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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사나다 유키무라의 편지 (下) 역사



  이 글은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奮迅 真田幸村P.64 ~ 68에 수록된, 역사학자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역주 : 오케하자마 전투 기습설을 최초로 부정하신 걸로 유명한) 님께서 집필하신, <편지로 보는 사나다 유키무라의 실상 - 여생을 전쟁에 걸었던 사나이의 심정> 을 번역한 글입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뜬세상 속에서 농락당하는 유키무라

  조용히 유배지에서 죽어갈 운명이었던 유키무라의 거처에 히데요시秀吉의 아들ㆍ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보낸 사자使者가 찾아온 건 케이쵸 19년(1614) 가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오사카 성에 거주하던 히데요리는, 텐카비토天下人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상황에 있었다. 병력적으로도 한참 열세했을 뿐 아니라 상급지휘관上級指揮官이 턱없이 부족하던 오사카 측이, 세키가하라関ヶ原 당시 마사유키昌幸와 함께 이에야스에게 통한의 일격을 먹였던 유키무라를 초빙하려 한 건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측은 착수금으로 황금 200매 / 은 30관을 건네주며, 그를 다이묘大名로 만들어주겠다고도 약속하였다. 인생의 기로岐路에 선 유키무라는 오사카 성에 입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써 유키무라 대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사카에 입성하여 6천 병사를 지휘하게 된 유키무라는 성 남쪽 타마즈쿠리玉造 방면 외곽에 있는 대지에다 외곽 요새出丸를 구축하고 이곳에 농성했다. 이곳이 바로 '사나다마루真田丸' 로, 케이쵸 19년(1614) 11월, 드디어 오사카 겨울 전쟁大坂冬の陣이 시작되었다.

  12월 4일, 유키무라는 사나다마루로 쇄도한 토쿠가와 측의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 등이 지휘하던 군대에 엄청난 손해를 입혀 격퇴시켰다. 겨울 전쟁에서 벌어진 유일한 대전투였던 이 싸움의 승리로 유키무라의 명성名声은 일거에 급등했다. 반면 오사카 성을 강공强攻으로 함락시키기는 불리하다는 걸 확인한 이에야스는 12월 19일 강화講和를 체결한 후, 이에 편승하여 오사카 측의 바깥 해자를 강경하게 매립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케이쵸 20년(1615) 1월 24일, 오사카 성 내에 있던 유키무라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누나 무라마츠村松에게 편지(《오야마다 문서小山田文書》수록)를 보냈다.

 【 이번엔 예상치 못한 전쟁이 벌어졌고, 저 자신도 거기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시겠죠. 뭐 어쨌든 싸움은 끝났고 저도 살아남았습니다. 만나뵙고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 현재는 별 일 없이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답게 가나를 많이 구사한 부드러운 문장을 통해, 적 측에 가담하게 된 행위를 사죄하고 어떻게든 누이의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한 배려를 하는 걸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내일은 어떻게 될지 예단할 수 없다." 는 구절을 보면 이에야스의 배신행위에 의해 재전 기운이 성 내에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도 감지할 수 있다.

  이어서 2월 10일, 유키무라는 딸 '스에' 의 남편인 시나노 나가쿠보주쿠信濃長久保宿의 향토무사鄕士ㆍ이시아이 쥬조 미치사다石合十蔵道定에게 편지를 보냈다.

 【 이쪽이 농성해버린 이상, 운명運命은 피할 수 없겠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할 것 같네. '스에' 가 아무리 눈에 차지 않게 되더라도, 버리는 일은 없기를 부탁한다. 】

  적장의 자식이 되어버린 딸의 장래가 걱정되었던 것이리라.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심정이 시대를 넘어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하겠다.

  3월 19일, 유키무라는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 / 유키토모之知 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오야마다 문서》수록)

