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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다 테츠오] 호죠 소운의 편지와 그 출신논쟁 역사



  이 글은 일본 전국시대사의 저명한 권위자인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 시즈오카 대학 명예교수님께서 2010년에 집필하신《戦国武将の手紙を読む - 浮かびあがる人間模様》P. 13 ~ 25【 제 2편 호죠 소운 】을 번역한 글입니다. 이 책은 지금 일본 아마존 해외배송이나 국내 인터넷서점 일본원서 주문을 통해 신품으로 구할 수 있는 책이므로, 내용을 더 번역해 올리진 않겠습니다.


【 지금까지 한 번도 서신을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만 좋은 계기가 생긴 만큼 문안 올립니다. 세키 우마노죠関右馬允와 저는 묘지苗字가 같습니다. 이세 지방 '세키関'라는 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인연으로 '세키'라 칭하게 된 것이죠. 본래 한 형제였다가 묘지가 갈리게 된 경우입니다. 그러한 인연에 기대어 이번에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세키 씨와 함께 호의를 베풀어주신다면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미카와三河 지방의 타와라 탄죠田原弾正에게 가세하기 위해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가 출진하면서 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근변 지방에 귀하가 계시는 만큼 무슨 일이 있을 땐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금번엔 이마바시 요해今橋要害를 완벽히 격파한 후 본성 아래 해자 언덕 부분에 포진하였고, 지난 19일 묘시(오전 6시 무렵)엔 지성支城에 밀고 들어가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반드시 성을 떨어뜨리려 하니 그 때가 오면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타치太刀 한 자루(스케미츠의 작품으로 금장식이 되어 있습니다)를 선물로 증정하려 하니 축의품으로 여기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기쁘게 받아주신다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삼가 마칩니다. 】

(9월 21일, 소즈이宗瑞가 오가사와라 사에몬노스케小笠原左衛門佐 님께. 숙소에서.)


  이마바시 성 전투

  이 문서의 송신인 이름이 '소즈이宗瑞'라고 되어 있는데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소즈이'란 호죠 소운北条早雲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소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호죠 소운'이라 칭한 적이 없다.

오다와라 역 앞에 있는 호죠 소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北条早雲')


  '이세 신쿠로伊勢新九郎'라 칭했고 나노리(名乗り, 이름. 이미나諱)는 '모리토키盛時'이므로 '이세 모리토키'가 올바른 성명이며, 출가한 후에는 '소운안 소즈이早雲庵宗瑞'라 불렸으므로 '이세 소즈이伊勢宗瑞'로 써야만 한다. 호죠 성의 경우도 소운의 아들인 우지츠나氏綱의 대로 접어든 후에야 사용하였다. 그러나 보통 '호죠 소운'이란 명칭으로 통용되어 익숙해져 있기에 이 글에서도 '호죠 소운'으로 진행하겠다.

  수신인인 오가사와라 사에몬노스케 사다모토小笠原左衛門佐定基는 시나노信濃 지방 슈고守護인 오가사와라 가문의 계보를 물려받아 시나노 내에서도 미카와 지방과 가까운 이나 군 마츠오 성(伊那郡松尾城, 지금의 이이다 시飯田市)에 거하던 오가사와라 일족으로, 흔히 '마츠오 오가사와라松尾小笠原'라 불렸다.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씨는 나가모토長基의 아들들 대에 나가히데長秀 계열인 후카시(深志, 지금의 마츠모토 시松本市) 오가사와라 / 마사야스政康 계열의 마츠오 오가사와라로 분할되었고, 사다모토는 마츠오 오가사와라 계열이었다. 약년보로 보자면

         ↗ 후카시 계열 - 나가히데 -> 모치나가持長 -> 키요무네清宗 -> 나가토모長朝 -> 사다토모貞朝
 나가모토
         ↘ 마츠오 계열 - 마사야스 -> 미츠야스光康 -> 이에나가家長 -> 사다모토 -> 사다타다貞忠에 이른다.

이마바시 성의 후신인 요시다 성.(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吉田城')
지금의 토요하시 공원 내에 있다. 일부 건물들이 현대에 모의재건된 상태.


