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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독본》오다 노부나가와 타케다 씨武田氏 (上) 역사



  이 글은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의 잡지이자 말년에는 카도카와 계열의 잡지였던《역사독본 2015년 가을호 ~ 오다 노부나가, 천하포무의 충격 ~》p. 92 ~ 99페이지를 구성하는 히라야마 유우平山優 님의 글,【 노부나가와 타케다 씨신겐과 카츠요리 ~ 아버지로부터 對 노부나가 전쟁을 물려받은 후계자의 고투苦鬪 ~ 】를 번역한 것입니다. 책 내용 중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려 하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파란을 머금은 개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타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외교교섭을 시작한 건 에이로쿠 8년(1565)이었다. 그 이전에 두 집안 사이에 교섭이 있었는지 여부는 지금으로선 확인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접근한 건, 각자의 사정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는 오와리尾張 지방을 드디어 통일하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침공을 격퇴한 후 인접 지방인 미노美濃로 침공을 개시한 상태였다. 반면 신겐은 히다飛騨 지방 침공을 시도하고, 미노 동부東美濃의 토오야마 일족遠山一族을 상대로 영향력을 강화시켜 가, 결국 오다와 타케다의 세력권이 인접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코야 산에 보관된 신겐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武田信玄')
학설논쟁의 결과 과거에 통용되던 험상궂은 용모의 이미지많이 약화됨.


  노부나가는, 이마가와今川ㆍ사이토齋藤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서 또다시 타케다와 예기치 못한 충돌이 빚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동맹교섭을 결단했으리라 추측된다.

  반면 신겐은 호죠北条ㆍ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三国同盟을 체결한 상태로, 그 인연은 철벽처럼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3년(1560)의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合戦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에게 죽음을 당하며, 분위기에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氏真는 아버지 횡사 후 이마가와 가문 내부통제에 애먹으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자립과 미카와三河 토호들의 연이은 이반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된다.

  에이로쿠 6년(1563) 12월, 토오토우미 지방遠江国 히쿠마 성(曳馬城, 하마마츠浜松)과 즈다지 성頭陀寺城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이이오 부젠노카미飯尾豊前守를 수령으로 삼은 토오토우미의 토호들이 이마가와 씨에 반기를 든 것이다.('엔슈의 총극遠州忩劇') 이는 토오토우미 전역이 말려든 일대쟁란으로 발전했는데, 반란의 뒤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작이 있었다고도 하고, 신겐 쪽 역시 관여하고 있었다는 단서도 보인다. 어찌됐든, 난은 에이로쿠 9년(1566) 10월에 진압될 때까지 오래 지속되었다. 

  이는 이마가와 가문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이였다. 신겐은 이 상황을 보면서 이마가와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토카이東海 지역으로 진출하겠다는 결단을 내렸으리라 생각된다.

  노부나가가 신겐 쪽에 동맹同盟을 타전한 것은 에이로쿠 8년(1565), '엔슈의 총극' 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신겐은 노부나가와의 동맹(코비동맹甲尾同盟) 체결을 단행했다.(1565년 9월) 그리고 노부나가의 수양딸(본래는 토오야마 나오카도遠山直廉의 딸로, 노부나가의 여조카)이 신겐의 4남 스와 카츠요리(諏訪勝頼, 훗날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에게 11월 시집을 갔다. 신겐의 적자인 타로 요시노부太郎義信가 이 동맹에 반대하여 결국은 신겐을 암살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 10월에 관계자들이 체포ㆍ처형되었고 요시노부는 폐적당했다.(요시노부 사건義信事件) 이처럼 노부나가와 신겐의 동맹은 최초부터 파란을 머금은 전개 속에서 맺어졌다.


  신겐 멸망의 위기와 노부나가

  요시노부 사건의 발각은 타케다ㆍ호죠ㆍ이마가와 세 집안 사이의 삼국동맹에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다. 우지자네는 아버지 요시모토의 원수 오다 씨와 동맹을 맺은 신겐을 증오하게 되어, 관계의 냉각화로 이어졌다.

