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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 와가ㆍ히에누키 잇키和賀ㆍ稗貫一揆 ┗ ウィキペディア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 통일에 저항한 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인물ㆍ세력들 위주로 당분간 일본위키 번역 포스팅을 올리려고 합니다. 반드시 시간 순서를 따라 번역하려는 건 아니지만, 일단 1590~1592년 사이에 발발했던 反 토요토미 봉기를 다룬 위키문서들 위주로 번역할 생각입니다. (잇키의 정당성이나 시비是非를 떠나) 사실상 이들의 반란이 조일전쟁을 6개월에서 1년 정도 늦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본 원정을 늦춘 삼별초三別抄의 일본 쪽 버전이 아닐까, 싶어서.

  아래의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단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정확히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링크 : 와가ㆍ히에누키 잇키(일본 위키피디아 2019년 5월 27일 버전)


  와가ㆍ히에누키 잇키란, 텐쇼 18년(1590)의 오슈 처분奥州仕置에 반발한 무츠 주陸奥国의 토호영주들이 처분군(仕置軍, 토요토미 정권)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케이쵸 시대에 와가 씨가 일으킨 잇키는 '이와사키 잇키'를 참조하라.


  1. 개략

  1.1. 배경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텐쇼 18년(1590), 오다와라 정벌군小田原征伐の軍을 일으켰다. 칸토ㆍ오우의 영주들과 다이묘들은 속속들이 오다와라에 참진하여 히데요시군에 가세했으나, 오다와라에 참진하지 않았던 유우키 요시치카結城義親 /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 / 에사시 시게츠네江刺重恒 / 카사이 하루노부葛西晴信 /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義隆 / 와가 요시타다和賀義忠 / 히에누키 히로타다(稗貫広忠, 카호家法ㆍ시게츠나重綱) 등은 이후 벌어진 오슈 처분에 의해 영지所領를 몰수沒收당한 후 성지城地에서 추방追放당했다.

  히에누키 씨가 성지에서 추방당하고 남겨진 토야가사키 성(鳥谷ヶ崎城, 훗날의 하나마키 성)에는 히데요시 휘하의 행정관奉行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가 입성해 제장들에게 호령, 오슈 처분군은 히라이즈미平泉 근변까지 진격하여 와가 씨를 비롯한 재지영주在地領主들의 성을 제압했다. 아사노 나가마사의 가신들이 대관代官으로 진주하며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진척, 토지조사檢地 등을 행한 후 군 대리통치인郡代ㆍ대관들을 잔류시키고 오슈 처분군은 철수하였다.


  1.2. 잇키의 발생

  오오사키 씨大崎氏ㆍ카사이 씨葛西氏ㆍ이사와 군 카시야마 씨胆沢郡の柏山氏 등 몰락한 다이묘没落大名들의 옛 가신이었던 자들과 농민들은 토지조사에 불만不滿을 품고, 오슈 처분군 철수 직후인 10월 잇키一揆를 결성해 각지에서 봉기蜂起.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파견무장들을 공격하면서 기세를 드높였다. 이 때 와가 군和賀郡과 히에누키 군稗貫郡도 이 소동(카사이ㆍ오오사키 잇키葛西ㆍ大崎一揆)에 협조해 와가 요시타다ㆍ히에누키 히로타다 등이 (직접) 봉기했다.

  잇키군은 10월 23일(28일이라고도) 와가 씨의 옛 본거지였던 후타고 성(二子城, 현재의 이와테 현 키타가미 시 후타고 쵸)의 아사노 나가마사 휘하 대관 고토 한시치後藤半七를 급습急襲해 성을 공략, 와가 씨의 옛 영지를 탈환奪還했다. 그들은 기세를 몰아 토야가사키 성을 2천 병력으로 포위하였다. 잇키군 2천은 방금 전까지 현역 사졸이었던 자들로 토민들로 구성된 잇키보다 훨씬 싸움에 익숙했고, 이에 비해 토야가사키 성 대관인 아사노 시게요시浅野重吉의 병력은 고작 100기騎 + 아시가루足輕 150명 정도였으나 성지城地가 천연의 요새要塞였기에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로부터 무츠 북부의 영지를 보장받은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는 코즈카타 성(不来方城, 훗날의 모리오카 성盛岡城)에 군세를 집결시키고 직접 500기를 인솔하여 토야가사키 성을 구원救援하러 달려가, 11월 7일 잇키 측에 공세를 가해 포위를 풀어냈다. 난부군은 일단 토야가사키 성에 입성했으나 적설기積雪期가 다가오고 있기에 겨울 동안 이 성을 지키기는 곤란하다 판단하고, 성을 포기한 후 아사노 시게요시들을 데리고 난부 씨의 거성居城인 산노헤 성三戸城으로 철수했다. 결국 토야가사키 성과 히에누키 씨의 옛 영지도 잇키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로써 토요토미 정권이 오우에 파견한 군 대리통치인ㆍ대관 모두가 舊 영주들의 군대에 의해 구축驅逐되고 말았다.


