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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위키 번역]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囯 영토배분 ┗ ウィキペディア



  이번 글의 특이사항이라면 '쿠니国''주州'로 번역해 본 정도일까요. 본래 저는 '国''지방'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은 '地方''쿠니'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영역을 가리키는 데 쓰고 있기에...

  세키가하라 전투와 그로 인한 영지 재분배 과정이 기록된 '보설' 부분은 번역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래의 제 번역글을 퍼가시는 건 자유입니다, 단 퍼가실 때 그 출처를 정확히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원문 링크 : 시코쿠 쿠니와케(일본 위키피디아 2020년 3월 31일 버전)


  시코쿠 쿠니와케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공격이 완료된 후, 텐쇼 13년(1585) 8월부터 전후처리 목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이 벌인 시코쿠 지방의 다이묘 등 제 영주들에 대한 영토배분을 가리킨다.


  1, 시코쿠 평정

  텐쇼 13년(서력 1585년) 초두, 종래의 현안이었던 츄고쿠 지방 모리 씨와의 접경지역 분쟁을 스스로 일정 부분 양보하면서 해결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로써 키이 주와 시코쿠 지방에서 벌어질 전쟁에 모리 씨의 군사협력을 얻는 데 성공했다.[1] 같은 해 3월, 키이의 네고로ㆍ사이가 잇키를 진압한 히데요시는 부장으로 참전했던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키이 / 이즈미 두 주를 주고 와카야마 성을 축성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토요토미 씨는 키나이 일대와 그 주변지역을 거의 장악, 6월에는 히데나가를 총대장으로 삼은 군대를 시코쿠로 파병했다.(시코쿠 공격) 텐쇼 13년 7월, 칸파쿠로 임관해 '후지와라藤原'로 본성을 고친 히데요시는, 같은 달 말 시코쿠를 거의 평정할 기세였던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복속시키며 시코쿠를 평정, 그 결과 텐쇼 13년(1585) 8월 상순, 시코쿠 지방을 대상으로 한 '영토배분(囯分, 쿠니와케)'을 통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히데요시는 직접 호쿠리쿠 지방으로 출정해 삿사 나리마사가 농성한 토야마 성(지금의 토야마 현 토야마 시)을 포위, 나리마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서쪽으로는 산요도 / 동쪽으로는 토카이도 / 북쪽으로는 호쿠리쿠도 / 남쪽으로는 시코쿠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세력범위하에 두어, 큐슈 지방을 제외한 서일본 전역을 귀복시켰다.


  2. 시코쿠 영토배분의 개요

  복속한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토사 주의 통치를 유지하며 토요토미 정권에 편입되었다. 히데요시는 아와 주의 대부분을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주고 일부분은 아카마츠 노리후사에게 주었으며, 사누키 주의 대부분을 센고쿠 히데히사에게 주고 일부분은 소고 마사야스에게 주는 동시에, 이요 주는 모리 씨가 이전부터 영유권을 주장하던 점을 배려하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ㆍ안코쿠지 에케이ㆍ쿠루시마 미치후사 등을 입봉시켰다. 모리 씨는 이전부터 이요 주 슈고 가문인 코우노 씨와 인척관계를 맺고 시코쿠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기에 시코쿠 공략전에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ㆍ킷카와 모토나가가 인솔하는 대군이 히데요시 군의 일부가 되어 이요 지방으로 파병되었다.(이요에선「텐쇼 전쟁天正の陣」이라 불린다) 모리 씨는 이미 3월의 키슈 공격 시점에서 수군을 파병했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명백히 히데요시의 군사행동에 동원되는 복속다이묘가 되었다.[2] 한편, 아와지 주엔 와키자카 야스하루ㆍ카토 요시아키가 입봉했다.

  이리하여 난카이도에는, 키이 - 하시바 히데나가 / 토사 - 쵸소카베 모토치카 / 이요 - 모리 씨 휘하의 다이묘들 / 사누키ㆍ아와ㆍ아와지 - 토요토미 계열 다이묘들이 배치되었다.


