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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독본》오다 노부나가와 타케다 씨武田氏 (下) 역사



  이 글은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의 잡지이자 말년에는 카도카와 계열의 잡지였던《역사독본 2015년 가을호 ~ 오다 노부나가, 천하포무의 충격 ~》p. 92 ~ 99페이지를 구성하는 히라야마 유우平山優 님의 글,【 노부나가와 타케다 씨신겐과 카츠요리 ~ 아버지로부터 對 노부나가 전쟁을 물려받은 후계자의 고투苦鬪 ~ 】를 번역한 것입니다. 책 내용 중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려 하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오다ㆍ타케다의 사투

  카츠요리勝頼는 텐쇼 2년(1574)부터 다음 해인 텐쇼 3년(1575) 4월까지 오다織田ㆍ토쿠가와徳川 두 집안을 압도하며 미노 동부東美濃 / 토오토우미遠江 / 미카와三河 지방을 침식해나갔다. 이에 노부나가信長는 위기감을 품고 카츠요리의 동향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텐쇼 3년(1575) 5월, 미카와 지방 나가시노長篠에서 타케다 군과의 결전이 벌어졌다.('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 이 전투에서 타케다 군은 대패大敗,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ㆍ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를 위시한 신겐信玄 시대 이래의 숙장宿將들과 수많은 장졸將卒들을 일거에 상실하는 통렬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같은 해 연말까지 이어진 오다ㆍ토쿠가와의 반격으로 미노 동부 / 미카와에 갖고 있던 영지를 모조리 상실했으며, 토오토우미 쪽에서도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타케다 군을 격파한 후 한동안 對 타케다 전쟁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고, 동맹자同盟者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카츠요리는 필사적으로 시나노信濃ㆍ미노ㆍ미카와 지방의 접경선에서 오다ㆍ토쿠가와 세력을 방어하며, 이 이상의 영지 실함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텐쇼 6년(1578) 3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급사急死하여 그 양아들인 카게카츠(景勝, 켄신의 조카)와 카게토라(景虎,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의 동생)가 후계자 자리를 다투는 내전('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 발발하자, 타케다 카츠요리는 카게카츠와 코에츠 동맹(甲越同盟, 역주 : 타케다 - 우에스기 동맹)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타케다와 호죠 두 집안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텐쇼 7년(1579)에 이르러 결국 코소동맹(甲相同盟, 역주 : 타케다 - 호죠 동맹)이 파탄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유명 BL소설《불꽃의 미라쥬》해후편(출처 : 일본 아마존 '炎の蜃気楼')
주인공 오기 타카야가 우에스기 카게토라환생자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카츠요리는 칸토 북부의 여러 다이묘들과 동맹을 맺고 호죠 씨를 포위하였다. 이에 맞서 우지마사는 오다 노부나가ㆍ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카츠요리를 역포위하였다.

  타케다 씨는 코즈케上野 / 무사시武蔵 방면의 전투에서 우위에 서긴 했으나, 스루가駿河 / 토오토우미 방면에서는 힘겨운 상황에 빠졌다. 요충지인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에 보급을 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이에 이르러 카츠요리는 히타치 지방常陸国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를 중개역으로 삼아, 텐쇼 7년(1579) 11월 무렵부터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평교섭和睦交涉을 시작하였다.('코고 화여甲江和与')


  카츠요리의 시그널

  사타케 요시시게를 중개자로 삼은 코고 화여 교섭이 개시된지 얼마 안 된 텐쇼 7년(1579) 11월 16일, 스루가 지방에서 호죠 우지마사와 대진중이던 카츠요리는 적남 타케오마루武王丸의 성인식元服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을 중신重臣에게 지시했다. 이때 타케오마루는 13세. 성인식을 언제 치렀는지에 대한 정확한 날짜는 확실치 않으나, 카츠요리가 스루가에서 귀진한 때로부터 얼마 후였으리라 생각된다. 타로 노부카츠太郎信勝가 탄생한 것이다.

