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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막부 말의 정치용어 (4) 공무합체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69 ~ 78페이지에 수록된,《유신을 향한 태동과 정치사상 - 막부 말의 힘찬 물결이 낳은 일본적 근대의 주형鑄型을 번역한 글입니다. 일본 막부 말기 역사의 원로급 권위자이시자《사카모토 료마 평전》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학자분인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모모야마가쿠인대학桃山学院大学 교수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부상한 조정의 권위

  코메이 텐노孝明天皇는 '오랑캐 혐오자'였던 만큼, 존황양이尊皇攘夷의 총대장旗頭이 되기 용이한 일면을 갖고 있었음에도 텐노 본인은 스스로 정치를 담당하겠다는 생각이 없었고, 막부幕府에 맡겨두면 되리라 보고 있었다.

  외압을 물리치지 못하여 무가정권武家政権으로서의 면목面目을 구긴 막부는 코메이 텐노의 지지支持를 수시로 확인함으로써 안심할 수 있었고, 텐노 역시도 막부가 안정된 정권으로서 존속하기를 바랐다.

  위칙조인違勅調印에 이은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 벌어지며 조정과 막부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정<->막부 쌍방에서 코메이 텐노의 여동생 카즈노미야和宮를 14대 쇼군인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아내로 강가(降嫁, 역주 :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을 그보다 못한 집안의 남성에게 시집보냄)시키자는 안건이 부상했다.

32세의 짧은 생을 산 카즈노미야 치카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和宮親子内親王')
21세의 나이에 죽은 남편 이에모치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각기병으로 별세했다.


  이미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과 약혼한 상태였던 카즈노미야를 막부의 희망대로 강가시키기 위해 교토 측에서 온 힘을 쏟은 인물이, 공경公卿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였다. 코메이 텐노는 막부가 양이 실행攘夷実行을 약속約束하겠다는 조건부로 카즈노미야 강가를 칙허하여, 분큐 원년(1861) 그녀는 에도江戸로 내려갔다.

  분큐 2년(1862), 칙사勅使 오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徳를 봉대하여 에도로 내려간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압력하에 막부정치 개혁幕政改革이 단행되었다. 쇼군 후계문제将軍後継問題 당시 이에모치의 라이벌이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가 쇼군 후견직将軍後見職에 취임했고, 안세이의 대옥 때 은거隠居를 강요당했던 前 에치젠 번(越前藩, 역주 : 후쿠이 번福井藩이라고도 함. 35만 석)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가 정사총재직政事総裁職에 취임했다.

막부 말 4대 현후賢侯 중 하나마츠다이라 슌가쿠(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松平春嶽')
현후들 중 야마우치 요우도와 함께 토쿠가와 가문에 특히 우호적인 행동을 한 인물이었다.


  칙사가 이 인사人事에 개입한 결과 조정<->막부 관계에서 교토의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러한 교토 조정이 이전에 했던 약속대로 양이를 이행하라고 요구한 결과, 막부는 곤혹스런 입장에 놓였다.

  정사총재직의 마츠다이라 슌가쿠와, 하타모토旗本 신분으로 한때 소바요우토리츠기(側用取次, 에도 막부의 쇼군 측근 지위 중 하나)를 맡았던 오오쿠보 타다히로大久保忠寛는 "양이는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할 말을 하고, 그럼에도 조정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정권을 반납하고 옛적 스루가駿河 / 미카와三河 / 토오토우미遠江 세 지방의 다이묘大名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지만, 소수의견으로서 고립孤立되고 말았다.

