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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소동》인가받은 하극상 - 나베시마 소동 역사



  본 글은 2005년 3월, 일본출판사 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한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 큐슈대학 교수님의 저서《집안 소동御家騒動 - 다이묘 가문을 뒤흔들었던 권력투쟁》(中公新書 1788) 제 2장 <주군을 폐립하는 종신從臣들> 에 수록된【 나베시마 소동 】부분(p. 43 ~ 48)을 번역한 것입니다.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으며, 본 책의 내용은 이 이상 제 블로그에서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하극상下剋上이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꺾는다' 는 의미로, 하위에 놓인 자가 상위에 있는 자의 지위나 권력 등을 실력으로 빼앗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하극상형 소동의 필두를 꼽자면 누가 뭐래도 히젠 사가 번肥前佐賀藩의 나베시마 소동鍋島騒動이리라. 주군 가문主家인 류조지 씨龍造寺氏를 계승할 적자嫡子가 있었음에도 종신従臣인 나베시마 씨가 가독 지위를 빼앗은, 집안 찬탈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히젠 사가 번 번조藩祖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鍋島直茂')


  류조지 씨는 본래 히젠肥前 지방의 토호 영주 계층이었으나, 나중엔 사츠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 / 분고 오토모 씨豊後大友氏와 어깨를 견주며 큐슈九州 지방에 할거하는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로 거듭났다. 당주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는 영지를 확대해 '다섯 주의 태수' 라 불리기까지 했으나, 텐쇼 12년(1584) 3월 히젠 시마바라島原의 영주 아리마 씨有馬氏와 결탁한 시마즈 씨와 시마바라 전투島原合戦를 벌인 끝에 허망히 전사戦死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적자 류조지 마사이에龍造寺政家는 29세였는데, 생전부터 타카노부는 자기가 죽으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상의하라고 마사이에와 그 외의 자식들에게 명령한 바 있었다. 마사이에와 주된 일족ㆍ중신들은 나오시게에게 기청문을 제출하여【 류조지 영지의 통치를 일임하겠다. 】고 서약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텐분 7년(1538) 나베시마 키요후사鍋島清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류조지 이에즈미龍造寺家純의 딸이었으니 혈연상 타카노부와 사촌관계였고, 훗날 타카노부의 생모 케이긴니慶誾尼가 키요후사에게 개가하면서 나오시게는 타카노부와 의형제義兄弟 관계가 되어 류조지 가문의 일족이자 중신으로서 지위를 상승시켰다. 텐쇼 15년(1587)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큐슈를 평정했고, 다음 해 히데요시는 나오시게를 나가사키 대관長崎代官으로 임명했으며, 또 그 다음 해에는 종5위하 카가노카미加賀守로 서임시켰다.

류조지 마사이에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龍造寺政家')


  일설에 따르면 "마사이에의 병을 이유로 텐쇼 18년(1590)에 나오시게는 류조지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고도 하나, 같은 해 발급된 히데요시의 공문서는 마사이에의 적자인 다섯 살의 류조지 타카후사龍造寺高房를 상대로 영지를 보장하고 있으며 마사이에 쪽을 은거자로 대우하고 있다. 즉 이 단계에서 토요토미 정권은 나이 어린 타카후사를 다이묘大名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나, 이 공문서를 보면 나오시게와 그 적자 카츠시게勝茂의 영유지 코쿠다카가 5만 3500석으로 지정되어 마사이에ㆍ타카후사 부자가 영유한 3만 5000석을 2만 석 가까이 상회했다. 텐쇼 20년(1592)에 히데요시가 조선침략朝鮮侵略을 개시했을 때도 군역軍役은 마사이에ㆍ타카후사 부자가 아닌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부과되었다. 마사이에는 병약하고 타카후사는 나이가 어리기에 행해진 처치이긴 했으나, 나오시게는 마사이에ㆍ타카후사 부자의 후견 역할이라기보다 사실상 류조지 '집안' 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어 있었다.

