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토쿠가와 요시노부》레옹 로슈レオンㆍロッシュ 역사



  이 글은《(旧) 歷史群像シリーズ 53 徳川慶喜 ~ 菊と葵に揺れた最後の将軍 ~》에 수록된 글【 요시노부를 둘러싼 사람들 남성편 】中 '레옹 로슈 - 쇼군의 친구가 된 막부 말기의 프랑스 외교관' 을 번역한 글(p.152)입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작가이신 이마이 토시오今井敏夫 님입니다.


  일관되게 요시노부를 지지한 프랑스 공사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Léon Roches는, 요시노부가 토쿠가와 종가徳川宗家를 상속하고 쇼군에 선하將軍宣下된 때부터 막부가 와해瓦解되기까지 1년 반 동안 일관되게 막부를 지지했다.

  로슈가 일본에 부임한 건 겐지 원년(1864) 3월이었다. 그는 당시 56세의 베테랑 외교관으로, 숙련된 수완을 평가받아 본국 정부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것이다.

레옹 로슈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レオン・ロッシュ')
일본에 오기 전엔 주로 북아프리카 무대에서 프랑스 외교관 직무를 수행했다.


  부임 초기 로슈는 선교사宣敎師 메르메 드 카숑Mermet de Cachon을 통역으로 채용했다. 카숑은 일본어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내부사정도 상세히 꿰고 있었고, 막부의 신하幕臣인 쿠리모토 죠운栗本鋤雲 / 이노우에 요시아야井上義斐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메르메를 채용한 건 로슈가 막부 수뇌진에 접근해 그들의 신뢰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조약의 체결자인 쇼군과 막부의 권력을 옹호함으로써 무역 안정과 확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공사 올콕Alcock은 "무역이 향상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국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했고, 올콕의 후임공사인 파크스Parkes도 그 노선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사츠마薩摩ㆍ쵸슈 번長州藩과 친교를 맺고 있던 글로버Glover의 진언을 수용하면서 대일외교를 전개해갔다.

  그렇기에 파크스는 막부를 상대로 때로는 공갈恐喝적인 태도까지 서슴지 않으며 교섭에 임했다.

  반면 로슈는 쿠리모토 등과 빈번히 왕래하며 친목親睦을 다졌고, 오구리 타다마사小栗忠順를 위시한 막부 수뇌진首腦陣들과도 친교를 트게 된다.

도젠사東善寺에 보관된 오구리 타다마사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小栗忠順')
막부가 지배하는 중앙집권국가를 추구한 인물로, 카츠 카이슈 등의 정적政敵이라 할 만했다.


  로슈의 유연한 외교에 신뢰를 보내던 막부는 해군관海軍館 / 요코스카 조선소横須賀造船所 건설을 잇따라 의뢰依賴했다.

  이 의뢰에 로슈는 성실하게 화답했다. 모국의【 툴롱 조선소 】대비 3분의 2 규모로 예정된 요코스카 조선소 건설 착공은 막부와 프랑스의 신뢰관계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막부는 육군 병제개혁에 착수하면서 보병步兵 / 기병騎兵 / 포병砲兵 이상 3병을 조련할 교관들을 파견해달라 요청했다.

  로슈와 견원지간이었던 파크스는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가 육군 교련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해군 전습을 해 주자."며 대항심을 불태웠다.

  이 때 일본에 건너온 프랑스 장교 / 부사관들은 나중에 막부가 무너진 후 신정부新政府에 의해 해고解雇당했지만, 그 중에선 포병대 지휘관 브뤼네Brunet 같이 하코다테函館의 에노모토 군榎本軍에 가담해 마지막까지 막부군과 함께한 사람도 있었다.

막부가 초빙했던 쥘 브뤼네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ジュール・ブリュネ')
의외일지 모르나, 프랑스 군대로 돌아가서 출세했다. 육군참모총장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요시노부 역시 한참 전부터 親 프랑스파로, 로슈는 단독회견을 허락받아 요시노부를 상대로 내외의 정치상황에 대한 질의응답을 할 정도로 친밀했다.

  "새 쇼군(요시노부)과 나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한다. 이것으로 내가 지론으로 삼고 있는 막부 옹호 주장이 옳았다는 게 확증되었다."고 로슈 본인도 더욱 자신감을 가지면서 새 쇼군의 친우親友이자 충언자忠言者임을 자임하였다.

  사실 그는 막부의 외교정책 뿐 아니라 내정에 대해서도 조언하여, 요시노부가 차례차례 추진했던 막부정치 개혁幕政改革의 큰 틀은 로슈의 건책建策에서 나왔다고 한다.

  케이오 3년(1867) 7월, 요시노부는 프랑스 함선「게레르」호에 있던 로슈를 찾아가 식사를 함께 하면서 몇 시간에 걸쳐 회담했다. 쇼군이 일개 공사를 직접 찾아가 함상에서 식사까지 한 건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이 회담에서 요시노부는 로슈에게 "나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국내의 난국을 돌파해나갈 자신이 있소."라고 이야기했다. 그것이 '대정봉환(大政奉還, 역주 : 정권 반납)'이었다는 걸 로슈가 알게 된 것은 3개월 뒤의 일이었다.

무라타 탄료邨田丹陵, '대정봉환의 그림'(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大政奉還')


  그럼에도 로슈는 막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요시노부 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대정봉환 후에도 여전히 정권을 위임받고 있는 다이쿤(大君, 요시노부)의 지위는 안태安泰합니다. 】라고 본국 정부에 타전打電했다.

  결국 로슈는 시국판단을 그르친 결과로 경질당했으나, 어쨌든 막부 말 ~ 유신 시기 일본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외교관이었음은 분명하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1965
435
415097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