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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막부 말의 정치용어 (5) 어일신御一新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69 ~ 78페이지에 수록된,《유신을 향한 태동과 정치사상 - 막부 말의 힘찬 물결이 낳은 일본적 근대의 주형鑄型을 번역한 글입니다. 일본 막부 말기 역사의 원로급 권위자이시자《사카모토 료마 평전》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학자분인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모모야마가쿠인대학桃山学院大学 교수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양이攘夷에서 막부 토벌討幕에 이르는 여정

  이야기를 좀 더 거슬러올라가 보자. 겐지 원년(1864) 8월, 영국英 / 미국米 / 프랑스仏 / 네덜란드蘭 4개 국 연합함대連合艦隊가 쵸슈 시모노세키長州下関를 공격했다. 밀항密航하여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급히 귀국해 개전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바칸馬関에서 쵸후長府까지 늘어선 해안선마다 연합함대의 포격砲擊이 퍼부어진 후 상륙군은 해안가를 점령했다.

쵸후 마에다 포대를 점령연합군(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下関戦争')


  번의 정규군正規軍 / 키헤이타이奇兵隊를 위시한 제 부대諸隊도 그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으나, 화력火力의 차이가 너무 커 쵸슈 측은 철저하게 패배했다. 쵸슈 번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강화講和를 체결했고, 양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개월 전의 금문전쟁에서 교토京都로 쳐들어간 군대가 궤멸당함에 따라 존황양이 과격파尊攘激派의 시대는 국내에서 종언을 고했으나, 이번에는 구미歐美의 함대와 싸운 끝에 직접적으로 양이의 불가성을 체험한 것이다.

  이 전쟁이 지닌 사상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존황양이 과격파의 중심세력이었던 쵸슈 번은 양이를 앞세워 막부幕府를 몰아붙이면서 양이에 이은 막부 토벌로 나아가기 위한 작전을 진척시켜 왔으나, 이 전쟁의 결과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쵸슈는 막부를 공격할 별개의 도정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궁지에 몰린 쵸슈 앞에 막부의 쵸슈 정벌군征長軍이 쳐들어왔다. 겐지 원년(1864)에 벌어진 제 1차 쵸슈 정벌에선 번의 권력을 장악한 보수파保守派가 막부에 전면적으로 굴복했으나,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키헤이타이를 위시한 제 부대를 이끌고 봉기蜂起하여 케이오 원년(1865) 초 벌어진 번 내전에서 보수파 정권을 타도, 막부 토벌파討幕派의 번 권력 장악이 성사되었다.

중앙의 인물이 타카스기 신사쿠,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下関戦争')
이토의 출세길은 결과가 뻔해 보였던 타카스기의 무모한 쿠데타에 동참함으로써 열리게 되었다.


  이 내전에선 세토우치(瀬戸内, 역주 :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끼고 있는 연안 지역)의 부농들이 타카스기 군高杉軍에 자금과 부역을 제공하는 등, 전통적인 지배질서支配秩序가 균열을 일으키는 데 대한 기대감期待感을 보여주었다. 서민층이 참가하고 있던 키헤이타이 등의 제 부대는 이후 막부 토벌을 실현하려는 쵸슈의 중요한 전력戰力으로 기능했다.

  이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무사계급武士階級이 폐지되고, 불충분하나마 사민평등四民平等이 실현되는 길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키헤이타이 등의 제 부대는 쵸슈 막부 토벌파들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케이오 2년(1866)에 막부가 제 2차 쵸슈 정벌의 싸움을 개시했을 때는 이미 삿쵸동맹薩長同盟이 결성된 상태였다. 그 사츠마薩摩는 영국イギリス과의 제휴提携를 강화해가고 있었다.

  사츠마는 이보다 이른 분큐 3년(1863)에 사츠에이 전쟁薩英戦争을 경험했다. 그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이 해결되지 않는 데 속을 썩이던 영국은 카고시마 만鹿児島湾에 함대艦隊를 파견했으나, 사츠마는 이들과 호각지세로 맞서 싸웠다.

