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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독본》오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씨三好氏 (下) 역사



  이 글은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의 잡지이자 말년에는 카도카와 계열의 잡지였던《역사독본 2015년 가을호 ~ 오다 노부나가, 천하포무의 충격 ~》p. 60 ~ 67페이지를 구성하는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님의 글,【 노부나가와 미요시 씨 - 나가요시와 요시츠구 ~ 텐카비토를 계승한 요시츠구 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후계자 ~ 】를 번역한 것입니다. 책 내용 중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려 하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노부나가가 계승한 나가요시의 정책

  이후 나가요시는 갖가지 요구를 (아시카가足利) 요시테루義輝에게 들이밀었다. 오오기마치 텐노正親町天皇의 칙허勅許까지 받아가며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의 가신이자 남조南朝의 유신遺臣이었던 쿠스노키 마사토라楠木正虎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북조北朝의 수호자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정당성正當性을 실추시켰다.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足利義輝')
허울뿐인 괴뢰 쇼군으로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토벌 때 세운 공적으로 고다이고 텐노後醍醐天皇로부터 배령받은 오동나무 문장桐の紋을 나가요시 역시 배령받음으로써 미요시 가문三好家의 격식을 아시카가 쇼군 가문足利将軍家과 맞먹는 수준으로 향상시키려 했다. 거기에다 요시테루의 딸을 인질人質로 잡아두어 상하관계를 확실히 해두었다.

  이와 같이 막부를 극복하려 했던 나가요시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였다.

  훗날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로부터, 무로마치 막부의 명가인 잇시키 집안一色家의 가명을 계승했던 사이토 요시타츠斎藤義龍나 우에스기 집안上杉家의 가명을 계승했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처럼 높은 격식을 갖춘 가문을 물려받으라며, 명문가인 시바 집안斯波家의 가독家督을 상속받도록 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거부하면서 나가요시와 마찬가지로 오동나무 문장만을 배령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요시아키의 최초 거병을 제압했을 때는 요시아키의 아들ㆍ기진義尋을 인질로 잡은 후에야 그를 용서해 주었다. 나가요시가 요시테루의 딸을 인질로 잡음으로써 상하관계를 확실히 했던 것을 방불케 하는 행동이라 하겠다.

  그리고 두 번째로 거병한 요시아키를 교토京都에서 추방한 후 노부나가가 곧바로 취한 행동이, 오오기마치 텐노에게 상신하여 '텐쇼天正' 로 연호를 고치도록 결정케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가요시와 히사히데가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던 쿠스노키 마사토라를 자기의 유히츠(右筆, 비서)로 등용하였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足利義昭')
허울뿐인 괴뢰 쇼군으로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2)


  노부나가가 막부를 극복하기 위해 취했던 이와 같은 정책의 원형은 나가요시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신쵸코우키信長公記》1권의 서두는 나가요시가 요시테루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나가요시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나, 이 정보가 비닉되었기에 저자인 오오타 규이치와 당시의 오다 가문은 나가요시가 요시테루를 살해한 걸로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신쵸코우키》는【 천하의 싯켄天下執権 】인 나가요시에게 요시테루가【 모반御謀反 】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암군暗君인 요시아키가 노부나가를 배신했기 때문에 추방하였다는 주장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귀공자 요시츠구의 등장

  미요시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던 가운데, 나가요시는 에이로쿠 7년(156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건 양아들 (미요시三好) 요시츠구義継였다. 요시츠구는 나가요시의 동생 소고 카즈마사十河一存의 아들이었는데, 그 외에도 후계자 후보들은 많았다. 그 중에서 요시츠구는 어머니가 칸파쿠関白 쿠죠 타네미치九条稙通의 수양딸인 공무公武 쌍방에 걸친 귀공자로, 역시 칸파쿠를 지냈던 코노에 히사미치近衛尚通의 딸을 어머니로 두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 간주되어서였을 것이다.