코야 산에 보관된 노부카츠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武田信勝')
《코요군칸》에 따르면 카츠요리는 노부카츠가 어른이 될 때까지의 임시 당주였다고.


  그리고 타케다 노부카츠武田信勝가 어른이 된 텐쇼 7년(1579) 말엽 ~ 텐쇼 8년(1580) 초두에 걸쳐 타케다 가문에선 일족 / 중신들의 관도官途ㆍ수령受領 명칭이 일제히 변경되었다. 예를 들자면,

타케다 사마노스케 노부토요武田左馬助信豊 -> 사가미노카미 노부토요相模守信豊
오야마다 사에몬다유 노부시게小山田左衛門大夫信茂 -> 데와노카미 노부시게出羽守信茂
아나야마 겐바노카미 노부타다穴山玄蕃頭信君 -> 무츠노카미 노부타다陸奥守信君
아토베 오오이노스케 카츠스케跡部大炊介勝資 -> 오와리노카미 카츠스케尾張守勝資
사나다 키헤에노죠 마사유키真田喜兵衛尉昌幸 -> 아와노카미 마사유키安房守昌幸

란 식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카츠요리가 이 시기에 노부카츠 성인식 / 타케다 가문 내 쇄신을 도모한 것일까? 이는 타케다 카츠요리가 은거隠居하고 노부카츠가 가독家督을 상속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행동이었다. 사실 이 이후 카츠요리는 가문 내에서 "은거자 님御隠居樣" 으로, 노부카츠는 "영주님お館様" 이라 불리게 되었다. 단지 노부카츠의 가독상속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그쳐, 실권은 여전히 카츠요리에게 있었다.

  그렇게까지 카츠요리가 노부카츠의 성인식 / 가독상속 / 가문 내 쇄신이라는 의식을 행해야만 했는가? 이는 코고 화여 교섭의 개시에 수반해 노부나가에게 보내는 카츠요리의 메시지적 의미가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노부카츠의 생모 류쇼인도노龍勝院殿는 오다 노부나가의 수양딸(養女, 실제로는 미노 나에기 토오야마 나오카도苗木遠山直廉의 딸)로, 타케다 - 오다 동맹('코비동맹')의 증표로서 타케다 가문에 시집 온 경위가 있었다. 즉 노부카츠는 오다 씨와의 연관성이 강한 인물이었단 말이 된다. 그렇기에 노부나가와 격렬히 대립해온 카츠요리가 타케다 씨의 당주에 머물러서는 코고 화여 교섭에 악영향이 갈 것, 이라 판단한 타케다 씨가 오다 씨의 여성을 생모로 둔 노부카츠를 새로운 영주님으로 앉힘으로써, 관계개선을 진지하게 바라고 있다는 걸 어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노부나가, 숙원宿怨을 풀다

  더 나아가 카츠요리는 교섭을 보다 원활하게 진척시키기 위해, 타케다 씨가 인질人質로 확보하고 있던 오다 겐자부로 노부후사(織田源三郎信房, 노부나가의 4남. 역주 : 고보마루御坊丸, 카츠나가勝長)를 송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교섭에 전혀 응하지 않아, 코고 화여 교섭은 텐쇼 8년(1580) 6월 경에는 결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텐쇼 9년(1581)에 들어서, 이번엔 노부나가와 관계가 깊던 임제종臨濟宗의 고승 난카 겐코우南化玄興를 중재역으로 삼아 동맹교섭을 재개했다.('코노 화목甲濃和睦') 그러나 교섭은 조금도 진전되지 못했고, 얼마 안 가 이 시도도 좌절되고 말았다.

  노부나가는 털끝만큼도 교섭의 여지를 내비치지 않았음에도, 타케다 씨의 사자使者나 중개자仲介者들을 문전박대하진 않았다. 이는 교섭을 하는 기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토오토우미 탈환작전을 지원해주기 위함이었다.

  요충지 타카텐진 성을 탈회할 수 있다면, 타케다 씨의 열세는 더욱 더 명확해진다. 그러나 카츠요리 본대가 토오토우미로 출병하면 이에야스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니, 그 때문에 타케다와의 화평교섭을 질질 끌도록 한 것이리라.