  형의 죽음으로 히고 번(肥後藩, 역주 : 쿠마모토 번熊本藩이라고도 함. 호소카와 가문 54만 석)의 정규무사가 된 후, 부름을 받아 에치젠 번 고문顧問을 거쳐 정사총재직의 브레인이 된 요코이 쇼난横井小楠은 "구미의 재일외교관들을 망라한 일대 회의를 열어 서양이 아시아를 압박하는 불평등조약체제를 바꾸고, 만국이 대등하게 교제하는 새로운 룰을 확립하자."고 주장했으나 존황양이 과격파 천하에서 실행에 옮겨지기엔 요원한 문제였고, 이윽고 실각失脚하여 정국의 중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쇼군후견직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와 로쥬老中들은 수시로 양이 이행을 약속하면서 텐노의 지지를 유지하는 작전作戰을 구사했다. 분큐 2년(1862) 하반기에 양이를 독촉督促하러 칙사가 에도로 내려왔을 때도 그랬고, 분큐 3년(1863)의 쇼군 상경 때도 양이 이행을 약속하는 대가로 텐노의 정무위임 칙정政務委任勅錠을 확보하는 식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日本을 대표하여 조약條約을 체결하였음에도, 국내에서는 텐노를 상대로 양이 이행을 거듭거듭 약속하는 행동은 구제하기 힘든 모순矛盾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츠 카이슈勝海舟는 양이의 압력이 쇼군에게 가해지는 국면局面을 이용해 코베 해군조련소神戸海軍操練所 설립허가를 받아, 일본 / 조선朝鮮 / 청나라清国가 결속해 구미세력에 저항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막부의 주류세력과 코드가 맞지 않았기에 정국변동政局変動에 휩쓸려 조련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막부 내 공의정체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카츠 카이슈(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勝海舟')
조련소 폐쇄 후 제 2차 쵸슈전쟁을 앞둔 1866년 5월까지 약 1년 반의 칩거생활을 보냈다.


  분큐 3년(1863) 의 8.18 쿠데타로 인해 교토에서 존황양이 과격파尊攘激派가 추방追放당하면서 막부는 개항開港을 기정사실화하자는 압력을 조정朝廷에 가할 수 있는 조건을 얻었음에도, 코메이 텐노의 지지가 흔들릴 걸 두려워하여 항구 폐쇄교섭鎖港交涉을 벌여나가는 정책政策을 선택, 정국을 더욱 혼미昏迷하게 만들었다.

  막부는 사츠마 번薩摩藩 등의 주도하에 조정이 개국론開国論으로 돌아서는 것보다는, 조정이 양이론攘夷論을 견지하더라도 막부가 주도권主導權을 보장받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분큐 3년 말 ~ 겐지 원년(1864) 상반기에 유력 번들의 前 번주들로 구성된 실력자 합의체 '참여회의参予会議'가 성립되어 개국정책이 논의되려 하자, 막부는 참여회의가 막부보다도 상위의 정책결정기관으로 기능할 것을 두려워하여 조정의 쇄국론鎖国論에 영합해 회의를 파토내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겐지 원년(1864)이 된 후에도 텐노와 막부가 양이론으로 결속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 주제에 막부는 한편으로 막부 자체를 유럽식 근대국가로 환골탈태시키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프랑스フランス가 은근히 막부의 역성을 들기 시작한 게 이 시기였다.

  겐지 원년(1864) 7월에 벌어진 금문전쟁禁門戦争에 의해 쵸슈長州는 역적朝敵이 되고 말았다. 막부는 칙명勅命을 받들어 쵸슈 정벌을 단행했다. 공무합체公武合体 내지 공무일화公武一和가 말 그대로 체현된 시기가 바로 이 떄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쵸슈로서는 "자신들은 조정과 막부가 뜻을 함꼐하고 있는 양이 방침을 실행했을 뿐이다"는 변명거리가 있었기에, 막부 측도 이를 논리論理로 찍어누르기가 용이치 않았다.

  쵸슈 정벌 총독으로 임명된 前 오와리 번(尾張藩, 역주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61만 9천 석) 번주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는, 참모격인 사츠마 번 무사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의 의견을 받아들여 금문의 변에 책임이 있는 가로家老들의 할복切腹 등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해 이를 확인했을 뿐, 쵸슈를 지나치게 막다른 길로 몰지 않는 선에서 철병했다.