미요시 요시츠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三好義継')
후세의 평가는 좋지 않으나 그가 25세밖에 살지 못했던 점도 감안해야...


  그리고 요시츠구는 에이로쿠 8년(1565) 5월 19일, 백주대낮에 당당히 요시테루를 살해했다. 이 사건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새벽에 노부나가를 기습奇襲한 것과 같은 꺼림칙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요시츠구는 자신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위대한 양아버지의 노선을 계승하여 2백 년간 계승되어 온 아시카가 쇼군가를 정점에 둔 무가사회의 질서와 의식을 타 넘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츠구는 미요시 가문의 내부를 굳건히 다지지 못했다. 중신들의 의견은 대략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장로인 미요시 나가야스三好長逸는 요시츠구를 지지하였으나, 신참에서 입신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요시테루 살해에 가담하지 않고 보호하에 두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괴뢰화시키는 노선을 지향했다. 반면 후다이 중신譜代重臣인 시노하라 나가후사篠原長房는 요시테루와 적대하고 있던 아와阿波 지방의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를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외부에서는 요시테루가 살해당한 직후부터 키이紀伊 지방의 하타케야마 아키타카畠山昭高에 의해 요시아키를 옹립한 막부 재건이 제창되어,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 타케다 요시즈미武田義統 / 오다 노부나가 등과 연계한 미요시 포위망三好包囲網이 형성되고 있었다.

  결국 14세에 불과했던 요시츠구는 이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수습하지 못했고, 미요시 가문은 분열되어 내분을 거듭했다.

  에이로쿠 11년(1568) 연초 단계에서 키나이 지역의 정세는 14대 쇼군 요시히데를 옹립한 미요시 3인중(미요시 나가야스ㆍ미요시 소이三好宗渭ㆍ이와나리 토모미치岩成友通) + 시노하라 나가후사 vs 아시카가 요시아키ㆍ오다 노부나가와 결탁한 미요시 요시츠구 + 마츠나가 히사히데 두 파벌로 2분된 상태였다.

  막부 토벌을 지향하던 요시츠구가 아이러니하게도 요시아키를 옹립해 막부를 재건하려 하던 노부나가의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아키ㆍ노부나가ㆍ요시츠구ㆍ히사히데의 관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히사히데 지원은《와다케분쇼和田家文書》《타몬인닛키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이미 에이로쿠 9년(1566)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이로쿠 11년(1568)에 요시아키와 노부나가는 히사히데ㆍ요시츠구의 측면지원을 받으면서 결국 입경을 달성했다.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에게 적대하였다가 항복한 걸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으나, 기실 그들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동맹자同盟者였다.

  이러한 과정을 증명하듯, 쇼군 요시아키로부터 "아버님" 이라 불리던 노부나가는 요시츠구와 요시아키의 여동생 사이의 결혼 중매를 맡았고, 자기 아들 (오다) 노부타다信忠와 결혼시키겠다는 명목으로 히사히데의 딸을 기후岐阜에 머무르도록 하여 요시아키ㆍ노부나가ㆍ요시츠구ㆍ히사히데는 의사적인 가족관계에 기반해 굳건히 결속하였다.

  그러나 겐키 2년(1571)에 요시아키가 히사히데의 정적政敵ㆍ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를 중용하자 요시츠구ㆍ히사히데가 요시아키를 떠나갔다. 이 때의 요시츠구ㆍ히사히데는 反 요시아키이긴 했으나 노부나가와는 직접적인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겐키 4년(1573)에 요시아키가 노부나가를 버리고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의지하여 거병하였다 패배하자, 그는 매부인 요시츠구 밑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후 요시아키는 키이 지방으로 떠났으나, 노부나가는 자신에게 적대한 요시아키를 받아준 요시츠구를 용납하지 않아, 결국 요시츠구는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아 자결하였다.