  3. 상세한 영토배분 내역

  3.1. 토사 주

  (1) 토사를 본래의 영지로서 보장한다.
  (2) '총령' 은 이후의 전쟁마다 3천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라.
  (3) 총령의 동생이 인질로 오사카 성에 찾아올 것.
  (4) 토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동맹을 금지한다.

  라는 강화조건[3]에 따라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는 토사 주 약 10만 석이 보장되었다. 군역이 부과됨에 따라 쵸소카베 씨는 토요토미 정권에 편입되었고, 텐쇼 14년(1586) 이후의 큐슈 정벌에서도 모토치카와 그 적자인 쵸소카베 노부치카가 참전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강화조건에 따라 모토치카의 3남인 츠노 치카타다가 인질로 오사카에 바쳐졌다.

  한편, 시코쿠 평정 과정에서 쵸소카베 씨에 복속하여 토요토미 정권과 싸웠다는 이유로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몰수당한 토호영주 중 일부(이요 카네코 씨ㆍ사누키 하유카 씨 등)는 쵸소카베 씨에게 거둬들여져, 토사 영내에 영지를 하사받았다.[4]


  3.2. 아와 주

  히데요시는 시코쿠 평정 이후 논공행상으로 하치스카 마사카츠(코로쿠)에게 아와 주 약 18만 석을 주려 했으나 마사카츠가 히데요시를 측근으로서 계속 섬기는 길을 선택하고 입봉을 사퇴했기에, 그 자식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에게 아와 주를 주었다. 단, 아카마츠 노리후사의 영지인 스미요시 1만 석과 모리 효키츠(모리 시게마사)의 영지인 반도 군 내 1082석은 제외되었다.

  이에마사는 당초엔 묘도 군 이치노미야 성(지금의 토쿠시마 현 토쿠시마 시 이치노미야 쵸)에 입성했으나, 나중에는 요시노 강 하구 근처의 토쿠시마 성(지금의 토쿠시마 시)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 시기, 그의 아버지 하치스카 마사카츠는 토요토미 정권의 중핵으로서 시코쿠 지방의 토리츠기取次 역을 맡고 있었다.[5]

  하리마 주 슈고 가문 출신인 아카마츠 노리후사는 츄고쿠 공격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종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에게 본 영지인 하리마 오키시오 성(지금의 효고 현 히메지 시) 1만 석을 보장함과 동시에 새로이 아와 스미요시(지금의 토쿠시마 시)의 1만 석 영지를 주었다.


  3.3. 사누키 주

  히데요시의 최고참 가신으로 스모토(지금의 효고 현 스모토 시) 성주였던 센고쿠 히데히사는 아와지 주 5만 석 다이묘 신분이었는데, 이 때의 전공으로 사누키 10만 석 다이묘로 가봉ㆍ영지 이전되었다. 히데히사는 타카마츠 성(지금의 카가와 현 타카마츠 시)에 본거지를 구축했다.

  아와 주의 슈고 대리직을 세습해온 미요시 씨 출신 소고 마사야스(마고로쿠로)는 '미요시 요시카타'란 이름으로 시코쿠 지방 동부에서 미요시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텐쇼 10년(1582) 아와 북부에서 벌어진 나카토미 강 전투에서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패전하면서 아와 주를 포기, 뒤이어 사누키 주 소고 성(지금의 타카마츠 시)과 토라마루 성(지금의 히가시카가와 시) 등도 모토치카 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오사카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의지했다. 시코쿠 전역에선 히데요시군에 종군, 그 군공을 인정받아 사누키 소고 3만 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고 마고로쿠로'로서의 영지보장으로, 마사야스의 미요시 가문 계승은 부정당하는 양태였다.[6]