대체적으로 막부에 비협조적이었던 토쿠가와 요시카츠(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慶勝')
막부 옹호파 거두였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 마츠다이라 사다아키 형제의 친형이기도 했다.


  제 1차 쵸슈 전쟁第一次長州戦争이 유야무야 끝나버린 걸 보고 쇼군과 로쥬들은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쇼군의 친정하에 제 2차 쵸슈 전쟁第二次長州戦争을 벌이기로 결의, 쇼군 이에모치는 케이오 원년(1865),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했다.

  그러자 영국英 / 프랑스仏 / 미국米 / 네덜란드蘭 4개국의 공사公事ㆍ영사領事들이 군함 9척을 거느리고 오사카에 육박했다. 쇼군이 오사카에 있는 것을 기화로, 조약에 의해 결정된 사항이지만 이행되지 않고 있던 효고 개항문제兵庫開港問題 / 오사카 개시開市 문제에 결착決着을 지으려 한 것이다.

  막부가 텐노와의 관계를 의식해 유야무야 식으로 대외관계에 임해버린 청구서가 일거에 날아왔다고 하겠다.

  로쥬 아베 분고노카미 마사토阿部豊後守正外 / 마츠마에 이즈노카미 타카히로松前伊豆守崇広는 교토의 의향을 무시하고 막부의 독단으로 효고 개항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나, 조정은 이에 맞서 아베와 마츠마에의 관위官位를 삭탈하는 비상처치非常處置를 단행했다. 권한을 간범당한 쇼군은 교토에 사표辭表를 제출했다.

도자마 출신임에도 로쥬를 역임했던 마츠마에 타카히로(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松前崇広')
일본 최북단의 다이묘. 막부의 홋카이도 직할령화 방침에 의해 적지 않은 이권을 회수당했다.


  교토에 있던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중재로 효고 개항문제를 보류保留하는 대신, 조정이 수호통상조약을 추인追認하는 칙허를 내리는 타협妥協이 이루어졌다. 안세이 5년(1858) 이래 칙명勅命을 무시한 상태에서 이행되고 있던 수호통상조약은 거의 8년 만에 칙허를 획득, 막부는 "반드시 양이를 이행하겠습니다."라는 허황된 약속空約束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과 막부의 타협은 서양西洋과 아시아アジア 사이의 불평등不平等한 관계를 해결한다는 시점에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군함 9척을 동원해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구미세계 우위의 조약이 그들의 방식대로 관철된 일례에 지나지 않았다.

  텐노와 막부는 강요받은 조약을 허용하는가, 거부하는가, 란 선택을 둘러싸고 이제야 이를 받아들이기로 의견일치意見一致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계속되어 온 양이 이행의 중압에서 해방된 막부는 그 자신이 유럽식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우선 칙허를 얻은 제 2차 쵸슈전쟁에서 쵸슈를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사츠마를 비롯해 막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유력 번들까지 멸망시켜 토쿠가와 중앙집권체제德川中央集権体制를 확립하겠다는 게 막부의 의도였다. 재무봉행勘定奉行으로 부활한 오구리 타다마사小栗忠順가 이 구상의 중심에 서서 프랑스와의 제휴提携를 강화시켜 나갔다.


덧글

  • 공손연 2020/03/12 12:28 # 삭제 답글

    아니 일본의 지배자 장군내외가 못먹어서 죽는 각기병에 걸려죽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굶어서 그러진 않았겠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본의 전통식습관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20/03/12 17:16 #

    이에모치 쇼군의 경우 유골검사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이가 약했는데 그럼에도 단 음식을 정말로 좋아했고, 21세 나이에 충치 없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치아 상태가 엉망진창이어서 말년에는 식사하는 그 자체가 괴로웠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각기병의 정체와 치료법이 명백했던 때였으면 좋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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