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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막부 말 쵸슈 번長州藩의 군사개혁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3호(2002년 6월호) 160~167쪽의 기사인,《신생 쵸슈군新生長州軍 ~ 사면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직개혁 ~》을 번역한 것으로, 쿠라타 노리아키倉田典昭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유신의 발화점, 사면전쟁四境戦争

  양이攘夷라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며, 승산勝算도 없는 폭발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던 막부 말幕末의 쵸슈 번長州藩이 최초로 거둔 승리가 사면전쟁四境戦争이었다. 그 결과 막부幕府의 권위가 실추되어 유신維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이는 유신사維新史에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면전쟁은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같은 '천재적인 전략가'의 활약에 의해 쵸슈 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쵸슈를 포위한 막부군은 총 병력 10만 명이었던데 비해, 쵸슈 군은 고작 4천 명에 불과했다. 병사의 수만 비교하자면 쵸슈 번에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리라. 압도적인 병력차이를 극복한 승리의 이유를 영웅英雄의 존재에서 찾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歴史는 소설小説처럼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다.

  쵸슈 번 입장에서 사면전쟁은 그야말로 총력전総力戦이었고, 일종의 국민전쟁国民戦争이었다. 전장에 선 한 줌 영웅들의 활약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무모無謀하다고 느껴질 만한 일련의 싸움 이면에는 번 전체를 동원한 군비혁신軍備革新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 개혁改革의 성과야말로 사면전쟁의 결말을 좌우한 커다란 요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면전쟁 】은 쵸슈 번 측의 호칭이다. 네 방면에서 막부군을 요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막부 측의 입장에선【 제 2차 세이쵸 전역第二次征長の役 】내지는【 제 2차 쵸슈 정벌第二次長州征伐 】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막부ㆍ쵸슈 전쟁幕長戰爭 】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이 논고에선【 사면전쟁 】호칭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양이에 의한 제 부대諸隊의 편성

  쵸슈 번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역시【 양이 】일 것이다. 쵸슈 번에서 양이열이 고조된 원인 중 한 가지는, 그 지리적 조건에 있었다. 혼슈本州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하여 삼면으로 바다를 끼고 있던 쵸슈 번이 외국 함선의 내항來航 앞에서 체감할 위기의식危機意識은, 다른 번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아편전쟁アヘン戦争 】의 소식은 쵸슈 번의 해방론海防論에 불을 붙이는 커다란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감이 현실現実의 문제가 되어 등장한 것이【 페리 내항ペリー来航 】이었다.

  이 때 오오모리大森 경비를 명 받고 있던 쵸슈 번은 단시간만에 500여 명의 무장병을 동원완료시켜, 그 진용은 다른 번들로부터 상찬賞讚의 대상이 되었다. 갑주甲胄 + 화승총火縄銃이라는 무장은 현실의 위기에 유효하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했을 터이나, 화재 진화용 복장으로 쿠로후네黒船에 저항하려 했던 막부와 비교한다면 그 의식수준은 커다란 차이가 났다고 하겠다.

  쵸슈 번은 이를 계기로 양이를 번 내에 더욱 어필함과 동시에, 더욱 더 군비를 혁신시키기 위해 매진했다.

  다른 번에 비하면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는 쵸슈 번의 군비도 서양 열강 앞에서는 명함조차 내밀 수 없었다. 막부가 양이결행일로 결정했던 분큐 3년(1863) 5월 10일, 쵸슈 번은 바칸(馬関, 시모노세키下関)에서 외국 함선을 향해 포격砲擊, 단독으로 양이전쟁攘夷戦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바칸은 순식간에 미국ㆍ프랑스 군함軍艦의 보복공격報復攻撃을 받아, 해안포대海岸砲台들은 철저하게 파괴破壊되었다. 압도적 화력火力 앞에서, 태평세월에 익숙해져 있던 무사武士들의 무력無力함이 민중民衆들에게 폭로暴露당하는 결말을 맞은 것이다.【 상인町人 / 농민百姓들조차, "무사라는 자들이 저 정도로 약하고 쓸모없을 줄 몰랐다."며 모두가 크게 이를 갈았다. 】고 할 정도였다.