  마지막에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 란 인장을 사용하여, "이른 시기부터 일본 전국을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 인장은 오토모大友 / 모리毛利 / 우에스기上杉 / 사타케佐竹 / 다테伊達 같은 수많은 다이묘大名들을 상대로도 찍혀 송신되었으니, 만약 내용이 그런 의미였다면 이는 선전포고宣戰布告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천하포무' 도장(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織田信長')


  그렇지는 않고, 당초는 '막부를 재건하기 위해 키나이를 침공하겠다' 는 의미였다가, 요시아키를 추방한 후에는 '키나이를 무력으로 평정하겠다' 는 선언으로 전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느닷없이 독창적인 주장을 내걸고 전국통일에 달려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 좋게 말하면 선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나 때가 일렀던 나가요시ㆍ요시츠구의 정책이 사회에 수용되어가는 상황을 노부나가는 신속히 간파하여, 그들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착실하게 막부 타도를 진척시켜 간 것이다.

  텐카비토인 나가요시의 시야에 노부나가는 아직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부나가에게 나가요시는 위대한 선구자였다.

  미요시 가문의 내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집중하고 있던 요시츠구ㆍ히사히데 입장에서 노부나가는 최대의 동맹자였다. 그 후, 노부나가는 요시츠구의 중매인이 돼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요시츠구와 노부나가 간에는 본래 대립할 만한 요소가 없었다. 그러나 요시아키에게 현혹되면서, 예전에 쇼군을 살해한 요시츠구가 이제부터 쇼군을 쓰러뜨리려 했던 노부나가와 의도하지 않았던 대립을 하다 멸망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참고문헌>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미네르바쇼보ミネルヴァ書房, 2014년 출간)
 

덧글

  • 함부르거 2019/10/19 22:47 # 답글

    미요시 가문이라면 신장의 야망 초반부에 먹고 넘어가야 하는 잡캐, 아니면 잘해야 초반 보스 정도 이미지였는데 말입니다. ^^;;;;;;; 의외로 짱짱한 데가 있었네요. 하긴 백주 대낮에 쇼군을 대놓고 죽일 정도면 보통 집안은 아니었겠죠.
  • 3인칭관찰자 2019/10/20 10:03 #

    막부 쇼군을 괴뢰화시킨 주군 칸레이 호소카와 집안의 내분에 편승해 쇼군과 주군을 무릎 꿇리고 약 20년 간 교토 주변 지역을 지배했지요. 아시카가 쇼군과 호소카와 칸레이에 이어 칸레이의 집사였던 미요시 나가요시가 실권을 쥐면서 일본 중앙정권의 권력 하강 현상도 확고해졌죠.

    당대 사람들에게 "천하의 주인" 이라 불릴 정도의 권력을 누린 사람치고는 후대의 평가도 인지도도 미묘하긴 합니다. ^^ 특히 후배격인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에 비하면 ㅜㅜ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 deokbusin 2019/10/20 00:10 # 답글

    처음 뵙겠습니다.

    일본 소설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서 연재중인 대체역사소설 "아후미노우미 일렁이는 물결(https://ncode.syosetu.com/n9975de)"에서는 주인공인 쿠츠키 모토츠나가 쇼군 요시아키 상대로 고쇼마키를 할까, 하고 푸념(?)하니 가신들이 기겁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작가에 따르면 고쇼마키는 무로마치 막부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사건인데, 정이대장군 거처를 가신이 병사를 동원해서 포위하고는 요구를 장군이 들어줄 때까지 포위를 풀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초의 고쇼마키는 아시카가 타카우지 상대로 코노 모로나오 형제가 형에게 도망친 아시카가 타다요시를 죽일 목적으로 내놓으라고 한 것이라네요.

