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독본》오다 노부나가와 미요시 씨三好氏 (上) 역사



  이 글은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來社의 잡지이자 말년에는 카도카와 계열의 잡지였던《역사독본 2015년 가을호 ~ 오다 노부나가, 천하포무의 충격 ~》p. 60 ~ 67페이지를 구성하는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님의 글,【 노부나가와 미요시 씨 - 나가요시와 요시츠구 ~ 텐카비토를 계승한 요시츠구 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후계자 ~ 】를 번역한 것입니다. 책 내용 중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려 하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서문

  18세기 초두에 프랑스의 지리학자 샤트란シャトラン은 세계 속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여《역사지도첩歴史地図帳》을 편찬, 네덜란드オランダ에서 출판했다.

  그 삽화 중 하나인 '일본 통치자의 변천' 에는 계통수 형태로 일본 중앙정권을 주최하던 자들이 DAYRO(內裏, 조정)부터 CUBO(公方, 아시카가 쇼군足利将軍), MIOXINDONO(三好殿, 미요시 님), NOBUNANGA(信長, 노부나가), FIXIBA TAIOCOSAMA(羽柴太閤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FANDEYORI(秀頼, 히데요리), DAIFUSAMA(内府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TOXO-GUNSAMA(토쿠가와 님) 순으로 변화하였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후 에도 막부가 안정될 때까지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다섯 명의 텐카비토天下人가 존재했다는 것이 당시의 역사관歷史觀이었다.

  이들 가운데 홀로 이채異彩를 띠는, 노부나가 이전의 텐카비토로 이름을 올린 미요시 나가요시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미요시 나가요시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三好長慶')


  미요시 가문三好家은 아와阿波 지방 출신으로, 나가요시 대에 들어 득세한 일족이었다. 나가요시는 아버지 (미요시) 모토나가元長를 모살한 주군主君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와 13대 쇼군將軍인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를 교토京都에서 추방追放하고, 킨키近畿 지역과 시코쿠四国에 걸친 십 수 개 지방을 세력하에 편입시킨 인물이다.

  당시의 '천하天下' 라는 단어엔 "일본 전국日本全国" 이라는 의미도 있었으나, 보다 보편적으로는 "교토와 그 근변지역" 이라는 의미로 쓰여 현재의 '수도권首都圏' 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감각과 유사했다. 그리고 당시엔 스오우周防의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가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사가미相模의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가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義氏를,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아시카가 후지우지足利藤氏를 봉대했듯, 적지 않은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가 출병할 때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삼기 위해 아시카가 일족을 옹립擁立하여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상식적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아시카가 일족을 봉대하지 않고 '천하' 를 지배한 나가요시는 그야말로 텐카비토였던 것이다.


  에도 초기의 인물들이 본 나가요시와 노부나가

  에도 시대江戸時代인 엔호 8년(1680)에 쿠니에다 세이켄国枝清軒이 집필한 군담물《부헨바나시키키가키武辺咄聞書》에 나가요시와 노부나가가 얽힌 일화가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끝난 후 대지大志를 품게 된 노부나가는 교토로 올라가 천하의 형세를 지켜본 후, 아시카가 씨의 권위가 쇠퇴하고 천하가 전적으로 나가요시의 마음대로 되어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노부나가는 나가요시의 가신이 되기를 원하였고, 나가요시도 노부나가 같은 용사勇士라면 환영한다며 기뻐했으나, 나가요시의 중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반대하였기에 노부나가는 허무하게 오와리尾張로 돌아갔다. 】는 이야기다.   

  그리고,【 교토를 점령한 노부나가가 나가요시 밑의 요리사였던 츠보우치 아무개坪内某에게 음식을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맛을 보고 너무 밍밍하다고 화내며 츠보우치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츠보우치의 필사적인 요청에 의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고, 이번에는 음식의 풍미가 괜찮았기에 요리사로 등용했다. 훗날 츠보우치가 "첫 번째 요리는 미요시 가문풍의 화사한 맛이었고, 두 번째 요리는 시골풍의 맛이었다." 는 내막을 공개하자,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노부나가에게 치욕恥辱을 안겼구만!" 이라며 다들 웃었다고 한다. 】는 이야기도 수록되었다.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의 일화도 사실이 아니라 보나, 세이켄이 이와 같은 일화를 창작한 배경을 생각해보면 에도 시대 초기 사람들이 노부나가보다도 나가요시를 높게 평가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입경한 노부나가가 관찰했던 나가요시

  현실에서 나가요시와 노부나가는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 따르면,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동생 나이토 소쇼(内藤宗勝, 마츠나가 나가요리松永長頼)의 요리키 아카자와 카가노카미赤沢加賀守가 칸토 지역에서 매를 구해와 탄바丹波 지방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노부나가에게 한 마리를 헌상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면 나가요시는 노부나가에게 흥미를 갖고서 접촉을 시도했던 듯하다.

  그러나 나가요시는 노부나가보다 12세 연상으로, 노부나가가 아직 오와리 시대였던 에이로쿠 7년(1564)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구체적으로 노부나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여부까진 거의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반대로 노부나가는 나가요시에게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에이로쿠 2년(1559), 노부나가를 포함한 각지의 다이묘大名들이 줄줄이 입경하였다. 2월에는 노부나가가, 4월에는 사이토 요시타츠(斎藤義龍, 훗날의 잇시키 요시타츠一色義龍)와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훗날의 우에스기 켄신)가 입경했다.

사이토 요시타츠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斎藤義龍')


  이 시기에 다이묘들의 입경이 줄을 이었던 건, 작년에 나가요시와 쇼군 요시테루가 싸움을 벌인 데 원인이 있었다.

  그 해(1558) 2월, '코우지弘治' 란 연호가 '에이로쿠永禄' 로 바뀌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관습에 따르면 연호 변경은 텐노와 쇼군의 합의에 의해 행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오오기마치 텐노正親町天皇는 나가요시에 의해 5년 동안이나 교토에서 내쫓겨있던 요시테루가 아닌, 나가요시와 상의한 끝에 연호 변경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쇼군 쪽이 연호 변경을 따르지 않고 옛 연호를 계속 사용하는 이상한 사태로 발전한 게 바로 이 시기였다.

  반면 나가요시는 새로운 무가武家의 대표자로서 텐노에게 승인을 받은 모양새였다. 반 년 후 결국 요시테루는 연호 변경을 받아들여, 나가요시와 강화가 성립한 후 교토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텐노에게 부정당해버린 긴급사태緊急事態를 보고, 노부나가 등은 입경하여 스스로의 눈으로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요시타츠와 카게토라는 요시테루로부터 다양한 영전榮典을 수여받고서 '막부는 부활했다' 고 판단한 듯하다. 그러나 별반 영전도 받지 않고 곧장 교토를 떠난 노부나가는 오히려 막부의 멸망滅亡을 예감했던 게 아닐까.  


덧글

  • blackace 2019/10/13 19:39 # 답글

    TOXO-GUNSAMA는 도쇼구 사마 인가보네요
  • 3인칭관찰자 2019/10/13 21:33 #

    네. 아마도 죽은 후 토쇼구에 모셔진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언급하는 것 같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2567
551
348613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