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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막부 말 쵸슈 번長州藩의 군사개혁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160~167쪽의 기사인,《신생 쵸슈군新生長州軍 ~ 사면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직개혁 ~》을 번역한 것으로, 쿠라타 노리아키倉田典昭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근대적 군대로 발전한 제 부대

  본래 번藩의 정규군正規軍을 보조하기 위해 편성된 '제 부대諸隊'도 이윽고 그 군사력에서 정규군을 능가해, 사면전쟁四境戦争에 이르러선 쵸슈 군長州軍의 중핵中核으로서 활약하기에 이르렀다.

  그 강력함의 비결 중 하나는, '뜻 있는 사람有志の者' 들로 구성된 만큼 사기士氣가 높았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신분身分의 차이를 넘어 널리 실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였다는 점도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이렇게 제 부대가 신분을 초월해 조직된 건, 군사적으로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일시적으로 발달하였던 화기 집단운용전법火器集団運用戦法은, 에도 시대江戸時代로 접어들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일본의 병기兵器 / 전술戰術 분야 암흑시대라 할 수 있었던 이 시기, 서구에선 보병步兵 / 기병騎兵 / 포병砲兵으로 구성된 삼병전술三兵戰術을 위시한 전술혁신戰術革新이 진척되고 있었다. 막부 말기幕末에 이르러서야 겨우 서양병학 도입을 시작한 일본은, 유럽이 수백 년에 걸쳐 도입한 병기적ㆍ전술적 변천을 고작 수십 년 사이에 경험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앞에서 언급한 【 아편전쟁 】, 그리고【 페리 내항 】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서양총진西洋銃陣의 도입을 도모하던 쵸슈 번을 비롯한 수많은 번들은, 상급무사 계급上士階級의 저항에 부딪혔다. "총기는 아시가루(足軽, 역주 : 최하급 보졸)의 무기다." 란 의식이 침투해 있던 탓이기도 하나, 여기에 대해선 조금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서양식 근대전술은 병사의 운동에서부터 사격동작에 이르기까지 지휘관의 명령 아래 일사불란히 통일統一된 운용을 요구한다. 개인적 기량技量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부대部隊를 운용함으로써 적을 압도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부대를 구성하는 병사兵士는 지휘관指揮官을 제외하면 모두가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는 신분身分이라든가 / 가문의 격식家格이라든가 하는 게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검술 / 창술 같은 개인기個人技야말로 전쟁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던 무사들에게, 명령 아래 집단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태였을 것이다. 봉건적封建的인 무사단武士団은 애초에 근대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쵸슈 번은 만엔 원년(1860)에 이미 대대적으로 서양총진 교련을 개시했으나, 이 떄는 아직 개혁改革의 취지가 번 무사들 전체에 침투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그 점에선, 신분을 묻지 않는 제 부대 쪽이 총병부대 편성에 대한 저항감抵抗感이 적었다. 제 부대에는 근대적인 군대가 될 수 있는 싹이 당초부터 존재했던 것이다.그리고 지휘명령계통指揮命令系統이란 점에서도 제 부대에겐 볼 만한 부분이 있었다.

  키헤이타이와 충돌사건을 일으킨 걸로 알려져 있는 쵸슈 가신단들의 센보우타이(先鋒隊, 훗날의 選鋒隊)에는 부대 사령관이 부재했으며, 부대원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로쥬老中의 지휘를 받는 식이었다.

  반면, 키헤이타이 결성과 함께 타카스기가 작성한 군령 제 1조는【 사령관이 되는 총독總督 = 총관 밑에 오장伍長을 두고, 그 밑에 대원隊士을 둔다. 】는, 지휘계통을 구성한다는 점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오합지중烏合の衆' 이었던 키헤이타이를 상대로 엄격한 군기軍紀를 잡기 위한 면도 있었을 터이나, 이(지휘계통)는 근대의 군대로선 당연히 갖춰야 할 면모였다.

  그러나 제 부대가 진정한 서구식 군대로 탈피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련을 헤쳐나갈 필요가 있었다.