    결국 타다요시가 출가하는 것으로 고쇼마키는 풀렸지만, 이게 주군에게는 반역에 가까운 짓이라서 타카우지도 나중에 코 일족을 족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만, 작가 서술의 뉘앙스로 볼 때 고쇼마키는 이후에도 몇 번이고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에이로쿠의 변도 미요시 측이 고쇼마키를 하다가 일이 꼬이면서 장군 살해로 간 게 아닐까라는게 주인공의 생각을 빌린 형태로 작가가 추측하더군요. 고쇼마키도 결국은 장군이 살아 있어야 반역에 가까운 무리한 행동일지라도 정당한 호소가 받아들여 졌다고 보여질 수 있는데, 고쇼마키 과정 중에서 장군이 죽기라도 한다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진짜 반역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장군을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고쇼마키가 막부 초기부터 몇 번이고 일어난다는 무로마치 막부는 대체 얼마나 허약한건지, 오우치 요시오키나 미요시 나가요시는 그래도 아시카가씨와 무로마치 막부를 존중하고 있었구나 싶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9/10/20 11:24 #

    네. 안녕하세요.(__)

    일본의 투고 사이트에 쿠츠키 모토츠나를 주인공으로 삼은 대체역사소설이 있는 모양이군요. 2만 석 다이묘답지 않게 아시카가 쇼군가, 노부나가, 이에야스 등과 얽히며 일본 전국시대에서 그 나름대로 존재감을 갖고 있던 인물이니.

    고쇼마키는 말씀대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남북조+전국시대 포함)에 그 대부분이 일어났지요. 주군에 대한 위압, 위협이나 다름없지만 초대 쇼군 타카우지의 집사 코노 모로나오가 전례를 만든 이래 적지 않게 비슷한 시도가 일어났죠. 그 나름대로 위협효과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쇼군이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위해가 미칠 위험도 있었겠지요.

    결국은 무로마치 막부가 태생적으로 유력 다이묘들을 압도할 만한 절대적인 실력을 갖지 못한데다 남조와 정통성을 다투는 반쪽짜리 정권이었던 데도 원인이 있으며, 당시 사회에 팽배했던 기성권위의 붕괴, 반 권위의식의 만연, 상속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 구 카마쿠라 고케닌들과 신흥 세력의 대립 심화현상도 한 몫을 했겠지요.

    그런 부담을 안고 있었다면 정권을 운영하던 아시카가 집안이 강력한 결속을 이루어야 했을텐데, 집사 모로나오는 고쇼마키의 선례를 만들었고 / 축출된 타다요시는 모로나오에게 복수하려고 철천치원수였던 남조에 귀순해 막부에게 칼을 들이대었고 / 타카우지의 서자였던 타다후유도 타다요시에게 동조하는 등, 쇼군 일가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지요. 이런 면에선 무로마치 막부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파파라치 2019/10/20 14:51 # 답글

    난세이면서도 전통적 사고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던 전국시대에 전례없는 일들을 거침없이 해치우는 혁명가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노부나가에게도 본받거나 적어도 참고하고자 할 가까운 사례가 있었다니, 역시 하늘아래 새것은 없는 법이군요. 더구나 그 참고 사례가 듣보잡 내지는 노부나가가 입경하면서 단숨에 정리해버린 잡것들 취급받는 미요시 가문이라니... 역시 고정관념을 뒤집는 역사 연구는 재미있습니다.

    올려주신글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9/10/20 20:46 #

    요즘엔 그 '혁명가적 이미지' 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연구자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라쿠이치 라쿠자를 가장 먼저 실시한 게 롯카쿠 집안으로 노부나가는 롯카쿠 등이 이미 행했던 정책을 벤치마킹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듯, 노부나가의 혁신적인 정책에는 원형이 따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노부나가의 업적은 창조적으로 이를 고안해냈다기보단 이를 벤치마킹해 절묘하게 써먹었던 데 있었다, 는 식으로요.(요즘의 사카모토 료마 평가도 이와 비슷하긴 합니다)

    히데요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의 방식을 참조했듯이 노부나가 역시도 전임 텐카비토였던 미요시의 수완과 정책에서 적지 않게 배웠다는 요즘의 주장도 그런 재평가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잊지 않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 2019/10/21 12: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10/21 14:5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9/10/26 10: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10/26 12: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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