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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막부 말 쵸슈 번長州藩의 군사개혁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160~167쪽의 기사인,《신생 쵸슈군新生長州軍 ~ 사면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직개혁 ~》을 번역한 것으로, 쿠라타 노리아키倉田典昭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소부대 전술을 철저화하다

  근대전술近代戦術을 병사들에게 철저徹底히 주입시키기 위해선, 당연히 어떠한 교육 시스템教育システム이 필요해진다.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오오무라大村가 번藩으로부터 위임받은 군사력 근대화軍事力近代化의 일환이 되었다.

  제 부대諸隊는 병사들의 교육기관으로도 기능하고 있었으나, 부대를 지휘指揮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장교士官들에 대한 교육은 보다 조직적組織的으로 행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육군의 장교교육은 번교藩校인 야마구치 메이린칸山口明倫館에 있는 병학 기숙사(兵学寮, 한때 '병학교兵学校' 라 불리기도 했다)에서 행해졌다. 오오무라는 이곳의 교장校長이라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보병 / 기병 / 포병 삼병三兵의 실기훈련과 학과교육을 지도했다. 대 막부전쟁対幕府戦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각 부대의 장교를 단기간에 양성한다는 데 최대의 중점이 놓여, 최단 4개월 만에 소대지휘小隊指揮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장교를 양성한다는 게 목표였다.

  병학교에서 사용된 텍스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병가가 알아야 할 전투술 입문兵家須知戰鬪術門이다. 이는 네덜란드 육군 군인 크노프의 저서 "Kort begrip der krijgkunst(《전쟁술개론》)" 을 오오무라 본인이 직접 번역한 서적이었다.

  이 책은【 미국 독립전쟁 】/ 【 프랑스 혁명 】등을 거치며 확립된 근대전술을 망라한 책으로,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실전사례実戦事例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는 점에 눈이 간다. 클라우제비츠クラウゼビッツ의 이름도 이 책에 등장하긴 하나, 국가 레벨의 전략론戰略論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철저하게 구체적이고, 또 실천적인 전술입문서戦術入門書였다.

  이 책의 구성은, 군대의 편제와 보 / 기 / 포 삼병의 기본적 전술을 기록한 <원소 타쿠치키 편原素答古知畿篇>, 지형 등 각 전장의 상황에 적합한 전술을 소개하는 <적응 타쿠치키 편適応答古知畿篇>, 소부대를 이용한 척후斥候와 파르티찬 전법에 대해 기록한 <소전편小戦篇>, 대규모 회전을 비롯한 전술에서 전략에 걸친 내용을 담은 <온오 타쿠치키 편蘊奥答古知畿篇> 이상 4편으로 나뉘어 있다. '타쿠치키'전술戦術을 의미한다. 오오무라는 이 책으로 병사들을 이론무장理論武裝시키며 번 전체의 전술 통일화를 도모했다.

  그 중에서 사면전쟁의 전쟁국면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속칭 '산병전술散兵戦術'이다.병가가 알아야 할 전투술 입문에 따르면 산병전술이란【 산개대형을 취하여 병사의 진퇴進退와 동작動作을 자유롭게 하고, 차폐물遮蔽物을 이용함으로써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로 사격효과를 높이는 전술 】이다. 그런 반면,【 지휘관의 명령이 즉각즉각 전달되기 힘들어지므로, 병사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싸워나가야만 한다는 결점이 있다. 】고 한다.

  그러나 이는 병사들의 전의戰意가 왕성旺盛할 경우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본래 산병전술이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완수한 것이【 미국 독립전쟁 】시기였다. 독립을 목표로 싸워나간 민병民兵들은 부족한 전투경험戦鬪経験을 산병전술로 메우면서 신대륙新大陸의 황량한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해 영국 군대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전술은 도망이 우려되는 용병傭兵들로 이루어진 군대에선 절대로 실행할 수 없다. 자발적으로 총을 잡고 떨쳐 일어날 기백氣魄을 가진 자에 한해 능란히 소화할 수 있는 전법이라 하겠다. 쵸슈 장병들이 산병전술을 구사해 막부 장병들을 산산히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 드높은 사기士氣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 막부 전쟁에 대비한 무기혁신武器革新도 진행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쵸슈 번은 만엔 원년(1860)에 이미 서양총진 교련敎鍊을 개시한 바 있었는데, 이 때【 게베르 총ゲベール銃 】1천 자루를 구입하였다. 그러나 게베르 총은 라이플링이 되어있지 않은 전장식 활강총으로, 구미에서는 이미 시대에 뒤쳐진 무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였기에 오오무라의 헌책을 받아들여 쵸슈 번이 장비했던 것이 전장식 시조총(라이플링 건)인【 미니에 총ミニエー銃 】이었다.