  3.4. 이요 주

  토요토미 정권은 다이묘 통제책의 일환으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이요 주 35만 석[3]을 주어 독립된 토요토미 직속 다이묘로 취급했으나, 타카카게는 일단 '모리 가문에 주어진 이요 주를 다시 주군 가문에게서 배령'하는 모양새를 만듦으로써 모리 씨 휘하의 무장, 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코우노 미치나오의 본거지였던 유즈키 성(지금의 에히메 현 마츠야마 시 도고마치)에 입성한 타카카게는 오오즈 성(지금의 오오즈 시)에 조카이자 양아들인 코바야카와 히데카네(=모리 히데카네)를 배치하는 등 이요 주 통치를 개시, 새로운 본거지를 정비하는 한편 코우노 미치나오를 도고에 은거토록 했다. 미치나오에겐 코우노 씨 옛 가신들 뿐만 아니라 사이온지 킨히로와 그 가신들도 신하로서 배속되었다. 그리고 타카카게의 새로운 본거지가 어디었는가를 놓고, 훗날 마츠야마 성이 축성된 마츠야마 시 카츠야마 산이라는 설(카와오카 츠토무)과 마츠야마 시 미츠의 미나토 산성으로 비정하는 설(후지타 타츠오)이 있으며, 양자의 설 모두가 성립하기 힘들다고 지적하는 견해(우치다 쿠스오)도 있기에 소재지를 둘러싼 정설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7]

  그 외, 모리 가문의 외교승인 안코쿠지 에케이에겐 이요 중부 와케 군 내 3만 3천 석이 주어졌고, 무라카미 수군 출신인 쿠루시마 미치후사에게는 이요 중부 카자하야 군 1만 4천 석이, 미치후사의 형 토쿠이 미치유키에겐 3천 석이 주어졌다.[3]

   
  4. 그 후의 추이와 영향

  시코쿠 영토배분에 의해 시코쿠 전토가 토요토미 정권에 편입되었고, 코우노 씨와 사이온지 씨 같은 구세력은 몰락하였다. 한편 시코쿠 평정 직후부터 각지에 토지조사(타이코 토지조사)가 실시되어 다이묘 가문들의 코쿠다카가 확정되었고, 영주들에겐 이를 기준삼아 군역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중세적인 각종 성곽들이 파괴당하고 각지에 근세성곽이 축조되었다. 히데요시의 서일본 평정은 이제 큐슈 지방만을 남겨놓았을 뿐으로,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8]

  새로이 시코쿠에 입부한 오다ㆍ토요토미 계열 다이묘들 / 모리 계열 다이묘들은 양쪽 모두 츄고쿠 지방에 배치된 다이묘들과 함께 '츄고쿠ㆍ시코쿠 집단'으로서 큐슈 정벌의 선진을 맡게 되었다. 이는 재지세력이었던 쵸소카베 씨도 피차일반으로, 베츠키 강 전투에 참전한 모토치카는 적남 노부치카를 잃게 된다. 그러나 쵸소카베 씨 역시도 한편으론 토요토미 정권의 공인하에 다이묘 권력을 강화하면서 근세 다이묘로의 탈각을 도모하였다. 모토치카는 텐쇼 16년 4월(1588년 5월)의 고요제이 텐노 쥬라쿠다이 행차 때 칸파쿠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서약하면서,【 토사 지주 하타 모토치카 】라는 조정의 위계를 받아 다른 여러 다이묘들처럼 토요토미 정권을 구성하는 다이묘 간의 서열을 수용했다.[9]

  그리고 큐슈 평정 후 발령된 큐슈 영토배분은 시코쿠 영토배분과는 달리, 서일본 전역의 평정을 달성한 후에 행해진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시코쿠 영토배분은 큐슈 영토배분에 비해 서일본 평정과정에서 행해진 영지분배였던 관계상 보다 유동적인 요소가 컸고, 영주가 교체되는 경우 역시 잦았다.