  에이로쿠 10년(1567) 8월, 시나노 지방에 출진중이던 타케다 신겐은 참진 중이던 가신들과 토호들을 상대로 자신에게 충절을 서약하는 기청문 제출을 요구했다.(흔히 말하는 '이쿠시마타루시마 신사 기청문生島足島神社起請文')

이쿠시마타루시마 신사 경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生島足島神社')
에서 언급된 기청문들은 지금도 이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0월 19일, 코후 토코사甲府東光寺에 유폐되어 있던 요시노부가 세상을 떠났다. 할복했다고도, 병으로 죽은 것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타케다 가문의 反 오다ㆍ親 이마가와파의 거두였던 요시노부가 사망하면서,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신겐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지자네는 여동생(요시노부의 미망인)을 코후로부터 맞아들여, 12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비밀교섭秘密交涉을 개시했다.

  이는 얼마 안 가 신겐에게 알려져, 우지자네의 동맹위반을 명분으로 스루가 침공이 단행되었다. 이 때 신겐은 노부나가의 중개仲介를 통해 오다의 동맹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더 나아가 이마가와 영지를 토쿠가와 씨와 함께 분할점령分割占領하기로 하는 데 합의했다.

  노부나가가 신겐의 스루가 침공을 용인한 건, 그 본인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봉대해 입경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동부전선을 안정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어찌됐든 이마가와 씨의 동향은 중요했고, 동맹자同盟者인 신겐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노부나가는 신겐의 스루가 침공과 이마가와 영지 찬탈을 용인함으로써 배후를 안정시켜 두고 싶었으리라.

  이렇게 하여 노부나가의 입경전이 에이로쿠 11년(1568) 9월, 신겐ㆍ이에야스의 이마가와 영지 침공이 같은 해 12월에 각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작전은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신겐은 예상치 못했던 오산에 의해 위기상황에 몰리게 된다. 삼국동맹의 일각을 구성하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가 신겐의 스루가 침공에 격노하여 동맹파기同盟破棄를 통고, 對 타케다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마가와 공격 당시엔 공동전선을 펼쳤던 토쿠가와 이에야스와도 대립하게 되면서, 신겐은 영지의 사방을 적 세력에게 포위당하게 되는 위기에 빠졌다.

  이렇게 되자 신겐은 새로운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에게 어느 인물과의 화평을 중개해줄 것을 의뢰했다. 그 인물은 바로 신겐의 숙적인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신겐은 어떻게든 켄신과의 화평을 실현해야 한다고 노부나가를 채근하며,【 이대로 가면 신겐은 멸망해 버린다 】는 비명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신겐은 관계가 악화된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그가 호죠나 우에스기와 손을 잡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주길 기대하겠다. 】며 노부나가에게 못을 박았다.

  그 결과 에이로쿠 12년(1569) 7월, 신겐은 우에스기 켄신과 '코에츠 화여甲越和与' 를 체결하여 위기상황을 탈피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야스 쪽 역시 신겐과 단교했음에도, 타케다 영내로 출병하지는 않았다. 노부나가의 제지가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織田信忠')
10대 이래 후계자로 철저히 공인되어 자랐기에 계승권 다툼의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겐키 원년(1570) 10월, 우에스기 켄신과 동맹을 체결했다. 이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신겐과의 동맹을 파기하도록 진언하겠다. 】【 타케다ㆍ오다의 혼례(신겐의 딸 마츠히메松姫와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의 약혼)를 파담破談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 】고 우에스기 켄신에게 약속하였다.

  신겐은 이를 '간사한 자의 참언佞者の讒言' 이라고 격렬히 비판하며 노부나가에게 이에야스를 버릴 것을 요구했으나, 노부나가는 말을 바꿔가면서 이를 곧이듣지 않고 이에야스의 움직임을 묵인했다. 신겐은 이에 불신감을 품고서 노부나가와의 동맹파기ㆍ이에야스 공략을 시야視野에 넣기 시작했다.


  돌연한 관계단절

  겐키 2년(1571) 12월, 신겐은 스루가를 침공한 이래 대립관계에 놓여 있던 호죠 씨와 동맹을 다시 체결했다. 이는 우지야스의 뒤를 이은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쪽의 타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겐은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에서 해방, 드디어 오다 노부나가 / 토쿠가와 이에야스 타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겐키 3년(1572) 7월, 신겐은 오쿠미카와(奥三河, 역주 : 미카와 동북부)의 야마가 산보슈(다미네 스가누마田峯菅沼 / 나가시노 스가누마長篠菅沼 / 츠쿠데 오쿠다이라 씨作手奥平氏)에게 뒷공작을 하여 은밀히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미노 엔도 씨美濃遠藤氏, 얼마 후에는 히다 미츠키 씨飛騨三木氏ㆍ에마 씨江馬氏까지 아군으로 포섭했다.