  케이오 원년(1865) 8월, 쵸슈 번은 나가사키長崎에서 미니에 총 4,300자루 / 게베르 총 3,000자루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의 무기거래를 중개해준 것은 과거의 원수仇敵였던 사츠마 번薩摩藩이었다. 이러한 활동이 쵸슈 번과 사츠마 번 간의 접근을 촉진, 훗날의 삿쵸동맹薩長同盟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시조총의 등장은 그저 단순한 무기혁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전술 그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사정거리가 짧고 명중정밀도가 열악했던 활강총을 사용할 때의 전법으로는 밀집대형에 의한 일제사격一斉射撃과 돌격突撃이 효과적이다. 18세기 유럽에서 완성되기에 이른【 횡대전술横隊戦術 】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정거리와 명중정밀도가 향상된 시조총의 경우는 산개대형을 취한 전법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독립군 측의 민병民兵이 산병전술을 도입한 건, 그들이 평시부터 시조총의 취급에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세한 병력으로 집단을 제압하는 산병전술은 시조총과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그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쵸슈 번의 군제개혁은 미니에 총 도입으로 비로소 완전해졌던 것이다.


  사면전쟁에서 발휘된 쵸슈 군의 근대전술

  그렇다면, 쵸슈 장병들은 실제로 어떻게 싸웠을까?

  쵸슈 군의 병사는 바칸馬関에서 외국 세력과, 교토京都에서 아이즈会津ㆍ사츠마 등과 싸웠고, 번 내부에서 벌어진 내전内戦까지 치른 바 있다. 실전경험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향토를 지키겠다는 의기가 왕성했다. 전장 지형 같은 건 애초부터 조사가 끝났고, 츠츠소데(筒袖, 통소매옷) + 호소바카마(細袴, 통 좁은 활동용 바지)란 차림의 경쾌한 복장으로 전장을 뛰어다닐 수 있었다.

  반면 막부군 병사들 쪽은 실전경험이 전무했다. 먼 곳에서 원정을 오다 보니 지리地理에도 어둡다. 일부 서양식 병력을 제외하면, 갑주甲胄를 착용한 채로 비지땀을 흘리며 한여름의 땡볕炎天下을 행군해야 했다. 거기다 덤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조차 정확히 자각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후쿠야마 번(福山藩, 역주 : 아베 가문阿部家 11만 석)의 어느 무사가 적은 편지가 쵸슈 병사의 싸움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 초목 그늘 / 가옥 등에 모습을 숨기고 사격射撃하며, 신체를 노출하지 않는다. 초연硝煙에 의해 위치가 들통날 것을 경계하여 한 장소에서 절대 두 발 이상을 쏘지 않고, 사격을 할 때마다 위치를 바꾸었다. 병사들이 산개하여 사격하므로 실제보다도 더 다수인 것처럼 보인다. 산을 뜀박질해 오른다 생각하면 또 달려 내려가고, 지붕 위에서 사격했다 싶으면 순식간에 뛰어 내려가는 등, 마치 원숭이猿를 보는 듯했다. 】

  쵸슈 군의 새로운 전술 앞에 속을 썩이는 모습이 대단히 잘 표현되어 있다. 오오무라가 지도한 산병전술은 멋지게 주효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술이 쵸슈 군의 말단까지 침투하면서 각 전선에서 막부군을 농락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위의 후쿠야마 번 무사는【 이제 와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고 한탄하고 있다. '좀 더 일찍 서양총진을 도입했어야 했다'는 말일까. 아무래도 실제로 그 위력威力을 목도하기 전까진 봉건무사封建武士들의 의식을 변혁変革시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쵸슈 번이 이른 시기에 근대 화력의 세례를 받았던 건, 결과적으로 볼 때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대部隊' 로서의 쵸슈 군의 싸움을 보도록 하자.