  4.1. 토사 주

  큐슈 평정 이후에도 쵸소카베 씨는 텐쇼 18년(1590)의 오다와라 정벌 / 텐쇼 20년(1592) ~ 케이쵸 3년(1598)에 걸친 두 차례의 조선출병에 참가했다. 그 동안 코소카베 치카야스(역주 : 모토치카의 둘째 동생)는 히데요시로부터 수많은 양의 조선용 자재 공출을 명 받았고, 모토치카 본인 역시 대형 선박 수 척의 건조 등을 명 받았다.[10] 군역 등의 다양한 부담 역시 결코 녹록치 않았다.[11] 그런 한편으로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이용, 지배체제의 재편ㆍ토지조사 실시와 함께 케이쵸 2년(1597) 3월에는 4남 쵸소카베 모리치카와 함께 영내법인 <쵸소카베 모토치카 100개조>를 규정하는 등 제 법규의 제정을 포함한 새로운 정책들을 줄줄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모토치카ㆍ모리치카 부자는 본거지를 오코 성(지금의 코치 현 난코쿠 시)에서 오오타카사카 산성(지금의 코치 성), 나중에는 우라토 성(지금의 코치 시)으로 이전하였고, 성하거리의 정비에도 힘을 썼다.[10]


  4.2. 아와 주

  영토배분 당시의 아와 주는 모토치카군이 막 토사로 철수한 직후로, 촌락은 황폐해져 있었고 수많은 농민들 역시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다.[12] 이 상태에서 하치스카 씨가 입부해 오자 입부 직후인 텐쇼 13년(1585) 8월, 이야 산祖谷山ㆍ코야 평지木屋平ㆍ오오아와 산大粟山ㆍ니우 골짜기仁宇谷 등지의 산간부 토호층이 새로운 지배자의 도래에 저항하며 봉기, 토호 잇키가 일어났다.(텐쇼 아와의 토호 잇키) 이에 대해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잇키 가담자들 상대로 철저한 무력진압에 임하는 한편, 재지 유력자들을 상대로 교묘한 회유책을 적시에 채용하는 등 토호층에 대한 분열공작을 도모했다. 한편 이나다 씨ㆍ마스다 씨ㆍ나카무라 씨ㆍ모리 씨 등을 비롯한 오와리 시대 이래의 심복 9명을 영내 요지에 배치, 각각 300명의 병력을 주어 방비를 굳히는 지성주둔제를 시행하며 '아와 9성'을 두었다.


  4.3. 사누키 주

  텐쇼 13년(1585), 시코쿠 영토배분에 따라 사누키 지방의 대부분이 센고쿠 히데히사에게 주어졌으나 히데히사는 약 1년 반만에, 그리고 후임으로 입봉한 비토 토모노부는 반 년도 채우지 못하고, 큐슈 정벌 당시 저지른 군사적 실패를 문책받아 사누키 지방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큐슈 정벌 당시 전사하였던 소고 마사야스의 영지 역시 몰수당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텐쇼 15년(1587), 하리마 주 아코(지금의 효고 현 아코 시) 6만 석 영주였던 이코마 치카마사를 가봉ㆍ영지이전으로 사누키에 입봉시켰는데, 이와 함께 사누키 주의 근세는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게 되었다.[13] 그리고 치카마사 입부 당시의 사누키 지방 코쿠다카는 15만 석 내외로 추정되나, 케이쵸 6년(1601)에는 17만 1800석으로 증가하였다.[14] 치카마사는 텐쇼 16년(1588), 카토 군 노하라쇼(지금의 타카마츠 시)에 니이타카마츠 성(新高松城, 지금의 타카마츠 성) 축성을 개시, 케이쵸 2년(1597)에는 사누키 서부의 거점이 될 마루가메 성(지금의 마루가메 시) 축성에 착수했다.[13]


