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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막부 말의 정치용어 (2) 미토 학파 역사



  이 글은 1991년에 출간된 (舊)《歷史群像シリ-ズ 23 坂本龍馬》 의 P. 69 ~ 78페이지에 수록된,《유신을 향한 태동과 정치사상 - 막부 말의 힘찬 물결이 낳은 일본적 근대의 주형鑄型을 번역한 글입니다. 일본 막부 말기 역사의 원로급 권위자이시자《사카모토 료마 평전》으로 대한민국에도 알려진 역사학자분인 마츠우라 레이松浦玲 모모야마가쿠인대학桃山学院大学 교수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강렬한 일본중심주의

  페리가 내항했을 때 12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는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막부는 미토 번(水戸藩, 역주 :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 25만 석)의 前 번주 토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에게 고문급 권한을 주어 업무를 맡겼다. 나리아키는 이른 시기부터 해방정책海防政策에 의욕적으로 임해, 여기에 너무 열중하다가 막부로부터 처벌받기도 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열공烈公' 미토 토쿠가와 나리아키초상화(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斉昭')
당대 일본의 존왕양이를 상징하던 인물로 생전 양이파들에게 어마어마한 중망을 얻고 있었다.
재사로 유명한 토쿠가와 요시노부이 양반 자식이 아니었다면 쇼군 자리를 넘보긴 힘들었을 것.

유명한 호색한으로, 오오쿠大奥 여성에게 치근덕거리던 이력 때문에 오오쿠 공공의 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전국에 분포한 양이성향이 짙은 무사들의 신망信望을 얻고 있었다. 나리아키의 배하配下에선 후지타 토우코(藤田東湖, 타케키彪) / 아이자와 세이시사이(会沢正志斎, 야스시安)를 위시한 미토 학파水戸学派의 대표적 사상가思想家들이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미토 학은 강렬한 일본중심주의日本中心主義로 새로이 태어난 유학儒学의 변종 중 하나였다.

  토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지배적 정치사조는 유교였다. 그러나 유학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의거하기에 일본 같은 경우 변방의 후진지역後進地域으로밖에 간주하지 않으므로, 이는 일본인들로선 정말로 달갑지 않은 문제였다.

  토쿠가와 시대 중엽에 이르러 '국학国学' 이 흥륭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가 교체되어 간 중국보다 만세일계万世一系의 텐노를 섬기는 일본이 더 우월하다" 는 식의 논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미토 학파는 이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였다.

미토 학파의 아버지인 미토 토쿠가와 미츠쿠니(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徳川光圀')
권선징악 사극 드라마 '미토 코몬' 의 인기로 더 유명하지만, 드라마 내용은 대부분 픽션. 


  이러한 미토 학파에 의해 재편된 화이사상華夷思想에 따르면, 일본의 주변에 출몰하기 시작한 구미歐美의 선박이야말로 증오해야 할 오랑캐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신론新論》이 그런 주장을 담고 있다. 무사 집단은 오랑캐를 내쫓아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 사상은, 사회적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던 막부 말기의 무사들로부터 공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나리아키도 막부의 '해방참여海防参与' 라는 책임있는 지위에 앉아보니, 조약을 거부하고 양이攘夷를 실행에 옮기겠다는 방침을 일관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나리아키는 그래서 "무력이 충실해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작전과 "조약에 포함되는 상대 측의 요구를 일부 덜어내자" 는 작전 등을 제안하긴 했지만, 평소의 언동을 실현実現에 옮기는 데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은 면할 수 없었다. 브레인인 후지타 토우코가 안세이 2년(1855)에 일어난 에도 대지진江戸大地震 때 압사(壓死, 역주 :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사망)하고 만 것도 뼈아팠다.

안세이 대지진을 그린 그림(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安政江戸地震')


  상대에게 도리가 있느냐의 여부가 아닌, 약한 자만 내쫓고 강한 자에게는 주저하는 무원칙을 목도한 요코이 쇼난은 미토 학을 완전히 등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에 분포한 단순한 양이파들에겐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 무력 충실을 기하자는 주장이 수용하기가 쉬웠다. 이로써 미토 학파적 이적관夷敵觀으로 무장한 양이주의자攘夷主義者 유지들의 집단이 각지에서 출현했다.

  교토 조정京都朝廷에 양이주의자가 많았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코메이 텐노孝明天皇부터가 극렬한 '오랑캐 혐오자' 였다. 우메다 운핀梅田雲浜 / 야나가와 세이간梁川星巌 / 라이 미키사부로頼三樹三郎 등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궁정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문인文人ㆍ학자学者들 중에서도 양이파가 많았다. 그들은 교토와 전국 각지의 양이주의자 집단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안세이 5년(1858), 막부가 칙허勅許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 에 조인하자 교토의 양이파들은 조정을 움직여【 막부를 책망하라 】는 비밀칙허를 미토 번에 내리도록 했다가 이이 다이로(井伊大老, 나오스케直弼)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이를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이라 한다.

