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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 인기의 뒷사정》노부나가는 혼노사에서 탈출했다? 역사



  본 글은 2008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님의 저서《전국무장ㆍ인기의 뒷사정戰國武將の人氣のウラ事情》제 5장 <만들어진 평판, 사장된 평가> 중 4편인【 탈출한 오다 노부나가, 자결한 사이토 토시미츠 】부분(p. 167 ~ 17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2020년 현재 문고본으로 신판이 출시되어 있으므로 이 이상의 번역글은 올리지 않으려 하며, 이미 포스팅한 내용도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으로부터 3일이 지난 텐쇼 10년(1582) 6월 5일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는 같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장部將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는 키요히데가 보낸 편지의 답장으로서 쓰여진 문서로, <바이린사 문서梅林寺文書>란 명칭으로 통용되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中川清秀')
히데요시와 절친했으나 1년 뒤에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전사했다.


 【 교토京都에서 달려온 자의 말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ㆍ노부타다信忠 부자는 무사히 탈출하시어 오우미 제제近江膳所로 물러나 계신다. 】며 그 과정에서 노부나가의 측근인 후쿠토미 헤이자에몬(福富平左衛門, 역주 : 히데카츠秀勝)이【 세 번에 걸쳐 접전을 벌이는 발군의 무공을 세웠다. 】고 하는 등의 이야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는 완전히 턱없는 거짓말이다. 이 편지를 받은 나카가와 키요히데 본인도 그걸 믿지는 않았으리라. 셋츠摂津 지방 이바라키 성주茨木城主였던 나카가와는 빗츄備中 지방(지금의 오카야마 현岡山県)에 있던 히데요시보다 훨씬 교토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만큼, 혼노사의 변 관련정보도 입수하기 쉬웠으리라. 그가 히데요시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현존하지 않으나 아마 거기에는 "노부나가 부자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히데요시는 이런 어린애같은 속임수를 썼을까. 물론 답은 간단하다. 미츠히데光秀가 모반을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된 오다 가문의 부장들 중에선 거취를 고민하는 자들이 많았다. 키요히데 역시 그런 자들 중 하나였으리라. 그러니 히데요시는 이윽고 들통날 게 뻔한 구라를 쳐서라도 반드시 그를 자기 진영에다 묶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뭐 그런 이야기이나, 우리가 히데요시의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손쉽게 간파할 수 있는 건 그 대상이 오다 노부나가라는 초유명인이고 그의 생사문제가 걸려 있으며, 그가 혼노사에서 죽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도 의심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히데요시가 그닥 유명하지 않은 무장의 소식을 언급하였고 달리 근거할 만한 사료가 없었다면, 후세 사람들은 군말없이 이를 사실이라 믿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특정한 무장에 대해 '사실事実'이라고 믿고 있는 이야기들 중에도 위와 같은 것들이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짤방 상단의 투구 쓴 무사가 후쿠토미.(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福富秀勝')
마에다, 삿사 등의 동료와 함께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군 조총부대를 지휘했다.


  덧붙이자면 위의 편지에서 언급된 후쿠토미 헤이자에몬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는 노부나가의 아들인 노부타다를 따라 니죠고쇼二条御所에서 전사했지만 그런 사실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리 가문毛利家의 일족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는 6월 15일자로 보낸 편지에서【 후쿠토미도 모반에 가담했다. 】고 적어놓았다. 이쪽 역시 혼노사의 변이라는 대사건과 관련된 정보가 아니었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완연한 사실로 통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쿠토미의 활약이란 건 거짓이지만, 혼노사의 변 당시 아케치明智 측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건 미츠히데의 중신重臣 사이토 토시미츠斎藤利三였다. 그는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패전한 후 전장을 이탈했다가 오우미 지방 카타다堅田에서 생포되어 6월 17일, 교토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이 광경은 쿠게(公家, 역주 : 조정 귀족)인 카쥬지 하레토요勧修寺晴豊나 야마시나 토키츠네山科言経 등의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하레토요 쪽은 토시미츠가 조리돌림당하는 광경을 실제로 목도하였으므로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사이토 토시미츠의 딸 카스가노츠보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春日局')
남편과 아들, 친정 식구, (전처) 딸이 시집간 집안 모두가 이 여사 덕에 출세했다. 


  그럼에도 이를 부정하려 했던 것이 사이토 가문斎藤家의 카후(家譜, 역주 : 족보)다. 토시미츠의 자손이 칸에이 18년(1641) 막부幕府에 제출한 기록이 1643년에 완성된《칸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에 기재되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토시미츠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전한 후 쇼류지 성勝竜寺城에 입성했고, 미츠히데와 함께 성을 빠져나와 교토 토쿠쵸쥬인得長寿院 부근에서 엄청나게 분투했다고 한다. 이 절은 그 당시에 이미 폐멸되어 있던 곳으로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부근에 위치했다. 그 후 히가시야마 산기슭을 북상하여 시라카와白川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전사戰死했는지 자결自殺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49세 나이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미츠히데가 한때 쇼류지 성에 입성했다가 탈출했다는 건 사실이나, 그는 교토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교외지구인 오구루스小栗栖 내지 다이고醍醐 부근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군대가 산쥬산겐도 부근에서 싸웠다는 걸 방증해줄 기록 역시 없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쇼류지 성 코구치 일부 + 모의망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勝竜寺城')


  막부는 칸세이 11년(1799), 다이묘ㆍ하타모토들에게 다시 족보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십여 년 간의 작업을 거쳐《칸세이쵸슈쇼가후寛政重修諸家譜》를 편찬했다. 당연히 사이토 가문을 다룬 부분도 있는데, 칸에이 시기에 제출한 내용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 토시미츠가 패전한 후에도 각지에서 분투하였다는 맥락은 같으나, 토쿠쵸쥬인이니 하는 고유명사들이 빠지고 6월 17일, 교토 시라카와에 있는 어느 민가에서 자결했다고 되어 있다. 향년 49세 부분은 동일하다.

  160여 년이나 지난 후에 쓰여진 기록이 죽은 일시와 사인死因에서 더욱 구체성을 띤다는 점 역시도 기이하나 이런 면은 접어두고, 처형당한 게 명백했음에도 자결한 거라고 열심히 강변하였던 건 자손子孫되는 사람들 입장에선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토시미츠의 이러저러한 공적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혼노사의 변에 대해선 입을 닫은 것도 막번체제幕藩体制 하에서 반역이라는 행동이 흉측한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장에 대한 평판들 중에는 카후를 재료로 삼은 것들이 적지 않으나, 카후라는 것에는 이와 비슷한 조작이 적지 않게 행해진다.


덧글

  • BigTrain 2019/12/16 10:26 # 답글

    1차사료라고 맹신하지 말고, 전후사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도 왜곡의 여지가 있는지 신중하게 판단해야 된다는 뜻이군요. 역사 연구가 이래서 어렵죠..
  • 3인칭관찰자 2019/12/16 12:27 #

    네. 사료(1차사료라도)를 무턱대고 믿지 말라는 걸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or 보조교재에도 히데요시의 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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