  4.4. 이요 주

  텐쇼 15년, 큐슈 공격이 완료되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요 주를 반납하고 그 대신 치쿠젠ㆍ치쿠고 주와 히젠 주 내 1군 반을 배령, 치쿠젠 나지마 성(지금의 후쿠오카 시 동구)에 입부했다. 타카카게의 양아들 히데카네는 치쿠고 주 일부를 하사받아 텐쇼 16년에 쿠루메 성(지금의 후쿠오카 현 쿠루메 시)에 입성했다. 코우노 가문 재흥을 숙원으로 삼고 있던 코우노 미치나오는, 타카카게의 영지이전에 수반하여 모리 테루모토의 손녀뻘인 아내의 친정이 있는 아키 주 타케하라(지금의 히로시마 현 타케하라 시)로 옮겨가 그곳에서 죽었다. 과거의 이요 주 토호계층이 이요를 떠나 몰락한 시기가 바로 이 때라 추정된다.[15] 그리고 코우노 미치나오의 병사病死와 사이온지 킨히로의 암살暗殺이 줄이어 일어났다는 점ㆍ코우노 미치나오의 사망 경위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기술(에도 시대 때부터 '처단설生害説' 이 돌고 있었음)에 의거하여, 토요토미 정권이 구세력들을 배제할 목적으로 이 지방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코바야카와 씨를 큐슈 지방으로 이봉시킴과 동시에 옛 영주였던 미치나오와 킨히로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16]

  타카카게가 큐슈로 이봉된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요 동부ㆍ중부를 중심으로 11만 3200석을 하사받음과 동시에 타이코 쿠라이리령(히데요시 직할령) 9만 석의 대관을 겸하여 입부, 이요 남부엔 토다 카츠타카가 본 영지 7만 석에다 타이코 쿠라이리령 10만 석의 대관을 겸해 입부하였다. 그리고 이요 중부 일부는 아와노 히데모치에게 주어졌다. 이요 주의 히데요시 직할령은 도합 19만 석에 달해, 시코쿠 주들 중에선 특출나게 많았다. 이는 시코쿠ㆍ큐슈를 제압하는 요지로서 이요의 땅이 중시되었음을 의미한다.[17]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후 오와리 주 키요스 성(지금의 아이치 현 키요스 시)으로 이봉되고, 후사가 없었던 토다 가문이 카이에키당함에 따라(역주 : 토요토미 히데츠구의 측근이었던 아와노 히데모치는 히데츠구 사건에 연좌, 이요 주에 있던 영지를 빼앗기고 참수당했다), 이요 주에는 오가와 스케타다ㆍ카토 요시아키ㆍ토도 타카토라ㆍ이케다 히데우지가 배치되었다.('보설' 부분의 표를 참조할 것) 그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토지조사를 실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마사노리와 카츠타카 두 사람은 분명 토지조사를 실시하였다.[17]


  5. 보설

  세키가하라 전투에 미친 영향(생략)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시고쿠 지방의 다이묘 배치(생략)