  케이쵸 5년(1600)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류조지ㆍ나베시마 세력은 도중에 동군(토쿠가와 측)으로 갈아타 전후 35만 7천 석의 사가 번 영지를 조금도 잃지 않고 보장받았다.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이 들어선 후에도 류조지 가문과 나베시마 가문의 관계는 토요토미 시기와 매한가지로 취급, 에도江戸로 참근参勤하고 에도 성江戸城의 석루축조石垣普請 부역 등을 담당하며, 증인(証人, 인질)을 바치는 등의 업무가 나베시마 씨에게 직접적으로 요구된 끝에 케이쵸 10년(1605) 5월,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勝茂는 이에야스의 수양딸(오카베 나가모리岡部長盛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이는 류조지의 혈통 대신 능력자인 나베시마 씨를 다이묘로서 실제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이러한 경위에 기반해 다음 해인 케이쵸 11년(1606) 1월, 류조지의 일족들과 중신들이 나베시마 씨에게 기청문을 제출,【 나베시마 부자의 깊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공무에 임하겠다. 】며【 '집안' 에 절대적으로 귀속하겠다. 】고 서약했다.

류조지 타카후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龍造寺高房')


  바로 그 다음 해인 케이쵸 12년(1607) 3월, 실의에 빠진 류조지 타카후사가 (역주 : 나오시게의 수양딸인) 아내를 찔러 죽이고 그 본인도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타카후사는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부상이 회복되지 못한 채 그 해 9월에 세상을 떠났고, 다음 달인 10월에는 마사이에가 그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 병으로 죽었다. 류조지 씨의 입장에서 보면 나베시마 부자에게 기청문이 제출된 경위는 나베시마 씨에 의한 '집안' 찬탈에 지나지 않고, 타카후사의 자살미수는 이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마사이에ㆍ타카후사 부자의 원통한 마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위를 거쳐 류조지 본가가 스스로 가문 단절의 행보를 밟음에 따라, 명실공히 다이묘로서의 나베시마 가문이 성립하여 주군 가문 찬탈극의 제 1막은 조용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사가 번을 연구하시는 타카노 노부하루高野信治 씨에 따르면, 나오시게 본인은 가문 찬탈이라는 시각에 대해 지극히 섭섭해했다고 한다.(《지방영지와 근세적 질서》) 나오시게는 타카후사의 자살미수 직후 마사이에에게 속칭 <한의 편지> 란 것을 보내 지금까지 나오시게가 류조지 가문의 존속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8개 조목에 걸쳐 나열하며【 통일정권 측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일족과 가신들 중에서도 류조지 '집안'의 존속을 원하는 이 어느 누구도 없었음에도 지금까지 이를 떠받쳐온 건 나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감사해하지는 못할 망정 한을 품는다니 부당하다. 】고 비난하였다. 통일정권과 류조지 씨 사이에 낀 입장이었던 나베시마 씨의 시각에서 보자면 당연한 주장이리라.

  소동의 제 2막은 위 사건으로부터 27년이 지난 칸에이 11년(1634)에 시작되었다. 타카후사의 아들이라 자처하던 하쿠안(伯庵, 류조지 스에아키龍造寺季明)이 소송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하쿠안은 타카후사의 친자식이긴 했으나, 그 생모生母가 타카후사의 아내를 섬기던 신분 낮은 여성이었다는 경위로 인해 그 출생이 비닉된 채 시골에서 비밀리에 양육되고 있었다. 5~6세가 되었을 무렵 나베시마 씨가 그 존재를 알게 되면서 나베시마 일족鍋島一族이자 가문 숙로宿老였던 나베시마 쇼산鍋島生三이 그를 데려다가 키웠으나 정신상태가 불안정했던 듯, 호린원이라는 절에 들여보내 하쿠안이란 이름을 갖도록 했다.