  비밀칙허를 하사받은 미토 번 측은 가로家老 아지마 타테와키安島帯刀가 사형死刑에 처해지고 나리아키도 중근신重謹慎 처분을 받았다. 에치젠 번越前藩의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는 개국파開国派였음에도 교토의 反 막부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의혹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고,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도 하기萩에서 에도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후 별개의 反 막부 활동을 벌였음이 들통나 사형에 처해졌다.

에치젠 번의 무사 하시모토 사나이초상(사진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橋本左内')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책사로 맹활약했으나 26세의 이른 나이에 처형되었다.


  대옥 당시 미토 번에선, 막부의 명령에 따라 칙서勅書를 반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격파激派와 진파鎮派가 대립했다. 미토 학의 중진인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나이가 들면서 온후해져, "개항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고 막부를 거스르지 말자" 는 진파에 가담했으나, 타카하시 타이치로高橋多一郎 / 카네코 마고지로金子孫二郎 / 세키 테츠노스케関鉄之助를 위시한 격파는 번을 뛰쳐나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암살暗殺을 모의한 끝에, 만엔 원년(1860) 3월 목적을 달성했다.

  이이 암살이 불러온 정치적 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나, 미토 번은 이로서 기력이 다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갈수록 극렬해지는 내부투쟁에 에너지를 소모했을 뿐, 전국적 운동을 벌일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덧글

  • 도연초 2020/03/03 10:39 # 답글

    어찌보면 미토학은 유신의 선구자였지만 정작 그 결실은 삿쵸도비 4개의 번(정작 이들도 외세의 무력에 호된 맛을 경험해본 뒤로는 양이사상이 좀 희석되었다기 보다는 지금 우리는 코쟁이들을 꺾을 힘이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쪽에 가깝지만)이 가져가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던 셈이네요; 자기들끼리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충돌로 갈라져서 막말을 보내버렸으니;
  • 3인칭관찰자 2020/03/03 14:46 #

    네. 자기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투쟁하고 고생하면서 만들어놓은 과실은 엄한 놈들이 가져가 버렸고, 번내 당파싸움으로 인해 존왕파든 막부옹호파든 유능한 인재는 살육과 숙청으로 씨가 말라버려서 메이지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는 신정부에 보낼 만한 유력자조차 거의 없었다고 하니..... 정말로 죽 쒀서 남 준 사례라 하겠습니다.

    미토가 고향인 일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 씨가 자기 책에서 저 언급을 하시던데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보답받지 못하고 신정부로부터 배척당했다는 감정을 먼 훗날까지도 적잖은 미토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 BigTrain 2020/03/03 11:14 # 답글

    머리 속 환상에 경도된 이상주의자들이 현실에 직면하면 어떻게 부서지는지, 또는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것 같네요.

    환상에 경도됐으면서 스스로 이상에 충실할 의지도 없는 3류 이상주의자들이 집권하면 어떤 꼴이 나는 지는 작금 우리나라가 보여주고 있고...
  • 3인칭관찰자 2020/03/03 15:07 #

    아마 존왕양이 그 자체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일본도 십중팔구 우리나라와 비슷한 결말을 맞았을 것 같습니다. 메이지 유신 주도자들은깜빡이 한쪽으로 켜 놓았지만 실제론 반대편으로 운전했던 사람들이었으니....

    작금의 우리나라는...... ㅠㅠ 턱없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거면 적어도 자기가 하는 말에 걸맞게 처신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깨끗한 척은 오지게 하면서도 출세와 돈에 환장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 瑞菜 2020/03/04 19:53 # 삭제 답글

    제가 예전에 자주 하던 말이,
    "현대 일본을 알려면 메이지 유신을 알아야 하고, 유신을 알려면 국학을 알아야 하고, 국학을 알려면 신도를 알아야 한다" 였습니다.
    어느 정도 일본에 관심이 있거나 연구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국학과 신도를 피상적으로 말고, 좀 심도있게 알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우리나라는 국학과 신도를 좀 피상적으로 알거나 그 영향력을 낮게보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 어느 정도 연구나 단행본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일반 사학계에서는 관심이 좀 덜하더라고요.
    그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오히려 종교학 쪽에서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 3인칭관찰자 2020/03/04 23:42 #

    고대의 '좋았던 시절' 을 이상화하여 옛적에 실권을 상실한 텐노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신토를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국교화까지 도모하려던 시도 등 메이지 유신은 단순한 근대화 운동으로 봐서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요.

    말씀대로 국학이나 신토에 대한 본격적 지식이 있어야 그런 영역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흥미 우선으로 역사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접근하기 만만찮은 분야가 아닐까 싶지만요. (저처럼) 국학이나 신토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짐작하거나, 다가가 보지도 않고서 그 가치를 경시하는 역덕은 아직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 함부르거 2020/03/09 04:39 # 답글

    미토 학파에 대해 알게 된 게 성희엽 교수의 '조용한 혁명'을 읽고서였습니다. 일본 정치의 근간에 대해서 잘 알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종교와 사상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만 의외로 역사학자들 중에도 종교, 사상에 대해 깊이 이해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런 책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20/03/08 20:01 #

    교보문고에서 '조용한 혁명' 목차와 책 소개글 읽어보고서야 제가 이 책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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