  각주

  1. 이케 스스무  <천하통일과 조선침략>《일본의 시대사 13 천하통일과 조선침략》p.56. 2003년, 요시카와코분칸
  2. 이케가미 유우코《쇼쿠호 정권과 에도 막부(일본의 역사 15)》p.146. 2002년, 코단사
  3. 우치다 쿠스오 <5장 1 이요의 근세화> 코다마 코우타 감수《에히메 현의 역사(현사 38)》p.153. 2003년, 야마카와출판사
  4. 요시무라 사오리 <토요토미기 토사의 여성 영지 -《쵸소카베 토지조사장부》를 중심으로>(初出 : 《카이난 사학》 41호 / 所收 :《시리즈 쇼쿠호 다이묘 연구 제 1권 쵸소카베 모토치카》2014년, 에비스코쇼출판
  5. 토요토미 정권하에선 전국기를 통틀어 지역적인 통합을 실현해온 유력한 센고쿠다이묘들이 다수 존속하고 있었고, 전국정권으로서 광역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직접적 지배가 아닌, 그러한 유력다이묘들이 지닌 역내 영향력에 기대는 경우도 많았다. 타이코 토지조사 당시의 역할들 같은 경우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여기에 대해 이케 스스무는 "토요토미 정권은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과 같은 중앙집권적 체제가 아니며, 권력편성을 볼 때 국가연합 내지 복합국가라 생각하는 쪽이 옳다." 고 지적한 바 있다.(이케 스스무 <천하통일과 타이코의 정치>《크로니클 전국전사》p.488~491. 1995년, 코단사)
  6. 아마노 타다유키 <미요시 씨의 권력기반과 아와 토호>(初出 :《연보 중세사연구》31호(2006년) / 所收 : 아마노《증보판 전국기 미요시 정권 연구》2015년, 세이분도
  7. 우치다 쿠스오 <5장 1 이요의 근세화> 코다마 코우타 감수《에히메 현의 역사(현사 38)》p.155. 2003년, 야마카와출판사
  8. 이케가미 유우코ㆍ이케 스스무ㆍ오와다 테츠오ㆍ코바야시 세이지ㆍ미네기시 스미오 등 편집《크로니클 전국전사》p.486. 1995년, 코단사
  9. 이케가미 유우코《쇼쿠호 정권과 에도 막부(일본의 역사 15)》p.158. 2002년, 코단사
  10. 이치무라 타카오 <4장 3 쵸소카베 씨의 시대> 코다마 코우타 감수《코치 현의 역사(현사 39)》p.156~157. 2001년, 야마카와출판사
  11. 오다와라 정벌 때도 모토치카는 와키자카 야스하루ㆍ카토 요시아키ㆍ쿠키 요시타카 등과 함께 '선박 부대' 를 편성할 것을 명 받은 바 있다.(나카노 히토시 <'카라이리' 와 병참보급체제> 이케 스스무 편집《일본의 시대사 13 천하통일과 조선침략》p.195~197. 2003년. 요시카와 코분칸)
  12. 타카하시 하지메 <5장 1 토쿠시마 번의 성립>《토쿠시마 현의 역사(현사 36)》p.118~120. 2007년, 야마카와출판사
  13. 키하라 히로유키 <4장 1 번의 성립과 정치>《카가와 현의 역사(현사 37)》p.138~140. 1997년, 야마카와출판사
  14. 키하라 히로유키 <4장 1 번의 성립과 정치>《카가와 현의 역사(현사 37)》p.138~140. 1997년, 야마카와출판사
  (원출처는《칸세이쵸슈쇼가후寛政重修諸家譜》)
  15. 우치다 쿠스오 <5장 1 이요의 근세화> 코다마 코우타 감수《에히메 현의 역사(현사 38)》p.156. 2003년, 야마카와출판사
  (원출처는 야마노우치 유즈루《중세 세토 내해 지역사의 연구》(1998))
  16. 니시오 카즈미 <코우노 미치나오의 죽음과 토요토미 정권>(初出 :《마츠야마시노노메여자대학 인문학부 기요》제 10권(2002년) / 改訂所收 : 니시오《전국기의 권력과 혼인》2005년, 세이분도 출판)
  17. 우치다 쿠스오 <5장 1 이요의 근세화> 코다마 코우타 감수《에히메 현의 역사(현사 38)》p.156~158. 2003년, 야마카와출판사


덧글

  • 도연초 2020/08/10 23:26 # 답글

    이요 국에 직할령이 많았던 게 세토내해의 항구들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요충지라면...(시코쿠섬의 산악지대의 길목도 그렇고)
  • 3인칭관찰자 2020/08/11 08:49 #

    히데요시 직할령은 주로 이요 중부 지방이었다더군요. 해안 요충지들을 장악하려 했다기엔 바다에 면한 영지를 받은 무장들이 또 많은지라...
  • ㅇㅇ 2020/08/11 14:46 # 삭제 답글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인물이긴 하네요. 도사지방이 생각보다 코쿠다카가 적은데도 시코쿠 통일직전까지 갔으니.
  • 3인칭관찰자 2020/08/11 16:10 #

    시코쿠 중에서도 촌구석으로 통하던 토사 지방 일부를 다스리는 토호가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죠. 아와 사누키 지방의 내분, 혼노사의 변과 같은 행운도 따라주었지만 일단 모토치카가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은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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