를 공인公認받고 토요토미 정권 하의 근세다이묘近世大名로 편입되는 반면, 이를 제외한 다른 세력은 아무리 유력일족有力一族이라도 독립성獨立性을 인정받지 못하고 종가의 ‘가중家中’ 내지 ‘가신家臣’으로서 복속하라는 요구를 받자, 이에 반발한 쿠노헤 씨는 노부나오와 격렬히 대립했다.


  1.2. 오슈 처분과 잇키의 발발

  난부 노부나오가 1천 병력을 이끌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과 그에 이은 오슈 처분奥州仕置에 종군하기 위해 영지를 비운 텐쇼 18년(1590) 6월, 쿠노헤 측은 산노헤 난부 편의 미나미 모리요시南盛義를 공격했다. 결국 미나미 모리요시는 전사했고, 이후 난부 가중엔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秀吉의 오슈 처분군은 히라이즈미平泉 주변까지 진격하여 오오사키 씨大崎氏ㆍ카사이 씨葛西氏ㆍ쿠로카와 씨黒川氏 등을 비롯한 오다와라에 참진參陣하지 않았던 재지영주在地領主들의 성들을 제압하고 토지조사檢地를 강행한 후, 행정관奉行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 등이 군 대리통치자郡代ㆍ대관代官들을 배치한 후 군대를 철수했다.

  오슈 처분군이 각자 영지로 돌아간 같은 해 10월부터 오슈 시오키에 대한 불만不滿으로 무츠 주 각지에서 카사이ㆍ오오사키 잇키葛西大崎一揆, 센보쿠 잇키仙北一揆를 비롯한 대규모 잇키가 발발했다. 난부 노부나오는 와가ㆍ히에누키 잇키和賀稗貫一揆에 맞서 출병出兵하였으나, 히에누키 씨의 옛 거성이었던 토야가사키 성에서 잇키 세력에게 포위되어 있던 아사노 나가마사의 대관을 구출해 난부 씨의 거성 산노헤 성으로 데리고 오는 게 고작으로, 적설積雪로 인해 토벌군討伐軍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1.3. 쿠노헤 세력의 반란

  정세가 불온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텐쇼 19년(1591) 새해가 밝았으나, 쿠노헤 씨는 산노헤 성에서 열리는 정월 참하正月參賀를 거절하고 난부 본가에 대한 반의反意를 명확히 했다. 산노헤 성에 배치되어 있던 아사노 나가마사의 대관이 2월 28일자로 오오모리 성大森城에 주재駐在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중신 이로베 나가자네色部長実에게 보낸 편지는「역의逆意를 품은 무사집단侍衆이 있어 누카노부 지방糠部地方이 혼란상태에 빠져 있음. 그 땅의 무리가 ‘교토의 뜻’을 혐오하고, 토요토미에게 붙은 난부 노부나오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 처분군의 가세 없이는 난부 노부나오가 엄혹한 상황에 놓일 것.」이란 뜻의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날 난부 노부나오는 이로베 나가자네에게 보낸 편지에서「역의를 품은 자들 때문에 속을 썩이고 있지만, 처분군이 도래하리라는 건 필정必定이다.」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같은 해 3월 쿠노헤 측의 쿠시비키 키요나가櫛引清長가 토마베치 성苫米地城을 공격한 것을 신호탄으로 드디어 쿠노헤 마사자네가 5천 병력을 동원해 거병擧兵, 쿠노헤 측에 협력協力하지 않는 주위의 성관城館들을 차례차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 아사노 나가마사의 대관이 이로베 나가자네에게 보낸 편지에는「쿠노헤, 쿠시비키가 역심을 품어 방심할 수 없는 상황임. 잇키 세력은 처분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활동을 자제하는 중」이라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본래부터 난부 씨의 정예精銳였던 쿠노헤 세력은 강력하여, 산노헤 난부 측은 키타 씨ㆍ나쿠이 씨名久井氏ㆍ노다 씨野田氏ㆍ죠호지 씨浄法寺氏 등의 협력을 얻어 방어전에 주력했으나 난부 영내의 잇키에 편승한 쿠노헤 세력이 강대해진데다, 가문 내부의 싸움에 이겨봤자 은상도 없을 거라는 가신들의 방관日和見으로 인해 산노헤 난부 씨는 고전하였다. 그리고 결국 자력으로 쿠노헤 마사자네를 토벌하겠다는 마음을 접은 노부나오는 아들 난부 토시나오南部利直와 중진 키타 노부치카를 카미카타上方로 파견해 6월 9일, 두 사람은 히데요시를 알현하여 정세를 보고하였다.


  1.4. 오슈 재처분군의 진격

  쿠노헤 외에도 오슈에선 대규모 잇키들이 일어나있었기에 이를 싸그리 진압하는 것을 목적으로, 히데요시는 같은 해 6월 20일 호령을 내려 오슈 재처분군을 편성했다.

  시라카와 방면白河口에선 총대장總大將인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가 인솔하는 3만 병력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가세加勢했고, 센보쿠 방면仙北口에선 우에스기 카게카츠ㆍ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츠가루 방면津軽口에선 마에다 토시이에ㆍ토시나가, 소마 방면相馬口에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ㆍ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ㆍ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의 병력이 할당되었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ㆍ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ㆍ오노데라 요시미치ㆍ토자와 미츠모리ㆍ아키타 사네스에ㆍ츠가루 타메노부津軽為信 등은 위 제장들의 지휘하에 들어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오슈 재처분군은 무츠陸奥ㆍ데와 주出羽国를 침공,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ㆍ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합류, 8월 중순에는 난부 영지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8월 23일, 쿠노헤 마사자네 배하의 코토리야 셋츠노카미小鳥谷摂津守가 50명의 병력을 인솔, 미노키자와美濃木沢에 있던 재처분군을 기습奇襲해 480명에게 타격打擊을 주었다. 이 전투가 서전緖戰이 되었다. 9월 1일 쿠노헤 씨의 전선기지인 아네다이 성姉帯城ㆍ네소리 성根反城이 함락되자 쿠노헤 마사자네는 쿠노헤 성에 농성, 9월 2일에 이르러 총합 6만 병력이 쿠노헤 성을 포위하고 이후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1.5. 쿠노헤 성 전투

