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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막부 말의 정치용어 (完) 초망草莽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69 ~ 78페이지에 수록된,《유신을 향한 태동과 정치사상 - 막부 말의 힘찬 물결이 낳은 일본적 근대의 주형鑄型을 번역한 글입니다. 일본 막부 말기 역사의 원로급 권위자이시자《사카모토 료마 평전》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학자분인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모모야마가쿠인대학桃山学院大学 교수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초망草莽이란 벼슬하지 않은 재야 지사, 풀뿌리 운동가. 광의로는 민초民草 정도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사가라 소조相楽総三의 비극

  토바 후시미 전쟁鳥羽伏見戦爭에서 패한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오사카 성大坂城을 포기하고 에도江戸로 도망친 이후, 승리를 거둔 교토의 신정권新政権 측 군대에 의한 구미인 살상사건인 코베 사건神戸事件 / 사카이 사건堺事件이 일어나 포연砲煙 속에서 갓 태어난 정부를 당황시켰다.

르 몽드 신문에 그려진 사카이 사건 삽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堺事件')


  특히 사카이 사건은 신정부에서 중요한 일각을 점하고 있던 토사 번土佐藩의 정규군正規軍이 존황양이尊皇攘夷 사상적 감정에서, 조약의 규정을 준수하며 행동한 프랑스인フランス人을 저지하려다 사건이 시작되었으므로, 사상적으로도 중대한 문제였다.

  정부는 부대장部隊長 미노우라 이노키치箕浦猪之吉 이하 20명에게 할복切腹을 명하는 초법규적 처벌(단, 그들 중 9명은 처형장에 입회해 있던 프랑스 측이 살려주었다)을 강행, 막부幕府가 체결해놓았던 조약条約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걸 대외적對外的으로 천명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에 이를 설명하는 데는 "타도한 막부가 추진하던 정책을 우리가 굳이 계승하기로 했다." 고 할 순 없었다. 그리하여 "우내의 공법宇内の公法" 에 따라 제 외국과 화친和親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조칙詔勅을 반복해서 하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보는 소박한 양이주의자攘夷主義者들을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구미가 아시아 등지에 불평등한 관계를 강요하고 있던 현실 그 자체가 우내의 공법이란 것의 실상이다." 는, 보다 더 커다란 문제점을 내포하게 만들었다.

  크리스트교 문명 국가들이 다른 지역을 침략侵略하고 수탈收奪하는 사상적 기만성欺瞞性을 지적하면서, 모든 문명의 대등성対等性과 진정한 만국평등万国平等에 입각한 보편주의普遍主義 노선을 주장해 온 요코이 쇼난横井小楠은 메이지 2년(1869) 정월, "신정부에 양이 포기와 사교(=크리스트교) 용인을 권한 원흉이 바로 그" 라는 차원도 방향도 상이한 이유 하에, 소박한 양이주의자들이었던 토츠카와 향토무사 집단十津川郷士集団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나라 현 최남단 산촌인 토츠카와 마을문양.(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十津川郷士')
남북조 시대 남조의 무대였던 곳. 그래선지 막부 말 존왕양이 지사의 텃밭 중 하나였다.


  이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야기한 사상적 혼란이 지극히 거대했다는 걸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어일신御一新' 이 되면 연공年貢도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환상 역시 보신전쟁戊辰戦争 초기부터 사라졌다. 이를 상징하는 사례가 토사구팽당한 초망집단草莽集団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사가라 소조와 세키호타이赤報隊의 비극' 이다.

  칸토関東 지역의 부유한 향토무사郷士의 아들로 태어난 사가라 소조(코지마 시로小島四郎의 가명)는, 초망계층 존황양이 집단의 중심인물로서 이른 시기부터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며, 막부 토벌이 임박하려 할 때는 사츠마 번薩摩藩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토바 후시미 전쟁 직후, 토산도東山道를 진군하며 신슈(信州, 시나노 지방信濃国)의 초망 국학인 지대国学地帯에서 동지를 결집結集해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에도를 제압한다는 전략 하에, 교토의 신정부로부터 초망지사를 평가하는 언질과 더불어 막부 영지의 연공을 감면해준다는 허가증서를 받아 가지고서 사가라들은 출발했다.

  그러나 토카이도東海道 / 토산도 일대의 번藩들이 저항할 기력気力조차 내지 못하는 걸 지켜보던 교토 측은, 사가라의 세키호타이(관군 선봉 향도대官軍先鋒嚮導隊라고도 했다)가 민중民衆과 손을 잡고 구질서를 파괴破壊하는 것보단, 연도의 번들을 구질서旧秩序 그대로 아군에 편입시키는 게 득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중한 규율規律과 '연공 절반 할인年貢半減' 포고布告에 의해 농민 계층農民階層의 지지支持를 받으며 시모스와下諏訪까지 진군했던 세키호타이는 신정부에게 배신당하고, '가짜 관군偽官軍' 으로 판정되었다.

만화《바람의 검심》의 등장인물 사가라 사노스케(출처 : 나무위키 '사가라 사노스케')
추종하던 대장 사가라 소조를 죽인 메이지 정부에 증오심을 품고 있던 청년, 이란 설정.


  사가라 소조 이하 간부 8명은, 변경된 방침을 가지고 그들의 뒤를 쫓아온 토산도 선봉 총독부東山道先鋒総督府의 손에 의해 재판절차도 없이 참살斬殺당했다. 명예회복名誉回復이 성사되어 사가라가 추증贈位을 받은 건 사건事件으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난 쇼와 3년(1928) 때였다.

  초망들을 토사구팽한 신정부의 메이지 유신이란, 사츠마ㆍ쵸슈 번벌薩長藩閥이 국내외의 정세情勢를 가늠하면서 위로부터의 지시하에 구질서를 개편하는 한편, 무거운 연공을 물려 확보한 국가예산国家予算을 투입해 구미 근대국가欧米近代国家들을 따라잡기를 추구한 여정이었다.

  이 역시 급격한 개혁改革이었다는 건 분명하나, 초망의 주도로 민중民衆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노선路線과는 거리가 멀었음이 자명하다. 국학자 출신이 다수였던 초망지사들에게서 요코이 쇼난 같은 만국 대등의 보편주의가 태어나긴 힘들었겠지만, 연공 감경의 연장선에는 "무리하게 구미를 쫓아가지 않아도 괜찮잖아?" 라는 노선이 펼쳐져 있다. 감히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가지 않은 유신(의 길)' 이었다.


덧글

  • 2020/03/18 09: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3/18 14: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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