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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사》저자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 씨 별세 애도



  향년 92세(1930.05.21 ~ 2021.01.12)

어제 오후(12일), 도쿄 세타가야 구의 자택에서 쓰러지신 채로
발견되셨으며, 이미 별세하셨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쇼와사 연구로 이름을 알리며, 전쟁 등을 주제로 수많은 논픽션 작품들을 발표해온 작가 한도 카즈토시 씨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90세입니다.

  한도 카즈토시 씨는 쇼와 5년(1930) 도쿄 출생으로,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출판사 분게이슌쥬에 입사해《주간 분슌》,《분게이슌쥬》편집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탐정과도 같은 예리한 시선으로 역사를 탐구하는 '역사 탐정' 을 자처하며, 쇼와 시대 역사 등을 테마로 수많은 논픽션을 발표했습니다.

  쇼와 20년(1945) 8월 15일의 옥음방송에 이르는 24시간을 면밀한 취재로 살려낸《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역주 :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었으나 극장개봉되진 못했던 일본영화《일본패망 하루 전》의 원작) 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고, 쇼와 시대 역사를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저술한《쇼와사》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쇼와 14년(1939)에 일어난 구 소비에트군과의 군사충돌인 '노몬한 사건' 에서 구 일본군 엘리트 참모들이 수립했던 무모한 작전을 비판한《노몬한의 여름》으로 헤이세이 10년(1998) '야마모토 시치헤이 상'을 수상했으며, 헤이세이 27년(2015)에는 우수한 문화활동에 종사한 개인과 단체에게 수여되는 '키쿠치 칸 상' 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NHK의《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같은 역사채널에도 자주 출연하면서 이해하기 쉬운 어법으로 해설을 해 왔습니다.

  관계자에 따르면 12일, 도쿄 세타가야 구에 있는 자택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 이후 사망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사인은 노환. 가족들만으로 장례

  분게이슌쥬에 따르면 한도 카즈토시 씨는 12일 정오 무렵,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례는 가족들만으로 치른다고 합니다.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 씨 "쇼와사의 제 1인자"

  한도 씨와 오랫동안 쇼와사 연구에 협력해왔던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 씨(88세)는 "둘 다 도쿄대학교 학생이던 시절에 알게 되어, 졸업한 후에도 한도 씨가《분게이슌쥬》의 편집장을 맡고, 저는 기사를 기고하는 식의 편집자-작가 관계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쇼와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탐구 활동을 오랜 기간 벌여왔으나, 한도 씨가 지난해 초에 건강이 나빠지면서 중단해야 했고, 회복되면 다시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약속했습니다. 한도 씨는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쇼와사를 풀어 해설하였지만, 학술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내용을 전파하였기에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실규명에 엄격한 태도가 그 배경에 있었지요. 역사를 깊고 넓게 관찰했던, 그야말로 쇼와 시대 역사의 제 1인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하타 씨는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중립적 시점에 입각, 역사적 수수께끼와 과제를 검증하는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쇼와 시대 역사 분야에 전문가나 다름없는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편집자 한도와 합께 작업했던 마츠모토 세이초ㆍ시바 료타로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지식을 일반에 보급하였다는 점도 한도 씨의 커다란 공적입니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매력적으로, 역사를 놓고 토론할 때도 한도 씨가 그 자리에 있을 땐 말다툼과 시비가 붙는 일이 없었고, 모두가 화기애애했습니다. 오랫동안 터놓고 지내던 동료를 잃어,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듯한 쓸쓸함을 느낍니다." 고 한도 씨를 애도하였습니다.

 
  호사카 마사야스 씨 "근현대사를 그 발로 집필한 선구자였다."

  한도 씨와 많은 공저를 냈으며, 친교도 깊었던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81세)는 "근현대사를 발로 집필한 선구자였다. 역사를 사실로 이야기하기 위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전쟁과 마주했는지를 취재하고 / 자료를 뒤지며 철저히 사실을 해명하려 드는 실증주의적 방법을 확립하였다. 그 노선을 확고히 지켜나가는 건 일본에 있어서도 소중하리라 생각한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한도 씨는 도쿄대공습을 경험한 사람임에도, '나만이 특수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게 해선 곤란하니까.' 라면서 오래도록 그 체험을 입에 담지 않았다. 15년 전쯤에 와서 의도적으로 이를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건 '전쟁을 체험한 사람이 사라져감에 따라 현실의 전쟁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논의를 해대는데, 그것만큼 위험한 현상도 없어. 그걸 말해줄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전쟁이 가볍게 여겨지게 되어서는 곤란해.' 라는 심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 술회하였습니다.

  한도 씨와 호사카 씨는 죠우고上皇 님(역주 : 선대 텐노. 아키히토明仁)의 퇴위를 앞두고 죠우고 부부와 간담을 여러 번 가진 바 있었고, 작년 11월에 호사카 씨는 한도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하다 "이젠 지쳤다. 몸이 버텨주지 못해." 같은 토로를 들은 바 있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기에 걱정은 되었지만,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니 심히 충격이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호사카 씨는 마지막으로 "한도 씨가 걸어왔던 길을 우리들은 충실히 계승할 것이다. 이어갈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 말했습니다.


링크 : 한도 카즈토시(일본 위키피디아)


  일본의 저널리스트, 전사연구가, 작가. 주 분야는 쇼와 시대 역사昭和史로, 인물론人物論ㆍ사론史論 등을 담은 책을 (대담ㆍ좌담 등의 형식을 한 책들도 포함) 많이 간행하였다.