  이 때, '무사에게는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타카스기 신사쿠가 신분身分을 가리지 않고 뜻 있는 사람有志들을 모아 '키헤이타이奇兵隊'를 결성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키헤이타이에 참가하는 자들은 순식간에 불어나, 그해 연말에 이르러서는 300명에 달했다. 키헤이타이에 이어서 요쵸타이膺懲隊 / 유게키타이遊撃隊 / 미타테타이御楯隊 등이 줄이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번의 정규군正規軍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제 부대諸隊'라 불렸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농민계급農民階級 등에서도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농민 유지들은 양이를 위해 협력하겠다는 뜻을 청원한【 농병취립취의서農兵聚立趣意書 】를 제출했고, 농민들이 결성한 쿄유타이鄕勇隊 / 상인들이 결성한 시유타이市勇隊 /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소게키타이狙撃隊 등의 농민 / 상인들의 부대가 각지에서 속속들이 조직되었다. 이들에게도 '타이隊'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상비군常備軍 신분이었던 '제 부대'와는 성격이 또 다른 민병조직民兵組織이었다.

  해방海防을 목적으로 서민병庶民兵을 조직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는 아편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던 시기부터 존재했던, 딱히 특이한 논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쵸슈 번엔 농병론農兵論적 전통이라고 할 만한 유습이 있어, 일부一部이긴 하나 농민병 발탁은 키헤이타이 결성 이전부터 이미 진전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페리 내항 이후 번이 강조해온 위기의식은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었다. 번의 상층과 하층이 이러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무장조직화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막부에선 이 당시, 농민을 병사로 발탁했다간 "일부는 강도强盜의 무리가 되어, 결국은 '국난의 근본国乱の基' 이 될 것이다."는 의구疑懼 섞인 의견도 나왔을 정도였으니, 그 의식적 차이는 명백했다 하겠다.

  바칸에서 외국 함선을 포격한 후, 하기 성萩城 근처 키쿠가하마 해변菊ヶ浜에는 쿠로후네 내항에 대비하기 위한 포대台場가 구축되었다. 이 때 무사들은 물론, 아시가루足軽 / 농민 / 승려 / 부녀자婦女子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여기에 참가, 엄청난 성황리에 공사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구경꾼들까지 쇄도하는 바람에, 공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들의 출입을 금지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포대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이곳은 '여자 포대女台場'란 통칭으로 불린다. 물론 여성들만이 쌓은 포대는 아니며, 무사의 아내나 하녀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공사작업을 거들었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라 한다. 어쨌든 남녀노소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협력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민중 무장화와 동시에, 그들의 총동원을 도모함으로써 쵸슈 번은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별지) 키헤이타이의 구성(역주 : 이미지를 찍기 곤란해 글로 대체합니다)

  키헤이타이 총원 622명 중 신분불명인 63명은 통계에서 제외됨.

  무사 272명(48.6%) / 농민 237명(42.4%) / 상인 25명(4.5%) / 승려ㆍ신관 25명(4.5%) = 총 559명

  '제 부대'의 대표라 할 만한 키헤이타이 대원의 신분구성과 비율은 위와 같다. 과반 이상이 농민農民을 위시한 서민庶民들로, 종래 무사들만으로 구성되었던 가신단家臣団과는 커다란 차이가 났다는 게 일목요연一目瞭然히 드러난다. 다른 제 부대들도 키헤이타이와 마찬가지로 과반수 이상이 서민계층이었다. 일종의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쵸슈 번 민중의 위기의식이 이와 같은 사민 혼성부대士民混成部隊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제 부대에 참가한 무사 / 농민 대다수는 상속권相続権이 없는 차남, 3남 이하 자식들이었다. 무사들 중에는 흔히 말하는 '하급무사下士'가 많았으나, 농민 쪽은 비교적 유복裕福한 상류ㆍ중류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로 본 도표는《쵸슈 번 키헤이타이 명감》을 분석한 코바야시 시게루小林茂 씨의 연구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다.


덧글

  • BigTrain 2020/05/02 23:25 # 답글

    신센구미도 하급무사와 농민계층이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별 생각없이 단편적인 지식으로 남아 있었는데 기병대의 구성과 유사한 걸 보니 기병대만큼이나 신센구미도 초기엔 이질적인 조직이었겠구나싶습니다. 결국엔 막부군 체제에 통합되는 길을 선택했지만.
  • 3인칭관찰자 2020/05/03 01:00 #

    진영은 다르지만, 능력과 야망이 있음에도 신분 제약 속에 허덕이던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줘서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또 그만큼 두드러진 실적을 거두어 역사에 남았다는 점에선 막부 말을 대표하는 집단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

    그러고 보면 막부 말엔 상급무사가 주축이 되어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경우가 상당히 드물지요. 세습제의 폐단으로 인해 인재풀이 열화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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