  소운은 이마바시 성의 마키노 코하쿠牧野古白를 공격하는 데 시나노 지방 오가사와라 사다모토의 지원을 얻을 목적으로, 타치太刀 한 자루를 증정하며 우호를 통하려 했던 것이다.


  소운의 출신

  그런데 소운이 쓴 이 문서에서 그 본인이 강조하는 건 오가사와라 사다모토의 히칸被官 세키 우마노죠 하루미츠関右馬允春光와 자신이 인척관계라는 것이다.【 세키 우마노죠와 저는 묘지가 같습니다. 】고 적힌 이 부분은 호죠 소운의 출신논쟁을 야기한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이세 지방의 토호인 세키 집안가문 문양.(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関氏')
본가 쪽은 우여곡절 끝에 5천 석 막부 하타모토 신분으로 에도 시대를 살았다.


  세키 우마노죠 하루미츠라는 무장에 대해선 아직 파악되지 못한 면이 많지만, 시나노 <-> 미카와 접경지대에 가까운 지금의 나가노 현 시모이나 군 니이노長野県下伊那郡新野에 히사시라는 성城이 있었고, 그 성의 성주가 세키 씨였다고 한다. 요컨대 소운은 마키노 코하쿠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 시나노 <-> 미카와 접경지대 근변을 영유한 세키 씨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목적으로, 그의 주군 되는 오가사와라 사다모토와 우호를 통할 필요성을 느껴 이 편지를 보냈으리라 추측된다. 그걸 염두에 두고【 세키 우마노죠와 저는 묘지가 같습니다. 】,【 본래 한 형제였는데 묘지가 갈리게 된 것입니다. 】고 소운이 서술한 데서, 소운 출신논쟁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일어난 것이다.

  소운의 출신에 대해서는《호죠고다이키北条五代記》에 적혀 있는 '야마시로 지방 우지 설山城国宇治説' / '야마토 지방 아리와라 설大和国在原説' 외에도 '교토 이세 씨 설京都伊勢氏説'이란 게 있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가사와라 사다모토에게 보낸 이 문서에서 소운이 "나는 이세의 세키 씨와 동족입니다."라고 언급한 바를 근거로 후지오카 츠구헤이藤岡継平 / 아베 겐 씨들이 '이세 출신설伊勢出身説'을 주창하게 되어, 최종적으로는 타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 씨가 타이쇼 원년(1912)에 하신 강연 <호죠 소운과 니라야마 성>(다음 해《역사지리》이즈 반도 호로 편집되어 간행)에 의해 결착이 지어지는 모양새를 이루었으므로 그 부분을 인용하겠다.

  "교토 이세 씨 출신이라는 건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교토의 이세 씨라면 엄청난 권세를 누리고 있던 자로, 쇼군 이상의 권력을 지닌 자였던만큼 그런 자의 자식이나 동생쯤 된다고 하면 당대 조정 귀족들의 일기ㆍ기록 등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털끝만큼도 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이전부터 의심스럽게 여겼는데, 결국은 (본인이) 교토 이세 씨가 아닌 이세 세키 씨의 일족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게 무슨 경위로 밝혀지게 되었냐 하면, 구 에치젠 카츠야마 번越前勝山藩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자작가子爵家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 가운데 소운이 보낸 편지가 있었단 말이죠..."

  타나카 요시나리 씨는 위와 같이 말씀하신 후 소운의 편지에서 자신이 세키 우마노죠와 동족이라고 기록한 부분을 소개하셨다. 이렇게 하여 교토 이세 씨 설이 부정되고 소운 이세 출신설이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이세 세키 씨라는 가문이 명가名家도 아니고 보니 소운의 출신도 별 것 없었으리라 보는 시각이 확산되어, 점차 '이세 출신의 뜨내기'란 설이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히데요시ㆍ이에야스 시대를 살아간 세키 카즈마사(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関一政')
본향의 땅을 거쳐 한때 호키 쿠로사카 번伯耆黒坂藩 5만 석을 영유한 적도 있었으나.. 


  예를 들자면 쿠와타 타다치카桑田忠親 씨께서 쇼와 56년(1981)에 발표하신 논문 <호죠 소운의 정체에 대하여>(《일본역사》제 392호 中) 에서도 이 소운의 편지를 언급하시면서【 소운은 본래 이세 세키에 거주하던 노부시野武士의 아들로, 신쿠로 나가우지新九郎長氏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여동생이 스루가駿河 지방의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義忠의 아내가 되어 있던 데 의지하여 스루가로 내려가 이마가와 가문의 식객食客이 되었다. 결국은 별 것 없는 낭인浪人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라고 정리하신 바 있다.

