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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막부 말 쵸슈 번長州藩의 군사개혁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160~167쪽의 기사인,《신생 쵸슈군新生長州軍 ~ 사면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직개혁 ~》을 번역한 것으로, 쿠라타 노리아키倉田典昭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총력전 태세로 사면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쵸슈 번

  사면전쟁四境戦争 시기 오오무라가 세운 최대의 공적功績은, 근대적 군사조직近代的軍事組織의 본질을 네덜란드 서적蘭書을 읽고 이해하여 이를 쵸슈 군長州軍을 대상으로 실현시킨 점에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오무라의 역할은 장군將軍 내지 참모參謀보다도 관료官僚 쪽에 더 어울린다 싶다.

  그렇다면 현장 지휘관現場指揮官으로서의 오오무라는 어땠을까.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일컬어지긴 하지만 그 구체적인 싸움방식을 전하는 사료史料는 희소하다. 전장에서 오무라가 남긴 일화逸話는, 전쟁 전체에 빗대어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자잘한 에피소드들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세세한 에피소드 속에 오오무라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마스다益田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때, 하마다 번(浜田藩, 역주 :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6만 1천 석) 병사가 쏜 소탄焼き弾이 민가에 명중해 불이 치솟아오르자 오오무라는 "천하天下를 위한 전투다. 민중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지中止시킨 후 장병들에게 소화消火 작업을 명령했다. 마스다의 시민들은 이 처치에 감격하여, 인심人心이 일거에 쵸슈 군 쪽으로 쏠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서양식 병학자인 오오무라의 이미지와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中国의 병법서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닐까.

  기실《병가가 알아야 할 전투술 입문내용 중, 이 일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책의 <가전街戰> 항목에는【 만약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적의 교의宗旨와 정치国政를 믿으며 시가의 방어에 가담, 광폭ㆍ분격 속에 방어전을 벌인다면 우리의 공격掩擊은 대단히 위태로운 시도가 될 수 있다. 】라며, 주민들이 시가지 방어에 참가한 결과 엄청난 격전으로 발전한 사례로【 이베리아 반도전쟁 】당시의 '사라고사 공방전' 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역으로【 주민들이 전투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데도 시가에 방화放火를 하는 건 최하책最下策이다. 】고 적혀 있다 한다.

  즉 오오무라의 병학 기준으론, 방위 측인 막부군幕府軍 입장에서 마스다 시민들은 반드시 아군味方으로 붙잡아둬야 할 존재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막부군은 민가民家에 불을 지르는 데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마스다에서 철수할 때 쵸슈 군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이로 인해 30여 채의 민가가 소실되었다.

  민가 소방消防에 나서는 쵸슈 군에 감격한 마스다 시민들은 전투 중 일시적으로 고전苦戦하고 있던 쵸슈 장병들에게 술통과 식량을 날라와 대접하며 격려했다 한다. 반면 임금賃金도 주지 않고 농민들을 징발해서 원한을 샀던 막부 측 키슈 번(紀州藩, 역주 : 키이 토쿠가와 가문紀伊徳川家 55만 5천 석) 장병들은, 죽창竹槍을 든 농민들에게 쫓기면서 패주敗走하는 꼴을 보였다.

  오오무라가 주민을 배려한 모습은 쵸슈 군 전체로 침투하였다. 세키슈 방면에 그치지 않고, 쵸슈 군은 전장의 주민들을 상대로 언제나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게이슈 방면에서 생긴 약 1만 명의 피난민避難民들을 위해선 취사炊事까지 해 주었다. 쵸슈 군의 서민병庶民兵들이 그들에게 동정심을 품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게이슈 번(芸州藩, 역주 : 아사노 가문浅野家 42만 6천 석)은 금번의 출병을 사퇴한 번이기에, 쵸슈 번 입장에서 그들은 중립中立 or 절반 정도는 아군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그러한 게이슈 사람들의 민의를 배려配慮하는 건, 뛰어난 전략적 수단이기도 했다. 실제로 게이슈 전선은 쵸슈 번과의 제휴에 나선 게이슈 번이 막부 <-> 쵸슈 양 군 사이를 직접 차단시켜, 전투를 종료하도록 만들었다.

  쵸슈 번은 상시적으로 번 내부에서 사민士民 간의 일체감一体感을 강조하며 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민중民衆의 동향을 의식意識하는 그 모습은 전장戦場이 되어버린 다른 번의 영토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오무라 같은 경우, 그런 모습의 이면엔 서양 병학을 통해 학습한【 국민전쟁国民戦争 】이론理論이 그의 확증을 도왔다.

  물론, 이를 가지고 "오오무라가 사민평등四民平等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속단이다. 마찬가지로 "쵸슈 군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민군国民軍' 이었나?"는 문제도, 더욱 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상시적으로 잇키一揆와 폭동打ちこわし의 위협 속에서 자기들의 배후背後를 경계해야 했던 막부 측에 비한다면, 쵸슈 번의 전략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막부와 초슈 번 사이에는 무기武器 / 전술戰術적으로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그러나 쵸슈 번이 무기와 전술이 우월해서 이겼다고 보는 이해는 정확하지 않다.

  막부 토벌討幕을 위해선 무기와 전술의 혁신革新이 필요하다는 걸 이른 시기에 체감하고, 이를 위해 거번일치挙藩一致의 총력전 태세総力戦態勢를 취할 수 있었기에 쵸슈 번은 승리한 것이다. 그러한 전략적戰略的 차이 앞에선, 단순한 군대의 머릿수는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이렇게 쵸슈 번은 번의 존망存亡을 건 총력전에 멋지게 승리, 그 기세를 몰아 (메이지) 유신維新의 실현을 견인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타나카 아키라田中彰《막부 말기의 쵸슈》(츄오코론샤中央公論社)
  -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清《신판 일본의 군국주의 1》(겐다이효론샤現代評論社)
  - 쿠리하라 류이치栗原隆一《막부 말기 일본의 군제》(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
  - 이토야 토시오絲屋寿雄《오오무라 마스지로》(츄오코론샤)
  - 타나카 소고로田中惣五郎《근대 군제의 창시자 오오무라 마스지로》(치쿠라쇼보千倉書房)
  - 아오야마 타다마사青山忠正《메이지 유신과 국가형성》(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 야토미 쿠마이치로矢富熊一郞《유신 전야 이와미의 전투》(시마네 향토사 모임島根郷土史会)


덧글

  • 無碍子 2020/05/06 09:25 # 답글

    오랭캐의 땅에서는 시골 구석(?)에서도 새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군자의 나라는...............그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날때도 있어요.
  • 3인칭관찰자 2020/05/06 12:44 #

    새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을 포용하여 그 뜻을 펼수 있게 도와줄 토양 내지는 인프라 같은 게 당시 사회에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거 아닌가 싶긴 합니다 ㅜㅜ
  • 담배피는남자 2020/05/06 15:43 # 답글

    베푸는 사람에게 느끼는 호의는 작아도, 빼앗아가는 사람에게 느끼는 적의는 아주 크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 3인칭관찰자 2020/05/06 18:23 #

    열 번 베풀어도 한 번 빼앗은 걸로 지금까지 호감도 쌓아놨던 게 싹 날아가는 경우가 많죠. 호의를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에 비하면 적의를 사는 건 한순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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