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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210125 -《일본사는 이렇게 재미있어》中 독서



  한도半藤 : (중략) 쇼와 텐노(역주 : 히로히토裕仁)는, 유일한 대원수大元帥가 될 사람으로서 군부로부터 엄격한 단련을 받아왔죠. 황태자皇太子 시절에 나선 유럽 외유에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생생한 전적지를 답사한 텐노는 "전쟁이란 건 애처로운 짓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라고 했지요.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호위 육군무관陸軍武官은 '이런 인간이 대원수가 되어선 위험하다' 고 생각하였고, 이후 군은 텐노를 더욱 가차없이 단련시키려 하게 되죠. 모친母親, 그리고 군軍. 쌍방으로부터 가차없는 대우를 받다보니 본인으로선 갈 곳이 없는 거에요. 그 결과 생물학生物學 분야로 도피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데.

  한도 : 이런 말을 하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쇼와 텐노란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의 적용을 받아, 대원수라는 지위를 감당하기 위해 고작 10세 나이부터 군인교육軍人敎育을 받기 시작했던 건 그 분 뿐이거든요. 메이지 텐노明治天皇도, 타이쇼 텐노大正天皇도, 그리고 지금의 텐노 헤이카(역주 : 현재 헤이세이 죠우고平成上皇. 아키히토明仁)도, 군인교육을 경험하진 않았지요.

  하라原 : 분명 그렇습니다. 이전에 황거 앞 광장에 대해 조사하면서 깨닫게 된 바로, 쇼와 텐노는 재위중에 딱 두 번, 군복軍服을 입고 백마白馬를 탄 모습으로 니쥬바시二重橋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한도 : 아, 두 번밖에 없었나요?

  하라 : 네. 최초는 중일전쟁日中戰爭 당시 우한武漢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쇼와 13년(1938) 10월 28일. 두 번째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당시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할 목적으로 열린 쇼와 17년(1942) 2월 18일의 '전첩戰捷 제 1차 축하식' 때였습니다. 양쪽 어느 쪽이든, 텐노는 이제 전쟁에서 이겼다고 굳게 믿고 있던 상태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백마를 타고, 어마어마하게 몰려든 국민들의 환희歡喜와 열광熱狂을 감내했던 것이죠. 그 후 일본은 점점 패배의 수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만, 텐노는 "적과 강화를 맺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적을 격파할 필요가 있다." 는 주장을 하며 여기에 심히 집착하였지요.

  한도 : 앞에서 이야기한 쇼와 20년(1945) 6월 중순 테이메이 황후貞明皇后와 회담하기 전까진, 대단히 집착했지요.

  하라 : 미리 사과드립니다. 지금부턴 학자學者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예시를 들겠습니다. 기실 저는 조교 시절에 파칭고에 열중한 적이 있어요(웃음). 요즘의 파칭고는 대단하죠. 단번에 10박스까지 쌓을 수 있고.

  한도 : 하지만, 금방 없어져버리죠.(웃음)

  하라 : 맞습니다. 그렇기에 그 '10박스가 쌓인 상태' 를 싱가포르 함락 당시로 치겠습니다. 사실은 여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거에요. 그러던 것이 9박스, 8박스... 갈수록 줄어가고, 마지막엔 1박스만이 남았죠. 그런데도 10박스 때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끊기가 힘든 거지요.

  한도 : 바로 그겁니다(웃음). 저는 그 점이 텐노가 받아온 군인교육의 성과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쇼와 텐노가 전황戰況에 대해 처음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마 쇼와 18년(1943) 과달카날ガダルカナル에서의 대패大敗일 겁니다. 거기서 단번에 2박스 정도가 날아갔죠(웃음). 쇼와 17년(1942) 12월 31일에 일본군은 과달카날 철수撤退를 결정합니다만, 거기서 텐노가 무슨 말을 했는가. "과달카날을 취할 수 없다면, 어디에서 공세로 나서야 하는가." 였죠. 그리고 슬프게도 그 하문을 받은 참모총장參謀總長이 "뉴기니ニューギニア입니다." 라고 답한 결과, 다음에는 뉴기니로 몰려간 장병들이 산더미같이 죽어나갔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쇼와 텐노는 역시 군인軍人입니다. 싸우는 대원수 폐하 그 자체지요.

출처 :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 編著,《日本史はこんなに面白い》p.210 ~ 212. 文藝春秋, 2008.


  위 책의 故 한도 카즈토시 씨와 현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学院大学 명예교수 하라 타케시原武史 씨의 대담에서 발췌했습니다.

  하라 타케시 교수님은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 출신으로 말년의 쇼와 텐노를 취재한 걸 전기로 삼아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학자의 길을 걷게 된 이력을 지닌 분입니다. 메이지 이후의 텐노(특히 메이지, 타이쇼, 쇼와)들과 그 일가에 대한 연구분야에선 일본 학계의 권위자로 통하는 분으로, 이분 저서 중에는 2008년 코단샤 논픽션 상 수상작인《다키야마 코뮌 1974》(이매진),《여제의 일본사》(성균관대학교출판부), 그리고 현재는 품절상태이긴 합니다만 영ㆍ정조 시기의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며 양국 민주주의의 맹아를 찾아보려 한 책인《직소와 왕권》(지식산업사) 3권이 한국어로 번역출간되었습니다.