  하쿠안이 무단으로 사가에서 자취를 감춘 건 칸에이 7년(1630) 무렵으로, 각지를 유랑하던 그는 칸에이 11년(1634)의 쇼군 이에미츠家光 입경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류조지 가문의 재흥을 바라며 쇼군 가문에 봉공하고 싶다는 뜻을 막부의 로쥬老中 도이 토시카츠土井利勝ㆍ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에게 호소하였다. 그 후로도 칸에이 12년(1635), 칸에이 17년(1640), 칸에이 19년(1642)에 이르기까지 그는 숙부인 류조지 슈젠龍造寺主膳과 함께 끊임없이 제소를 했고 그때마다 막부는 소송을 기각시키다가 결국 쇼호 원년(1644)에 하쿠안을 에도에서 추방하고 아이즈 호시나 가문会津保科家에 그 신병을 위탁하게 된다.

  타카노 노부하루 씨는 "공적 권력이 성립하기 이전인 전국시대였다면 류조지 영지는 무력을 동원한 나베시마 씨의 하극상 내지는 독립이라는 역사를 밟았을 가능성이 높았을 터이나, 나베시마 가문에 의한 속칭 '조용한 하극상' 의 결말이 난 건, 공적 권력의 출현과 그와의 접촉 속에서 빚어진 가신단의 귀속집단으로서의 '집안' 관념이 급속도로 형성된 덕택이었다. 고 생각할 수 있다." 고 서술하셨다.(《근세 다이묘 가신단과 영주제》)

  이를 통일정권 입장에서 해석하자면 "다이묘란 지위는 반드시 그 자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는 역량과 능력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으로, 가신들의 귀속집단으로서의 '집안' 을 안정시킬 능력이 있고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능력자 - 나베시마 나오시게 - 를 다이묘로 인정하였다는 말이 된다. 한편 나베시마 씨는 스스로가 지닌 능력에다가 '집안' 이라는 공동체의 존속을 지상명제로 삼아, 충성을 바칠 대상을 류조지 가문에서 나베시마 가문으로 직선적으로 치환하는 대신 개개의 종신들이 귀속되는 객체로서의 '집안' 을 창출하고 충성을 바칠 대상을 전환시켜, 주군 가문을 실제적으로 교체하는 하극상 행위에 의해 따라올 비판을 능란하게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임《오보로 무라마사》의 첫번째 DLC인 요괴 고양이 오코이 이야기.
 DLC 스토리는 '요괴 고양이 사건' 줄거리와 살짝 연결되어 있으며 찬조출연도 있다.

 
  이렇게 하여 류조지 가문을 재흥시키겠다는 하쿠안의 꿈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년 이상이 지난 카에이 6년(1853), 에도 나카무라자中村座에서 3대 세가와 죠코가 만든《꽃 피는 사가의 요괴 고양이 이야기》란 제목의 카부키가 상연될 예정이었던 걸 나베시마 가문의 맹렬한 항의가 들어오면서 상연이 중단,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다듬은 후에야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소동은 나베시마 씨가 류조지 씨의 '집안' 을 찬탈한 하극상적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리면서「요괴 고양이 사건」을 정설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요괴 고양이 그 자체는 실화와 전혀 관계가 없는 창작상의 허구일 뿐이지만 나베시마 씨의 항의가 있었든, 정치적 경위가 어떠했든, 이 소동의 본질은 주군 가문 찬탈극이었다는 걸 사람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꿰뚫어보았던 것이라 하겠다. 