르 몽드 신문에 게재된 사츠에이 전쟁 삽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薩英戦争')


  이 전쟁의 뒷처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츠마와 영국은 의기투합意氣投合했다. 프랑스フランス가 막부와 결탁하고 있는 이상 영국도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막부를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사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 케이오 원년(1865) 3월, 고다이 토모아츠五代友厚 /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등 도합 18명으로 이루어진 대부대가 가로家老 니이로 교부新納刑部의 인솔하에 영국 유학을 떠났다.

유신 후 상인이 되었던 고다이 토모아츠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五代友厚')
무사에서 상인으로 전직하여 성공을 거둔 정치적 상인政商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제 2차 쵸슈 전쟁에서 막부는 떨쳐 일어난 쵸슈 사민士民의 반격 앞에 패배, 코메이 텐노孝明天皇에게 정전명령停戰命令을 내려줄 것을 청한 후 철병撤兵했다. 막부로선 통한痛恨의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그래도 막부는 여전히 전국적인 정권이었고, 전쟁 도중에 사망한 쇼군 이에모치家茂의 뒤를 이어 15대 쇼군으로 취임한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이미 오구리 타다마사小栗忠順들이 준비하고 있던 토쿠가와 중앙집권국가 노선徳川中央集権国家路線을 강력하게 밀어붙었다.

  프랑스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군제개혁軍制改革도 성과를 거두어, 효율적인 직속군대가 만들어졌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시사示唆를 받아 토사 번土佐藩에서 건의한 '대정봉환大政奉還' 역시도 요시노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强化하는 방향으로 이용할 작정이었다.

  유럽 유학에서 돌아온 니시 아마네西周가 요시노부를 위해 입안한 국가구상 <의제초안議題草案>에서, 요시노부는 행정부 수장行政府首長과 상원의장上院議長을 겸하게 되어 있었다. 요시노부는 막대한 토쿠가와 직할령徳川直轄領을 배경으로 상원에서 다른 세력들을 압도圧倒하는 강대한 발언력發言力을 지니게 될 터였다.

계몽사상가로서 대성한 니시 아마네의 중년기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西周(啓蒙家)')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수많은 서양용어들이 일본인번역을 거쳐 보급되었다.  


  쵸슈와 사츠마는 요시노부의 주도하에 새로이 거듭나고 있던 막부를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다.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실정失政을 노출하여 소원疎遠해지고 미움을 받고 있었기에, 막부를 쓰러뜨린다는 '슬로건' 그 자체만으로도 '어일신御一新'이란 환상幻想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이점利点이 되었다. 국학国学과 복고신토復古神道적 성향이 강한 존황양이 사상尊皇攘夷思想도 이 무렵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더욱 영향력影響力을 발휘하고 있었다.

  "생활이 팍팍한 건 막부가 개항開港을 했기 때문이야. 막부를 쓰러뜨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 정권이 세워져 양이가 단행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 식의 환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텐츄구미天誅組가 야마토 고죠大和五条에서 '연공 반액 할인年貢半減'을 선언宣言하였던 것도 다시 한 번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왕정복고 정권이 수립되면 연공이 반으로 줄어들거라는 믿음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같은 유리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있었음에도 사츠마나 쵸슈는 막부를 쓰러뜨린 이후의 적극적인 정권구상政権構想을 매듭지어 놓지는 못했다.

  막부 토벌파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신체제新體制 역시도 유럽식 근대국가 정체였으나, 유력한 번들이 번 단위로 할거割拠하면서 막부 타도를 도모하던 현상과 근대국가란 건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섣불리 구상을 밀어붙였다간 막부 토벌을 목적으로 한 제번 연합을 파괴하게 된다. 맹주盟主를 누구로 삼을까 하는 것만 해도 중대한 문제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과 왕정복고 쿠데타王政復古クーデター 사이인 케이오 3년(1867) 11월에 암살당하기 직전, 'ㅇㅇㅇ'를 맹주로 삼은 정권구상을 제시했다.