  나가오카 번 무사長岡藩士 집안의 후손. 도쿄 부 도쿄 시 무코지마 구(지금의 도쿄 도 스미다 구)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운송업자로 구의회 의원區議員을 지냈다. 이웃집에 살고 있던 어린 시절의 오 사다하루王貞治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도쿄부립제7중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3월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 때는 도망쳐다니며 나카가와 강中川을 표류한 끝에 죽다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이바라키 현 현립시모즈마중학교를 거쳐 아버지의 생가가 있는 니이가타 현 나가오카 시로 피난가, 현립나가오카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 종전을 맞이했고 그곳에서 졸업까지 한 후 도쿄로 돌아왔다. 구제우라와고등학교(학제개혁으로 인해 1년만에 수료)를 거쳐 도쿄대학교에 진학했다. 도쿄대에선 보트부에 들어가 활약했다. 도쿄대학교 문학부 국문과 졸업.

  보트부에서 만들던 영화의 촬영지에서 알고 지내게 된 타카미 쥰高見順의 추천으로 1953년(쇼와 28년) 분게이슌쥬신사文藝春秋新社에 입사했다. 입사동기로 타나카 켄고田中健五가 있다. 당대의 유행작가였던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원고를 받으러 다니며 그로부터 '역사에 절대란 것은 없다' 는 것과 '역사를 추리한다' 는 발상을 배웠고, 사카구치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자처하고 있다. 이어서 당시《연합함대의 최후連合艦隊の最後》등으로 인기를 누리던 군사기자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徳의 담당자가 되면서 일본 곳곳의 전쟁체험자들을 활발히 취재取材하러 다녔고,《주간 분슌週刊文春》에 무기명으로 <인물 태평양전쟁人物ㆍ太平洋戦争>을 연재했다. 이때 역사의 당사자들은 구라를 친다는 걸 깨닫고,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훗날 쇼와 시대 군부軍部를 다룬 작품을 집필하는 소양이 되었다.[2][3]

  회사 내에서 <태평양전쟁을 공부하는 모임>을 주재하며 전쟁체험자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을 통해 생겨난 기획이 바로《분게이슌쥬》1963년 8월에 게재된 28인 좌담회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다. 한도는 좌담회 사회자를 겸했다. 그리고 취재를 통해 1965년, 단행본으로《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 운명의 8월 15일을 집필했다. 판매량 진작을 위한 영업상의 수단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의 명의를 빌려, '편집 : 오오야 소이치' 를 달고 출판되었다. 단행본은 20만 부, 카도카와에서 문고화된 버전은 25만 부가 팔렸다.[3][1][6] 그 외에도 30대 초반, 편집자 생활과 병행하여 태평양전쟁 관련 저작을 여러 권 출간했다.[1]

 《만화 독본漫画読本》의 편집장으로 취임하여 1970년의 휴간을 맞이한 후,《증간 분게이슌쥬増刊文藝春秋》편집장이 되었다. 무크지《눈으로 보는 태평양 시리즈》《일본의 작가 100인》《일본종단ㆍ만요의 성》등을 편집했다. 이어서《주간 분슌》편집장이 되어 '록히드 사건' 취재의 진두지휘를 맡았다.[2] 1977년 4월《분게이슌쥬》편집장 타나카 켄고와 교대하는 양태로 타나카가《주간 분슌》편집장을, 한도가《분게이슌쥬》편집장으로 취임했다. 이때 신문광고ㆍ전철 천장걸이 광고로【 편집장이 바뀌었습니다 】라 선전하였던 것이 화제를 모았다.[7] 1980년 계간지《크리마》의 창간편집장으로 취임했으나, 2년 후 9호를 마지막으로 휴간했다.[2][8]

  이 13년 간의 편집장 시절엔 본업인 편집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저술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1993년,《소세키 선생님. 어쩌면》으로 닛타 지로 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책임자의 입장에서 <오리지널 논픽션> 시리즈를 담당하며 1988년, 全 3권으로 이루어진《분게이슌쥬로 읽는 쇼와사》를 감수했다. 전무이사역을 맡은 걸 마지막으로 1995년 분게이슌쥬를 퇴사, 본격적인 작가로 변신했다. 근대 이후의 일본 역사, 특히 쇼와사 중심으로 집필을 해 나가며 '역사 탐정' 을 자임했다.[1] 활동무대를 TV로까지 넓히면서 NHK《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를 비롯한 역사 채널에도 자주 출연했다.

  1998년《노몬한의 여름》으로 야마모토 시치헤이 상을, 2006년에는《쇼와사》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6년(헤이세이 18년) 7월 20일《니혼게이자이신문》이【 쇼와 텐노가 야스쿠니 신사 A급 전범 합사에 불쾌감 】을 보도했을 땐, 원 자료가 된 <토미타 메모富田メモ>(궁내청 장관을 역임한 토미타 토모히코富田朝彦의 일기메모)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기사화하기 전에 하타 이쿠히코 등과 함께 문서감정을 하여, 이 메모를 진품으로 단정했다.

  2009년에 이야기투의 문체로 출판하였던《쇼와사 1926~1945》《쇼와사 전후편 1945~1989》은 단행본으로 45만 부, 헤이본사 라이브러리 버전으로 23만 부가 판매되었다.[9]

  2015년, 제 63회 키쿠치 칸 상을 수상했다.[10]

  2021년 1월 12일 오후, 도쿄 도 세타가아 자택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 사망이 확인되었다.[11] 향년 9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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