덧글

  • BigTrain 2019/12/23 11:13 # 답글

    유교적 종법제도와 다른 공동체적 논리에 기반한 상속제도가 공식적으로도 작동했다는 얘기인데, 확실히 일본은 뭔가 특이합니다. 근대 이후 일본의 회사 경영/상속 제도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 도연초 2019/12/23 11:23 #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일본 전국시대는 특유의 봉건제때문에 유교 개념 자체를 적용하기 곤란했습니다. 그렇다고 유교 자체를 아예 모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가장 철저한 능력 제일주의 사회였던 때가 저 때였으니까요.(원래 일본은 철저한 신분제사회라 신분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전국시대는 예외인데 아무리 천박한 출생이어도 능력만 있으면 출세는 가능하니까.)
  • 3인칭관찰자 2019/12/23 13:40 #

    일본은 에도 시대 전까진 유교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특히 실력주의+하극상의 시대였던 전국시대에는 혈통 이상으로 공동체를 아우르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구성원들이 당주에게 요구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종법질서로 따지면 명가 중에 명가로 역사에 남아야 했을 명문가 상당수가 전국시대 전후시기에 방계혈족이나 가신들에게 집안을 빼앗겼지요. 공동체의 이익을 잘 대변하고 구성원들을 아우를 능력이 없어보인다 싶으면 그 지위가 도전받는 경우가 많았달까요 ㅠㅠ
  • 도연초 2019/12/23 11:16 # 답글

    히젠의 곰이라 불리던 다카노부가 죽으니 거짓말같이 무너질 뻔한 가문을 어떻게든 되살렸고, 또 류조지 가와 혈연이 가깝다는 점 때문에 사천왕 등 가신단들이 나베시마를 대표격으로 내세운 게 아닐까 하네요. 사실 저런 형태의 정치가 전국시대엔 꽤 흔한 모양입니다. 다이묘는 사실 알고보면 여러 호족 연맹체 중에서 가장 강한 세력의 대표인...

    그렇다고 다카노부의 후손에게 정통성 이유로 번주 자리를 되돌려주자니 류조지 가의 자손들은 사실상 정치에서 멀어져 경험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데다가 한다 하더라도 가신단에게 '조상 음덕으로 다이묘 하는 주제에 여지껏 니들이 번과 우리들을 위해 한 게 뭐냐' 이런 소리에 시달릴 게 뻔하고...

    어쨌건 나베시마는 필요 이상의 악평을 듣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류조지 가는 다자이후의 전통호족인 쇼니 가문을 멸절시킨 전과가 있으니 뭐라 하긴 그렇고.
  • 3인칭관찰자 2019/12/23 14:03 #

    혈연적으로든 능력적으로든 나오시게만한 적임자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시마즈와 히데요시 사이에서 잘 처신해 류조지 가문을 지켜내는 실적을 거둔 걸 보면 역시 유능한 인물이었던 듯 합니다.

    류조지와 나베시마의 명암을 갈라버린 데는 은근 히데요시의 조선침락의 영향도 큰 것 같더군요. 군역을 수행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한때는 춥고 험한 함경도까지 쳐들어가서 고전하는 등 조일전쟁 내내 한반도에서 악전고투했던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 했던 건 나베시마 부자였지 류조지 부자가 아니었으니까요. 류조지 가문 사람들이 급격히 나오시게 쪽으로 기울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니들이 도대체 한 게 뭐냐'는 식으로(....) 안전지대에서 꿀이나 빨았다고 류조지 부자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 함부르거 2019/12/26 00:21 # 답글

    본문과는 큰 관계 없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그 아들의 가신으로 조선에서 잡혀간 홍호연이란 분이 있었네요. 유튜브에서 우연히 찾은 거라 참조하시라고 링크 남깁니다.

    https://youtu.be/mKslzKs6mcI
  • 3인칭관찰자 2019/12/26 04:58 #

    다큐 감명깊게 봤습니다. 링크 걸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jane 2019/12/30 10:27 # 답글

    나오시게는 억울했을 것 같긴 합니다. 주가를 지키는데 전국시대에 나오시게만큼 노력한 사람도 없는 편인데...
  • 3인칭관찰자 2019/12/30 13:28 #

    히데요시나 이에야스가 죽은 주군의 아들들에게 한 짓에 비하면 나오시게는 중앙권력 쪽에서 하극상을 부추겼음에도 주가인 류조지 가문을 어떻게든 업고 가기 위해 노력한 면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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