  1.3. 재처분군의 침공

  이러한 대규모 잇키들 / 다음 해인 텐쇼 19년(1591) 난부 영내에서 분화한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을 진압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1591년 6월 20일 호령을 내려, 오슈 재처분군奥州再仕置軍을 편성하였다. 시라카와 방면白河口에선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를 총대장으로 삼아 인솔된 3만 병력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가세했고, 센보쿠 방면仙北口에선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ㆍ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츠가루 방면津軽口에선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ㆍ토시나가利長, 소마 방면相馬口에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ㆍ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ㆍ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의 병력이 할당되었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ㆍ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ㆍ오노데라 요시미치小野寺義道ㆍ토자와 미츠모리戸沢光盛ㆍ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ㆍ츠가루 타메노부津軽為信 등은 위 제장들의 지휘하에 들어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오슈 재처분군은 무츠陸奥ㆍ데와 주出羽国를 침공,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ㆍ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와 합류하여 잇키를 평정해가면서 북진北進하였다.

  와가 씨 등도 완강히 저항하긴 했으나 결국 재처분군 앞에 진압되었다. 와가 요시타다는 도주逃走하던 중에 토민土民에게 살해殺害당했다고 한다. 이후 두 가문의 영지는 난부 노부나오에게 주어졌고 와가 씨와 히에누키 씨는 몰락하였다. 이에 한을 품은 와가 타다치카(和賀忠親, 와가 요시타다의 아들)는 훗날 다시 잇키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쪽은 '이와사키 잇키岩崎一揆'라 한다.

(이와사키 잇키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번역글 '물거품이 된 100만 석 영지 보증서' 도 참조해주시길)

  난부 노부나오는 중신重臣 키타 히데치카北秀愛를 와가ㆍ히에누키 8천 석 성주대리城代로 앉혔고, 키타 히데치카는 토야가사키 성을 '하나마키 성花卷城'으로 개명하였다.


  2. 참고문헌

  이와테 현 편찬『이와테 현사岩手県史』제 3권 중세편 2. 토료 인쇄杜陵印刷. 1961년.
  이와테 현 와가 쵸 편찬『와가 쵸 역사和賀町史』와가 히에누키 잇키. p.395~400. 이와테 현 와가 쵸. 1977년.
 

덧글

  • BigTrain 2021/02/10 08:57 # 답글

    난부 노부나오는 오다와라 정벌시에 잽싸게 히데요시한테 시종해서 영지를 보장받았다고 하는데 ( https://valhae.kr/527 ), 후속처리 과정에서도 쏠쏠하게 이득을 얻고 그 영지를 명치유신 말기까지 보존했으니 시대의 격변기에 참 운이 좋았네요.
  • 3인칭관찰자 2021/02/10 10:01 #

    친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츠가루 타메노부가 히데요시ㆍ이에야스에게 밀착해서 독립다이묘화하는 걸 막지 못한 것 딱 하나만 빼면 거의 완벽한 성과였지만 타메노부란 인물이 효웅 소리 들을 정도로 정말 여간내기가 아닌 인물이었기에 노부나오로선 신통찮은 결과가 나온 거지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 도연초 2021/02/10 11:04 # 답글

    1. 그래서 난부 노부나오가 히젠나고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있었던 거였군요;(사실 도쿠가와측 장수들과 관동, 오슈, 데와 출신 사람들은 저 때의 반란 진압 참가 경력으로 인해 임진, 정유재란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가문의 보신을 위해 태합에게 잘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쓴 몸부림이었을 테니...

    2. 하지만 쿠노헤 마사자네의 반란이었던가? 아니면 또 다른 잇키를 진압하고 있었던 시점에서, 다시말해 국내 반란 진압도 미처 마치지 않은 상태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21/02/10 11:35 #

    1. 히젠 나고야에서 지내는 동안 난부 가문은 북쪽 변방의 어리버리한 시골뜨기들이라고 사교계에서 다른 다이묘들(특히 혼슈 중부 쪽 다이묘)에게 유형무형의 무시와 놀림을 적잖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난부 노부나오가 그 고충을 본 영지에 있는 가신에게 편지로 털어놓을 정도로... 그때 난부 가문과 노부나오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준 대표적 인물이 마에다 토시이에와 토쿠가와 이에야스라던가.

    2. 아마 시마즈 씨의 가신이 일으킨 우메키타 잇키일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군역동원에 반발해서 일어난 반란으로 이쪽은 임진왜란 발발 2개월 후에 터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의 조선 도해가 크게 늦어져 (정유재란 때와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의 시마즈군은 조선으로 건너간 일본군 중에서 딱히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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