 【 제 일신에 한하면 도노사마(殿様, 히데요리) 님은 한량없을 정도로 제게 친근하게 대해주시며, 많은 배려를 받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리기엔 직접 뵙지 않는 이상은 설명드리기가 힘들며, 도저히 편지로는 담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쪽의 근황은 사자로 보낸 자가 직접 말씀을 올리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올 한 해가 평온히 지나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만나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운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군요. 앞으로는 저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다이묘의 아들로 자라난 혈통 + 겨울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유키무라는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지만, 신참자 출신으로 급속한 두각을 드러낸 그에게 오사카 성 내에서의 생활은 편치만은 않은 나날이었으리라. 매형 시게마사 / 조카 유키토모에게 유키무라는 이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올 한 해가 평온히 지나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만나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는 구절을 보면 안정된 노후를 바라는 남모르는 기대심리도 묻어져 나오지만, 동시에 그는 그러한 정세가 실현되는 걸 바라기 힘들며, 전투가 언제 재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숨기고 있지 않다. 오사카 쪽은 다시 군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하나, 그들이 열세에 놓였다는 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올 한 해가 평온히 지나갈 수만 있다면..." 이라고 유키무라는 편지에 기술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4월 27일, 오사카 측이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大和郡山城으로 진군해 토쿠가와 측의 츠츠이 마사츠구筒井正次를 공격하여, 오사카 여름 전쟁大坂夏の陣이 개시되었다. 양군의 주력부대는 5월 6일, 오사카 성 남쪽 평야에서 충돌하였다. 유키무라는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부대에게 일격一擊을 가했으나, 오사카 측 무장들이 줄줄이 전사戰死하는 가운데 전군은 오사카로 퇴각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7일, 여름 전쟁 최종결전이 오사카 성 밖 남쪽 편에서 벌어졌다. 이날 새벽 챠우스 산茶臼山에 포진한 사나다 군은 진격을 개시하여, 토쿠가와 여러 부대의 허점을 찌른 후 이에야스의 본진本陣으로 쇄도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본진의 하타모토旗本들은 자신들이 후방後方에 포진해 있는 사이에 전투가 끝나, 공명功名을 세울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던 그들에게 수많은 수라장修羅場을 경험해 온 로닌浪人들을 주력으로 둔 사나다 군이 돌진하여, 이에야스의 본진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때의 상황은 수많은 사료史料에 기록되었지만, 이제부터 인용할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황보고 편지(《후편 사츠마 번 구기잡록後編薩藩旧記雑録》수록)가 가장 유명하다.

 【 5월 7일, 오오고쇼(大御所, 이에야스)의 본진에 사나다 사에몬이 돌격, 하타모토를 쫓아 흩어버리고 종횡무진으로 베어넘겼다. 3리 이상 도망친 자들만이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그러나 병력적으로 열세한 사나다 군은 시간경과에 따라 구원하러 달려온 토쿠가와 측 부대들에게 포위당하여 궤멸潰滅했고, 유키무라 본인도 부상과 피로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 군의 모 화승총병 지휘관鉄砲頭에게 죽음을 당했다. 향년 49세.


  '노쇠로 인해 초조해하던 초로의 사내' 가 바로 유키무라의 실상이었다

  유키무라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오사카 전쟁에 이르는 15년 동안 - 34세에서 48세까지의, 한창 활동적으로 일할 시기다 - 을 유배지流配地에서 소일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소설이나 TV 같은 데서는 이 시기에 유키무라가 "닌자忍者를 부리며 정보를 수집하고, 천하를 움직이기 위한 비책秘策을 연구했다." 는 식으로 나오기 일쑤이나, 현실에서 그가 보낸 유배지 생활은 그 정도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지 않았다는 건 이제 명백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사면 통보에 한 조각 희망을 걸면서 한창 활동할 시기를 쓸데없이 소일해가던 그를 내버려둔 채, 역사는 확고히 움직여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젠 40대도 반이 넘었고, 치아가 빠지고 있었으며, 수염은 흰색으로 물들어버린 스스로의 노쇠를 한탄하는 초로初老의 사내. 그것이 유키무라의 실상이다.

  이대로 인적 드문 유배지에서 썩어갈 운명이었던 그는 오사카 측으로부터 초빙을 받았다. 그것도 높은 녹봉祿俸을 제시한... 열세한 오사카 쪽에 가담한다는 불안감은 그 역시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가슴에 묻어두고 오사카로 떠났다.

  유배지에서의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그는 '꿈이여, 다시 한 번' 비슷한 심정이 되어 있었으리라. 이윽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처우에 어울리는 선전善戰을 펼쳤다. 그러나 당초에 품고 있던 불안감은 이윽고 현실이 되어, 오사카 성은 함락되고 그도 죽음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인생의 기로에서 진로선택을 잘못한 인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얌전히 유배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무리 적막한 삶일지라도 평안히 만년晩年을 마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높은 녹봉에 낚여 진퇴進退를 그르치고, 공허空虛한 영광을 꿈꾼 나머지 그 시체가 전장戰場에 내버려졌다고 해서 어떻게 그것을 비웃을 수가 있겠는가? 자기 육체의 쇠약함을 깨닫고, 남아 있던 인생의 모든 걸 내걸고 잃어버린 청춘靑春을 찾아보려고 싸우고, 또 전력을 다하다 쓰러지고 만 사나이의 심정에 나는 한없이 공감하는 바이다.



덧글

  • 2020/04/20 09:2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4/20 16: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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