  이로써 신겐은 동맹자인 에치젠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 오우미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 등과 원활한 외교교섭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浅井長政')
쇼군의 어머니가 된 셋째 딸 고우 덕에 종 2위 관위를 추증받았다.


  이 시기 신겐은 노부나가로부터 혼간사와의 화평을 중개해줄 것을 의뢰받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까지 진심이었을진 알 수 없다. 결국 화평중개의 움직임이 거의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케다ㆍ오다 두 집안은 충돌했다.

  한편 신겐은 쇼군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에게, 우에스기 켄신과의 화평조정을 의뢰하였다. 노부나가는 이를 진심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움직였고, 켄신도 '코에츠 화여' 에 긍정적으로 임해, 10월 6일 시점에서 화평의 실현은 코앞에 다가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 직후, 신겐은 켄신에게 "노부나가를 중개자로 한 화평은 불가능하다.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중개한다면 이야기는 별개겠지만." 이란 통고通告를 하여, 이를 계기로 '코에츠 화여' 는 파탄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신겐의 통고는 중개자였던 노부나가에겐 한 마디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기실 타케다 군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겐은 같은 해 10월, 군대를 소집하여 토쿠가와의 영지인 토오토우미 지방으로 출진했다. 노부나가에게 일절의 통지도 없이 타케다 군이 갑자기 동맹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격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기에 노부나가는 경악하고 격노했다.

  노부나가는【 신겐의 소행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무도함 그 자체로, 무사로서의 의리를 모르는 행위다. 앞으로 미래영겁未來永劫에 이르기까지 신겐과 손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분노로 가득한 편지를 우에스기 켄신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신겐은 동맹파기 통고(관계단절 문서)조차 하지 않고서 전쟁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노부나가의 이 분노가 훗날의 타케다 씨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노부나가ㆍ이에야스와의 대결을 결단한 신겐을 보고 우에스기 켄신은【 그들과 대결하려는 건 그야말로 벌집 속에 손을 쑤셔박는 행위다. 그런 선택을 하다니 신겐의 운도 다한 거라고밖엔 볼 수 없겠지. 】라는 내용의 편지를 가신 카와다 나가치카河田長親에게 써 보냈다. 켄신조차도, 날마다 세력을 더해가던 노부나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건 아무리 신겐이라 해도 고난의 길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겐은 그 길을 걷기 전인 텐쇼 원년(1573) 4월에 진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후계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에게 넘겨졌다.


덧글

  • 차가운 도시남자 2019/10/27 11:19 # 답글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이런 디테일한 부분은 잘 모르고 그저 노부나가가 신겐에게 당장 싸우지 않으려고 극진히 대하며 설설 기었다는 식으로만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신겐이 참 무도한 자였군요.

    동맹파기 통보라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막 나가니 그 보복을 받지요.

    단순 인성만이 아니라 원래 부하들 입김이 센걸 서약서 받아가며 간신히 끌고가던 집단이라 신겐즈음이 그 집단의 성장한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들대에서는 그런 부하들이 쉽게 많이 이탈하였지요.
  • 3인칭관찰자 2019/10/27 15:52 #

    노부나가가 가급적 신겐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저자세를 보였던 건 사실인 것 같긴 합니다.

    뭐 신겐 입장에선 자기보다 약했던 동맹자가 일거에 중앙으로 진출해 중앙정계를 주도해나가는 데 대한 대항심과 경계감도 있었을 테고 제가 생각하는 신겐의 이미지라면 토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노부나가의 동맹자에서 종속자가 되는 걸 받아들일 인물은 절대 아니라고 봐서 ㅎㅎ

    단지 말씀대로 예의도 안 지키고 뒷통수를 노부나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때렸는데 그건 욕먹어도 싸다고 봅니다. 거기다 그 직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덤터기는 그 아들 카츠요리가 다 뒤집어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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