  우선 번 전체로서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번 정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것도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 /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 / 야마다 우에몬山田宇右衛門 등을 비롯한 번 정부 중진重鎮에 의한 합의제合意制로, 전권을 장악한 최고사령관最高司令官이 있었던 건 아니다.

  "돌연히 표무대에 나타난 오오무라가 전군의 사령관이 되어 사면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미지가 존재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군제개혁에 한해선 오오무라가 최고책임자이긴 했지만 실제 전쟁에서 오오무라는 어디까지나 세키슈 방면(石州口, 역주 : 이와미石見 전선)의 지휘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키슈 쪽은 굳이 말하자면 가장 마이너한 전선이었다. 오오무라는 군사전문가로서 전략 전반에 대해 의견구신意見具申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100% 채용된 것은 아니었다.

  오오무라가 출진한 세키슈 방면에선 막부 군을 마스다益田에서 내쫓은 후, 정전상태가 계속된 채로 7월을 맞이했다. "게이슈 방면(芸州口, 역주 : 아키安芸 전선)의 상황과 연계하기 위해, 하마다 성浜田城 공격은 일단 보류하라."는 번 정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7월에 접어들어 오오무라는【 속히 지령을 내려주길 바란다. 】며, 새로운 명령을 재촉하는 편지를 번 정부에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눌러 놓기만 해서 대단히 곤혹스럽다. 】고 기록하였다. 하마다 공격을 결정할 권리는 어디까지나 번 정부에 있었고, 오오무라 자신은 단독으로 이러한 전략을 결정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는 걸,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한편으로 현장의 전술 레벨 문제는 그 방면에 일임되었다. 가문의 격식을 존중하여 임명한 '지휘역指揮役'이 각 방면의 지휘관이 되고, 각 부대는 개별적으로 그 밑에 배속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지휘역의 존재는 명목상에 그쳤고, 실제로 지휘를 맡은 건 보좌역補佐役으로 붙여진 실무자들이었다.

  고쿠라 방면(小倉口, 역주 : 부젠豊前 전선)에선 키헤이타이 총독 야마노우치 우메사부로山内梅三郎가 '바칸 방면 해륙군 제병 지휘역'에 임명되었다. 타카스기 신사쿠는 말하자면 그 부관副官인 '바칸 방면 해륙군 참모'에 불과했으나, 사실상의 지휘관으로서 부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키헤이타이 군감軍監인 야마가타 쿄스케(山県狂介, 아리토모有朋)가 타카스기를 보좌했다.

  게이슈 방면의 정면인 오제 하구小瀬川口에선 유게키타이 총독遊撃隊総督 모리 이쿠노신毛利幾之進이 지휘역을 맡고, 유게키타이 부총독 카와세 야스시로河瀬安四郞가 참모 지위에 앉아서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했다.

  세키슈 방면의 지휘역은 키요스에 번(清末藩, 쵸슈의 지번支藩) 번주인 모리 모토즈미毛利元純였으나, 실질적인 지휘관은 참모로 붙여진 오오무라 마스지로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력부대는 제 부대 중 하나인 난엔타이南園隊였다.

  말하자면 '총사령부'인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번 정부 아래, 작전지휘ㆍ전투부대의 중핵인 제 부대가 속칭 '방면군方面軍'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 방면의 병력은 사실상 제 부대의 지휘하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지극히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휘명령계통 아래, 제 부대가 쵸슈 군의 주류를 구성하며 기능을 수행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한 지휘계통은 각 방면의 연대작전도 용이하게 만들었다. 각 방면의 상황은 즉각적으로 번 정부에 전해졌고, 거기에서 또 다른 방면을 향해 소식이 전달되었다. 번 정부는 물론이요, 각 방면의 지휘관들도 가만히 앉아서 전반적인 전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병력의 정예함에 그치지 않고, 근대성을 지닌 군사기구를 갖추었던 점도 제 부대, 나아가서는 쵸슈 군의 승리를 지탱해준 커다란 요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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