  소운 본인이 자기 출신에 대해 언급한 문서나 기록이 그 외엔 아예 없기 때문에 이 소운의 편지가 담고 있는 정보가 유일한 단서라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세키 우마노죠와 저는 묘지가 같습니다. 】라고 적힌 부분과【 본래 한 형제였는데 묘지가 갈리게 된 것입니다. 】라는 부분을 타나카 요시나리 씨나 쿠와타 타다치카 씨처럼 해석하는 데는 이견을 갖고 있다. 나는【 세키 씨와는 본래 형제 관계였다. 】는 대목을 "세키 씨의 분가"라든가 "세키 씨 일족"으로 읽지 않는다. 단순히 "세키 씨와는 근본을 따지면 동족이다."는 데 불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뿐으로, "같은 이세 헤이지伊勢平氏"라는 정도의 언급으로 해석하고 있다.


  빗츄 이세 씨 설

  소운의 본래 이름은 앞에서 언급하였던 '이세 신쿠로 모리토키伊勢新九郎盛時'로, 묘지가 '이세伊勢'였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이세 출신의 뜨내기도, 교토 이세 씨 출신도 아니라면 소운은 과연 어디 출신이었던 걸까?

오다와라 성보관되어 있는 호죠 소운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北条早雲')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의 출신 외에도 나이, 행적 등에 관한 기존 통설은 적잖게 뒤집혔다. 


  소운의 출신에 대해선 야마시로 지방 우지 설 / 야마토 지방 아리와라 설 / 교토 이세 씨 설 / 이세 출신의 뜨내기 설 외에도 '빗츄 이세 씨 설備中伊勢氏説'이라는 또다른 학설이 있다. 에도 시대에 집필된 오제 호안小瀬甫庵의《타이코키太閤記》라든가 군담물《츄고쿠효란키中国兵乱記》에 빗츄 이세 씨 출신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있었긴 하지만, 이를 본격적인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건 후지이 스스무藤井駿 씨의 <호죠 소운과 빗츄 지방 에하라 장원>(《오카야마 대학 법문학부 학술기요》제 5호)이 최초였다. 이 때가 쇼와 31년(1956)이었다.

  그 휴 츠이키 모치타카 씨가 <호죠 소운의 정체를 생각한다>(쇼와 46년 = 1971년 간행)에서 빗츄 이세 씨 설을 보강하셨으나, 빗츄 지방 출신으로 교토의 사료에 이름이 언급되는 '이세 신쿠로 모리토키'와 이즈ㆍ사가미 지방의 센고쿠다이묘로 거듭난 '이세 신쿠로 나가우지'가 동일인물임이 논증되지 못하여 빗츄 이세 씨 설은 널리 인지되지 못한 채 몇 년이 지났다. "이세 신쿠로라는 이름만 같을 뿐 한 쪽은 빗츄ㆍ교토에서 활약했고, 또 한 쪽은 이세ㆍ스루가ㆍ이즈ㆍ사가미에서 활약했다."는, 두 사람의 동명이인이 있었을 뿐이라는 해석이었다.

  센고쿠다이묘가 된 이세 신쿠로의 이름은 그 때까진 '나가우지' 내지는 '우지시게氏茂'로 통용되면서 빗츄 지방 출신인 이세 신쿠로의 이름 '모리토키'와는 별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센고쿠다이묘로 거듭난 이세 신쿠로의 이름 역시 모리토키였으며, 그가 교토 이세 씨의 양자로 들어갔던 경력을 내가 밝혀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엔 소운은 '빗츄 지방 출신의 이세 신쿠로 모리토키'였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이 편지를 보냈을 당시의 소운은 이미 이즈 지방은 물론 사가미 서부 지방에까지 판도를 늘리며 센고쿠다이묘로 성장해 있었음에도, 자기 조카인 이마가와 우지치카를 보좌하며 이마가와 영지를 확대하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소운 본인이 '나는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군사軍師다' 라고 본인을 위치짓고 있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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