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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쿠가와 요시노부》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53 徳川慶喜 ~ 菊と葵に揺れた最後の将軍 ~》에 수록된 글【 요시노부를 둘러싼 사람들 남성편 】中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을 번역한 글(p.151~152)입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작가이신 이마이 토시오今井敏夫 님입니다.


  강병을 이끌고 교토를 진무하다

  보신전쟁戊辰戦争 당시 아이즈 번(会津藩, 역주 : 마츠다이라 가문 23만 석)의 비극은 분큐文久 2년(1862) 윤 8월에 번주藩主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교토 수호직京都守護職' 에 취임하며 시작되었다.

  막부는 존왕양이尊王攘夷로 들끓는 교토 시중을 진압하여 공무합체公武合体의 결실을 거둘 목적으로 '동일본 제일의 강병' 이라 불리던 아이즈 번에 기대를 걸었다. 아이즈 번은 원거리 근무라는 점과 카타모리의 병약함을 근거로 재삼에 걸쳐 이 지위를 사퇴했다. "불 속에서 밤을 줍는 것과 같다" 는 가신단 내부의 맹렬한 반대여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사총재직政事総裁職을 맡고 있던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요시나가慶永)의 집요한 요청 앞에 결국 카타모리도 승낙하고 말았다.

  카타모리는 이 때의 망설임을【 가도 걱정이고 가지 않으면 괴로우니 어찌해야 할까 군주를 부모처럼 생각하는 이 마음 】이란 시로 만들어 친아버지인 미노 타카스 번(美濃高須藩, 역주 :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3만 석) 번주 마츠다이라 요시타츠松平義建에게 토로하였다.

타카스 4형제(高須四兄弟,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高須四兄弟')

(왼1)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 (왼2)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
(왼3) 토쿠가와 모치나가徳川茂徳, (왼4)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


  카타모리가 수호직 취임을 결의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번조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의 유훈遺訓인【 황실을 존숭하고 쇼군에게는 절대 복종하라. 】는 가훈의 존재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자 가신들도 "군신 모두가 오로지 경사京師의 땅을 죽을 자리로 삼아야겠습니다." 라며 비장한 각오를 굳혔다.

  카타모리가 1천 정병을 이끌고 입경하자 교토의 치안은 일시적으로 청정을 되찾았고 민중들로부터도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당대의 코메이 텐노孝明天皇도 대단한 아이즈 옹호자로 카타모리에게 보내는 신뢰는 돈독했다. 그러나 공무합체란 정국은 복잡하고도 기괴하여, 과격 양이파 성향의 쿠게(公家, 역주 : 조정 귀족)들과 쵸슈(長州,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ㆍ사츠마(薩摩, 역주 : 시마즈 가문島津家 77만 석)ㆍ토사(土佐,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内家 20만 2천 석) 세 번 앞에 막부는 언제나 끌려다니는 입장이었다.

사후에 제작된 코메이 텐노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孝明天皇')

강경한 외국인 배척, 양이攘夷를 고집하여 막부를 곤혹케 만들었으나
철저한 막부 옹호론자였기에 反 막부 세력에게도 곤혹스러운 존재였다.


  카타모리는 막부세력 만회에 힘쓰는 한편으로, 빈곤에 허덕이는 쿠게들의 생활을 보조하고 시중경비에 만전을 기해 황실과 쿠게, 일반시민들로부터 대단히 좋은 평판을 얻었다.

  이 점이 막부 토벌파倒幕派 쿠게들에겐 달갑지 않았는지 '천람 열병식天覧馬揃え' 을 열도록 하여 거기서 흠을 잡아 그를 수호직에서 배척하려고 계획했으나 결과는 정반대, 아이즈 번 장병들의 일사불란한 통제와 카타모리의 뛰어난 지휘에 코메이 텐노의 신임은 더욱 돈독해졌고 스이칸(水干, 역주 : 조정 귀족들이 입는 사복) / 마구 / 황금 3매를 포상으로 내려 크게 면목을 세워주었다.

  6년에 걸친 카타모리의 수호직 재임기간동안 코메이 텐노는 자신의 측근인 당상귀족堂上貴族들보다도 카타모리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어, 겐지 원년(1864) 8월에【 자네의 충성에 크게 감열感悅하고 있다. 】고 쓴 직필문서宸翰와 시御製 2수를 선물하여 그 노고에 보답했다. 감격한 카타모리는 죽을 때까지 이 문서를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요시노부의 진의를 잘못 읽다

  카타모리의 비운은 코메이 텐노의 붕어崩御와 함께 찾아왔다. 

  공무일화公武一和를 바라던 코메이 텐노가 죽으면서 혼미를 계속하던 정국은 다시 한 번 뒤집혀, 어린 미카도(帝, 메이지 텐노明治天皇)를 옹립한 막부 토벌파 쿠게들과 사츠마ㆍ쵸슈 번이 주도권을 장악, 제 2차 쵸슈 정벌第二次長州征伐의 실패로 위신이 실추되어 있던 막부는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이윽고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상주하게 된다.

  이 때 카타모리의 친형인 오와리 번(尾張藩, 역주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61만 9500석) 번주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가 "쇼군이 정권을 반납했으니 수호직을 사퇴한 후 조정의 소집에 응해라." 고 그에게 권고했으나 카타모리는 단호히 그 뜻에 따르지 않았다. 카타모리 입장에선 침몰해가는 배=막부를 버리고 아이즈 번만이 도망치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패전 후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요시노부에게 주전파主戰派들은 "막부군 본대 2만 명으로 일전을 벌입시다" 고 다그쳤으나 요시노부는 카타모리 등을 데리고 한밤중에 오사카 성을 빠져나가 해로海路를 통해 에도江戸로 돌아가버렸다.

  카타모리는 요시노부가 에도에서 전투준비를 할 거라 믿고 있었으나 요시노부는 오로지 공순恭順의 자세로 일관한 끝에 정동군征東軍의 창 끝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데 성공했고, 카타모리와 아이즈 번이 그를 대신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요시노부는 카타모리를 버린 것이다.

말년에 그려진 카타모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松平容保')


  훗날 카타모리는 닛코 토쇼 궁日光東照宮의 최고위 신관宮司이 되었다. 그는 과연 신조神祖 이에야스에게 어떤 보고를 올렸을까? 
 

덧글

  • 2020/02/19 15: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0/02/19 21:1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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