  겐지 원년(1864)에 내습한 4개국 연합함대(4カ国連合艦隊, 영국 / 미국 / 프랑스 /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선, 작년의 전투에 이어 이번에도 무력함을 증명하고 만 번 정규병에 비해 이번이 첫 출진이었던 키헤이타이는 선전善戰한 축에 들었다고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활과 창 등을 포함한 장비를 갖고서 서양 열강의 군대에 이길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쵸슈 번은 이 전쟁에 의해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함과 동시에, 군사조직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는 금문의 변禁門の変과 뒤이은 막부의 제 1차 세이쵸 전역(第一次征長の役, 역주 : 제 1차 쵸슈 정벌), 그리고 대외적對外的인 위기 속에서, 이번엔 제 부대를 향해 내정상内政上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제 부대 편에 섰던 정의파(正義派, 급진急進ㆍ존왕양이파尊攘派)가 실각하고 속론파(俗論派, 보수保守ㆍ막부 옹호파佐幕派)가 집권한 것이다. 이제 제 부대도 탄압을 받게 되어, 결국 해산명령解散命令까지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제 부대는 속론파에 대항하여【 강한 100만 명이 상대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나, 약한 민초는 한 사람이 상대일지라도 두려워하는 것이 무도武道의 본의입니다. 】같은 내용이 적힌 규칙規則을 제정, 부대 내隊內의 단결의식을 높이려 했다. 여기에는 민중의 지지를 원하는 자세가 확연히 감지된다.

  이윽고 타카스기가 바칸에서 거병挙兵, 제 부대를 이끌고 속론파를 쓸어냈다. 이 쿠데타クーデター가 성공한 건 제 부대의 무력武力이 번 정규군을 압도하였을 뿐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민중들로부터 강력한 지지支持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번 정권을 탈환한 정의파는 번의 방침을【 무장공순武裝恭順 】으로 통일했다. "대외적으로는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내비치나, 그 내부에선 막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군비를 갖춰나가는 태세를 취한다." 는 것이였다. 안세이 년간 이래 분주하게 계속되어 왔던 쵸슈 번의 군제개혁軍制改革은, 이윽고 다가올 대 막부전쟁을 위해 더욱 더 철저히 진척된다.


  군사조직의 재편

  과거 양이 아래 단결했던 쵸슈 번은, 이번엔 막부 타도討幕를 목적으로 거번일치挙藩一致의 태세를 정비했다. 이 시점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다. 본래 마을 의사村医者 출신이었던 오오무라가 쵸슈 번 무사長州藩士로 발탁되기에 이른 건 난학蘭学, 그 중에서도 서양 병학西洋兵学에 대한 지식知識을 갖고 있다는 점을 평가받은 것이었다. 네덜란드 서적 번역蘭書翻訳과 병학 교수兵学教授 등의 수수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던 오오무라는, 번 권력 강화를 지향하던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의 인도에 의해 번 정치의 중핵인물로 발탁拔擢되었다. 이후, 대 막부전쟁을 위한 번 군사력의 근대화 작업이 오오무라에게 일임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 부대에는 서양식 총병부대 편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 토양이 존재했지만, 타카스기 본인이 그런 것까지 내다보고서 키헤이타이를 편성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대적 군대의 본질을 이른 시기부터 이해하고 제 부대를 포함한 쵸슈 번 군사조직 전체에 이를 철저히 관철시킨 사람이 이 오오무라였다.

  오오무라는 번의 군제를 서양식 총병부대로 통일하기 위해 정규군正規軍을 구성하는 가신단의 일대 재편성을 도모했다. 종래의 군역軍役에 포함되어 있던 조리토리(草履取り, 역주 : 주인의 짚신을 들고 다니는 하인) / 야리모치(槍持ち, 역주 : 주인의 창을 들고 다니는 하인) / 하자미바코모치(狭箱取り, 역주 : 주인의 짐을 지고 다니는 하인) 등을 군역에서 제외하고 주인으로부터 분리시킨 후, 그 모두를 총병보졸銃卒로 통일시켜 부대를 편성한 것이다. 반면 그들의 주인이었던 무사에겐 "단기單騎로 활동하라." 즉 단독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봉건적 신분제封建的身分制에 기반한 가신단은, 이를 계기로 실질적으로 해체당하게 된다.

  농병대農兵隊 쪽에도 대규모 재편성이 실시되었다. 번이 군사훈련권軍事訓鍊権을 장악해 이를 실시하게 되었고, 그 이외의 사적私的 군사훈련은 금지禁止되었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러 과거와 같이 자유로운 부대 결성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두는 번의 권력 아래 군사력을 일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 부대 / 농병대 / 가신단 / 지번支藩의 병력에 이르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죄다 총병부대로 편성되었고, 번 정부의 지휘명령계통 아래 통일되었다.