사진가 우에노 히코마가 찍은 료마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坂本龍馬')


  그러나 이는 료마가 경우에 따라선 'ㅇㅇㅇ''요시노부 공'이라 해석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을 정도로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각 번을 대표하는 막부 토벌파의 지도자들로선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막부 토벌파는 교토 궁궐京都御所을 자기 파벌의 공경公卿들로만 채워놓은 후, 세는 나이로 16세 밖에 안 되는 (메이지明治) 텐노天皇로 하여금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내리도록 하는 수순을 밟았다. 속내는 제각각이었던 각 번들이지만 텐노를 봉대한다는 점에서만은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

  쵸슈와 사츠마는 물론 토쿠가와를 배제排除하려 했으나, 토사와 에치젠越前은 텐노를 봉대한 새로운 정권에 토쿠가와 가문 역시 최유력 번으로 참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지 초기별세한 토사의 야마우치 요우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山内容堂')
사이고 타카모리에게 살해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왕정복고 쿠데타 때 격하게 저항했다.


  이와 같은 대립対立을 내포하면서도 텐노를 봉대한 신정권은 복고復古에 대한 바람이나 어일신御一新에 대한 신기루를 동원動員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 왕정복고 쿠데타 계획의 최종적 매듭을 묶은 자들이 사츠마의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와 공경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였다.

  그러나 오사카 성大坂城에 구미 주일 외교관들을 소집시킨 토쿠가와 요시노부가 "조약을 이행하는 건 여전히 본인이다(= 내가 국가원수다.)"고 선언한 데 대해 교토의 신정권은 유효有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토바 후시미 전쟁鳥羽伏見の戦争으로 시작된 보신전쟁戊辰戦争을 거쳐, 실력으로 권력権力을 탈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손에 들어오는 권력이 점점 커져가 '국가'로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춰가게 된 신정권은, 19세기 중반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했던 문제와 마주해야만 했다. 신국가는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거듭 겪어가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유럽식 근대국가의 길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는 사람들이 '어일신'에 갖고 있던 환상을 베어버리는 노선이기도 했다.  


덧글

  • BigTrain 2020/03/12 19:21 # 답글

    1) 도쿠가와 직할령에 의존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요시노부도 근대적인 정치/행정 개혁까지는 머리가 안 돌아간 듯 하니 결국 막부 주도의 개항은 이뤄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2) '어일신'의 분위기 등을 보니 메이지 유신은 양이를 포기했으면서도 이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정치세력이 "막부를 갈고 새 시대를 열자!" (그리고 그 뒤에 양이를 하자!)는 슬로건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우회전 깜빡이 넣고 좌회전을 한 사건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일본인 입장에선 메이지 유신조차 미완의 근대화라는 생각도 들 수 있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20/03/12 19:47 #

    1) 토쿠가와 군현제를 주장하는 친프랑스 막부관료들이 있었고 세력도 제법 컸는데 제 2차 초슈전쟁의 패배로 막부의 위신이 아작나 버려서요... 이 때문에 쵸슈 정벌, 사츠마 정벌 외치던 애들은 한 풀 꺾이고 직할령에 의존해 의회 다수석 차지해서 기존 지분을 지키자는 식으로 공수교대가 되어버린 감이 있습니다.

    2) 말씀대로 양이를 포기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막부를 쓰러뜨린 세력들이 당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예상&기대와는 판이한 근대화 정책을 밀어붙인 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때 양이를 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즘 일본인들 중에서도 그닥 없겠지만, 메이지 유신에 대해 비판적 내지는 좀 불완전하다는 시각으로 보는 일본인들은 적지 않은 것 같아요. 메이지 유신 직전에 암살당한 사카모토 료마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며 IF 역사물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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