  쿠노헤 성은 서쪽으로 마베치 강馬淵川이, 북쪽으로 시라토리 강白鳥川이, 동쪽으로 네코베치 강猫渕川이 흘러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였다. 성 정면에 해당하는 남쪽에는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가, 네코베치 강을 사이에 둔 동쪽에는 아사노 나가마사ㆍ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가, 시라토리 강을 사이에 둔 북쪽에는 난부 노부나오ㆍ마츠마에 요시히로松前慶広가, 마베치 강을 사이에 둔 서쪽에는 츠가루 타메노부ㆍ아키타 사네스에ㆍ오노데라 요시미치ㆍ유리 12두령由利十二頭이 포진했다. 쿠노헤 마사자네는 이들 재처분군의 포위공격에 맞서 소수의 병력으로 건투하였으나, 결국 성 병사의 절반 가량이 죽음을 당했다.

  아사노 나가마사는 쿠노헤 씨의 보리사菩提寺인 호우쵸산 쵸코우사長興寺의 삿텐 화상薩天和尚을 사자로 보내어 “성문을 연다면 모두 살려주겠다.”면서 쿠노헤 마사자네로 하여금 성을 양도케 하도록 설득했다. 쿠노헤 마사자네는 이를 받아들여 동생 쿠노헤 사네치카에게 뒷일을 맡기고 9월 4일, 시치노헤 이에쿠니ㆍ쿠시비키 키요나가ㆍ쿠지 나오하루ㆍ마루코 미츠타네ㆍ오오사토 치카모토ㆍ오오유 마사츠구ㆍ이치노헤 사네토미 등과 함께 흰 옷으로 갈아입고 출가자의 차림出家姿으로 곧장 재처분군에 항복降伏했다.

  아사노ㆍ가모ㆍ호리오ㆍ이이의 연대서명하에 농민들을 상대로 환주명령을 내려 전후처리가 끝나자,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은 번복反故되어 성내에 남겨진 쿠노헤 사네치카 이하 전원은 니노마루二の丸에 감금된 후 모두 참살斬殺당했고, 시체들은 소각되었다. "그 불길은 삼일 밤낮동안 밤하늘夜空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쿠노헤 성 니노마루 터에선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참수당한 여성의 인골人骨 등이 발굴되고 있다.[1] 마사자네를 위시한 난의 주모자들은 한 곳에 모여 쿠리하라 군 미사코(栗原郡三迫, 지금의 미야기 현 쿠리하라 시)에서 처형당했다.


  2. 결과

  이후 쿠노헤 씨의 잔당残党들을 경계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잔류한 가모 우지사토가 쿠노헤 성과 성하거리城下町를 개수改修하여 난부 노부나오에게 양도하였다.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본성을 산노헤에서 이전시켰고, 쿠노헤는 후쿠오카福岡로 개명되었다.

  이 난이 종식된 후 토요토미 정권을 상대로 조직적으로 반항하는 자는 사라졌고,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난부 씨는 이를 계기로 가모 씨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가모 우지사토의 수양딸 겐슈니(源秀院, 오타케노카타お武の方)가 난부 토시나오에게 시집을 갔다. 전국시대의 기괴한 투구로 이름 높은 ‘엔비나리 투구燕尾形兜’는 이때 증정품으로 난부 씨에게 선물된 물건이다.

  그리고 우지사토와 아사노 나가마사는 노부나오에게 본거지를 남쪽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고, 이들의 권유가 모리오카 성盛岡城을 축성하는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쿠노헤 마사자네의 친동생 나카노 야스자네中野康実의 자손은 나카노 씨中野氏를 칭하며 하치노헤 씨八戸氏ㆍ키타 씨北氏와 함께 대대로 난부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고산케御三家’의 일원으로서 존속하였다.


  3.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을 다룬 작품

  - 와타나베 키에코《난부 쿠노헤 낙성》마이니치신문사, 1989년 8월 30일. ISBN 4-620-10394-2
  - 타카하시 카츠히코《하늘을 찌르다 - 히데요시에게 싸움을 건 남자ㆍ쿠노헤 마사자네 上코단사, 2001년 10월 19일. ISBN 4-06-210881-X
  - 타카하시 카츠히코《하늘을 찌르다 - 히데요시에게 싸움을 건 남자ㆍ쿠노헤 마사자네 下코단사, 2001년 10월 19일. ISBN 4-06-210882-8
  - 아베 류타로《겨울을 기다리는 성》신쵸사, 2014년 10월 20일. ISBN 4-10-378809-7


  4. 각주

  [1] 니노헤 시 교육위원회 <쿠노헤 성터>


  5. 참고문헌

  -《이와테 현사 제 3권 중세편 下》이와테 현岩手県, 1961년 10월 20일
  - 코다마 유키아児玉幸阿ㆍ츠보우치 키요타리坪井清足《일본성루대계 제 2권 아오모리ㆍ이와테ㆍ아키타》신진부츠오라이사新人物往来社, 1980년 7월 15일
  -《히로사키 시사 통사편 2》히로사키 시弘前市, 2002년 6월 28일
  - <카도카와 일본지명대사전> 편찬위원회《카도카와 일본지명대사전 3 이와테 현》카도카와 서점角川書店, 1985년 3월 8일. ISBN 4-04-00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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