  키헤이타이를 위시한 제 부대는 한때 '정병正兵' 인 가신단과 대조되는 '기병奇兵' 이었으나, 이 단계에 들어서는 그들이 번의 정규병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가신단 중에서도, 종래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아시가루 / 츄겐(中間, 역주 : 무사의 하인) 등이 주요한 군사력軍事力으로서 기대를 받게 되는 한편, 막번체제를 군사적으로 지탱하는 존재로 여겨져야 했을 무사들은 사실상 그 군사적 기능을 상실당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군제개혁을 밀어붙인 이상, 필연적으로 막번체제幕藩体制를 부정하는 길로 내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쵸슈 번이 이렇게나 철저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서양 열강에게 압도적 화력세례를 받은 영향이 지대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번이라는 사고의 영역을 탈각할 수 있었던 카츠라 코고로 등의 리더십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결코 쵸슈 번만이 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던 건 아니었다. 분큐 2년(1862)에 들어 막부幕府도 군제개혁에 착수해 새로이 신설된 육군봉행陸軍奉行 아래 보병 / 기병 / 포병으로 구성된 삼병三兵이 편성되었다. 막부의 개혁 역시 결코 시대에 뒤쳐진 것이 아니었으나, 표면적으로는 그래도 내실을 보면 쵸슈 번과의 격차가 컸다.

  막부 삼병의 주력부대인 보병집단은 하타모토(旗本, 역주 : 500석 이상 ~ 1만 석 미만 녹봉을 받는 막부의 직속 신하)의 영지에서 징발된 농민農民들로 충당되어 편성되었고, 그 부족분은 에도 시중의 실업자失業者들을 고용하여 메웠다. 말하자면 절반 정도는 용병傭兵이었고, 절반 정도는 단순한 노역부담으로 동원된 자들이었다. 막부의 직할병력이라곤 해도 본래 영주와의 주종관계主従関係조차 청산清算되지 못하였던, 지극히 애매한 성격을 지녔다. 물론, 자기가 원해서 총을 잡게 된 것도 아니다.

  막부가 쵸슈 번 같은 철저한 서양식 군대로 탈피하게 된 건, 사면전쟁에서의 패전을 교훈삼아 실시된 케이오 군제개혁 이후였다. 아직 위기를 체감하지 못했던 이 때의 막부에겐 근본적인 군제개혁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케이오의 개혁도 완성되기에 앞서, 막부 자체가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별지) 쵸슈 번의 주요 제 부대들의 변천(역주 : 이미지를 찍기 곤란해 글로 대체합니다)

  - 키헤이타이奇兵隊 : 분큐 3년(1863) 6월 7일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미타테타이御楯隊 : 겐지 원년(1864) 8월 15일 편성 -> 1867년 코우죠타이와 합쳐져 세이부타이整武隊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코우죠타이鴻城隊 : 케이오 원년(1865) 1월 10일 편성 -> 1867년 미타테타이와 합쳐져 세이부타이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유게키타이遊撃隊 : 분큐 3년(1863) 10월 10일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난엔타이南園隊 : 겐지 원년(1864) 8월 28일 편성 -> 1867년 기쇼타이와 합쳐져 신부타이振武隊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하기노타이荻野隊 : 분큐 3년(1863) 6월 편성 -> 1864년 '기쇼타이' 로 개칭. 1867년 난엔타이와 합쳐져 신부타이로 유신까지 존속.
  - 요쵸타이膺懲隊 : 분큐 3년(1863) 7월 편성 -> 1866년 다이니키헤이타이와 합쳐져 켄부타이健武隊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다이니키헤이타이第二奇兵隊 : 케이오 원년(1865) 1월 편성 -> 1866년 요쵸타이와 합쳐져 켄부타이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하치만타이八幡隊 : 분큐 3년(1863) 12월 9일 편성 -> 1866년 슈기타이와 합쳐져 에이부타이隊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슈기타이集義隊 : 분큐 3년(1863) 10월 4일 편성 -> 1866년 하치만타이와 합쳐서 에이부타이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기유우타이義勇隊 : 분큐 3년(1863) 10월 7일 편성 -> 1867년 해산됨.
  - 호코쿠타이報国隊 : 겐지 원년(1864) 1월 가을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코부타이浩武隊 : 겐지 원년(1864)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칸죠타이干城 : 케이오 원년(1865) 1월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 이신단維新団 : 케이오 2년(1866) 6월 편성 ->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

  처음엔 지원자들의 집단이었던 쵸슈 번의 제 부대도 오오무라의 군제개혁에 의해 정규군과 동격에 놓여, 사면전쟁의 주력이 되어 활약했다. 한편으로 칸죠타이 같이 가신단家臣団을 재편성하여 만든 부대는 전력으로서 기대받지를 못하여, 후방後方에 배치되었다. 위의 제 부대들 중 몇몇은 케이오 2년(1866)의 개편작업에 의해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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