타카텐진 성터를 촬영한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高天神城')
 옛 이마가와 가문의 용장이였던 오카베 모토노부성주대리로 있었다.


  교섭이 행해지고 있는 시기엔 카츠요리도 오다 군과의 충돌을 회피할 것이기 떄문이다. 그 사이에 타카텐진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고립되기에 이르렀다. 항복降伏을 받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조차 무시당했다. "카츠요리는 아군의 어려움을 구해줄 능력도 없다" 는 걸 연출하기 위한 의도였다.

  극한상황에 몰린 타카텐진 성의 장병들은 텐쇼 9년(1581) 3월, 돌격突出을 감행했다 궤멸당했다. 카츠요리는 체면面目을 잃었고, 타케다 가신들과 토호들은 그를 버리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카츠요리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 성공한 노부나가는, 텐쇼 10년(1582) 2월, 시나노의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를 배반시킨 것을 계기로 타케다 영지 침공을 시작, 고작 1개월 남짓한 사이에 카츠요리를 멸망시켰다.

  노부나가는 타케다 신겐ㆍ카츠요리 부자에 의해 오랫동안 고생을 해 왔다. 그 묵은 원한宿怨을, 타케다 씨를 멸망시킴으로써 풀 수 있었던 것이다.


덧글

  • BigTrain 2019/10/27 20:51 # 답글

    왠지 나가시노 전투 후에 타케다 가문이 순식간에 쓸린 것 같지만 7년이나 걸렸군요.

    본거지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휘하 영주들의 불확실한 통솔이나 원칙없이 왔다갔다하는 동맹관계 등을 보면 신겐은 확실히 전국다이묘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9/10/27 22:50 #

    나가시노 이후 7년 동안 나름 살아남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결과적으로 허망하게 망했죠 ㅜㅜ

    신겐은 분명 전국시대 다이묘들 중에선 특급 능력자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 이상, 특히 천하를 차지할 만한 인물이었다고는 저도 역시 단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windxellos 2019/10/28 00:34 # 답글

    신겐에 대한 글들을 보면 20세기 말 즈음에 나왔다 싶은 것들에서는 '신겐님이 3년만 더 살아계셨어도 노부나가 따위...'라거나 '신겐님은 완벽했고 아무튼 카츠요리가 다 말아먹음' 같은 느낌이 많았는데 언젠가부터는 '내외적 역량을 고갈시켜 놓고는 죽은 타이밍만 귀신같아서 요행히 욕을 안먹음' 같은 분위기도 보이는 느낌입니다. 소개해주신 글에서도 묘하게 신겐 시절의 무원칙한 외교를 돌려까는 느낌이네요.
  • 3인칭관찰자 2019/10/28 09:33 #

    네. 근래 들어서 전체적인 분위기도 약간씩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겐을 까는 뉘앙스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글을 다름아닌 타케다 씨 전문연구자인 히라야마 유우 씨가 기고했다는 게 개인적으론 조금 놀랍게 느껴졌네요.
  • 담배피는남자 2019/11/24 15:28 # 답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는 썼지만 두는거마다 악수가 되는 가츠요리
    약간의 변수나 가능성조차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노부나가

    가츠요리가 애처롭기도 하지만 그런 가츠요리에 대응하는 노부나가의 정치/외교술은 정말 탑급이네요.
    성질이 급하다거나 쉽게 분노한다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감정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냉정한 분석과 판단 후 가장 효율적인 결정을 하는...
  • 3인칭관찰자 2019/11/24 18:07 #

    싸울 마음도 약해져서 화평교섭 모색하던 카츠요리에게 노부나가가 좀 무정한 짓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만 노부나가가 취한 대응 자체는 정말 능란했던 것 같습니다.

    성미 급하고 분노 잘 하는 면모가 있었다곤 하지만 자기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성질을 죽이고 차분하게, 인내심 있게 행동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보니 감정에 치우친 결단을 내리는 경우가 의외로 드물지 않았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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