덧글

  • 함부르거 2021/01/25 13:45 # 답글

    일본 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쇼와 천황이 전쟁에 책임 없다는 건 완전 개소리죠.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전쟁지휘에 나서던 총사령관이었구만요.
  • 3인칭관찰자 2021/01/25 15:07 #

    맞습니다. 대외전쟁을 막아보려고 나름 노력한 면은 있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난 이후 일본이 취했던 전쟁전략의 큰 틀은 대부분 쇼와 텐노와 협의를 거쳤고 그의 의견도 상당히 반영된 것들이며, 백보 양보해도 쇼와 텐노에겐 정부와 군부의 논의들에 최종적 재가를 해주었던 책임은 있습니다.(그가 전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단 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본문에도 설명되었듯 쇼와 텐노가 1944년~1945년 어느 시점까지 "한번 이겨보고 강화해야 한다" 는 지론을 1년 가까이 밀고 나간 것도 사실이고요, 그가 그 고집을 부린 시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일본군 전사자가 폭증한 시기와 겹치기도 하는지라.... ;;; 일본에서 까는 사람은 이걸로도 많이 까더군요.
  • 無碍子 2021/01/25 19:17 #

    (사이판 전투)
    더 비극적이었던 죽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칙명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이판의 일본인들이 미군에 집단 투항해 일본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미군의 라디오 심리전에 앞장설 가능성을 염려한 히로히토는 1944년 6월 말, 사이판 주민들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칙명을 내린 것이다. 자살한 주민들은 사후 전사자와 같은 예우와 명예를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칙명을 전달해야 했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는 자살 칙명의 냉혹함에 놀라 발표하지 않고 보류하였다. 그 자신도 일본 군인에게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결하라는 전진훈을 포고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민간을 상대로 한 천황의 칙명은 너무 잔인했다.

    그러나 보류 여부와 상관없이 히로히토의 자살 특명은 방송을 거쳐 사이판의 군 지휘부에 전달되고 말았다. 왕이 이런 명령을 했을 리 없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선명한 옥새가 찍힌 명령서가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투의 마지막 순간 약 일천 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자결하였다. 상당수가 사이판의 ‘자살절벽’이나 ‘만세절벽(반자이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많은 가족들이 집단으로 투신하는 모습은 끔찍하고도 비극적이었다. 이들은 히로히토가 약속한 내세의 영광스런 영생을 믿으며 목숨을 끊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703&cid=59016&categoryId=59023
    이런짓을 했다고합니다.
  • 無碍子 2021/01/25 18:21 # 답글

    텐노는 "적과 강화를 맺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적을 격파할 필요가 있다." 는 주장을 했다는게 정신나간 소리죠.
    그들의 적은 강화맺을 생각이 눈꼽만큼도없고, 착한 쪽바리는 죽은 쪽바리다. 무고한 일본인은 없다. 전쟁이 끝났을 때 지상에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없다. 이러면서 처들어 오는데 강화라는게 멍는검니까?
  • 3인칭관찰자 2021/01/25 20:17 #

    아무리 상대가 강경해도 마구 때리고 후려치다보면 그들이 쫄아들어 계전의지가 꺾이고 빈틈이 생길 것이니 그때는 강화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구상은 진주만 기습을 주도한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했던 생각이고, 마찬가지로 군인교육을 받았고 최소한 일본이 미국 본토를 먹어서 완전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란 망상은 하지 않았던 쇼와 텐노 역시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사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저는 미일개전 이래 사실상 미국과의 직간접적 대화가 전멸하다시피 한 게 더 심각한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미일간에 말이라도 좀 통했다면 모를까 당시 일본수뇌는 일격강화 같은 말은 하면서도 패전하는 시점까지 제대로 된 미국과의 교섭루트 하나 못 만든 상태였죠.
  • 2021/01/25 19: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1/01/25 20:2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도연초 2021/01/26 13:11 # 답글

    1. 수많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식민지인, 미국인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다가 정치적인 이유 탓에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니... 물론 제국 시절에 비하면 여생을 거의 금치산자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 원죄는 사라지지 않는 법.

    2. 사실 이미 저런 제왕적인 천황의 면모는 태평양 전쟁 뿐만 아니라 이미 2.26사건 때 보여준 태도부터 잘 증명했지요; 진짜로 반란군이 빠르게 제압되지 않았더라면 천황 본인이 직접 근위사단을 이끌고 가서 유혈진압도 서슴치 않았을 거라는 말까지 있으니까...
  • 3인칭관찰자 2021/01/26 20:08 #

    1. 전범재판에 설 여지는 충분했지요. 정치적인 이유, 특히 미소대립과 냉전구도 형성이란 시대적 수혜를 받아 어물쩍 넘어간 데 불과...

    2. 텐노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밀어붙이려 할 경우 어느 정도 권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를 훤히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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