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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드라마 '사나다마루'의 세계 (下) 역사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던 잡지인《文芸春秋 Special》의 2016년 봄호 p.18 ~ 23, 전국시대사의 유명한 권위자이신 후타키 켄이치 교수님께서 집필하신《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의 세계 ~ 대하드라마 14개 작품의 고증을 담당한 석학이 역사적 배경과 최대의 볼거리들을 철저히 안내한다 ~》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이 3년 전 NHK 대하드라마를 소개하는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후타키 켄이치二木謙一>

  1940년 도쿄 출생. 코쿠가쿠인대학国学院大学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코쿠가쿠인대학 교수. 토시마가오카여자학원豊島岡女子学園 교장 등을 역임. 저서로《오사카의 진大坂の陣》(츄코신서中公新書),《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츄코신서),《시대극과 풍속고증》(요시카와코분칸吉川弘文館) 등 다수의 책이 있다.


  필사적인 생존술

  이제부턴 앞으로의《사나다마루》볼거리를 말씀드리려 합니다만, 물론 저는 이제부터의 드라마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릅니다. 단지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일단 초반의 볼거리라면, 바로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필사적인 생존술サバイバル術이겠지요.

  이미 방영된 부분에 대한 복습도 겸하여 간단히 설명드리면, 서쪽에서 진군해온 오다織田ㆍ토쿠가와 씨徳川氏가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킵니다. 그러자 마사유키昌幸는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하여 영토의 일부를 보전받습니다만 3개월 후, 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이 터지면서 노부나가信長가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로 인해 생겨난 힘의 공백에 편승하여 카이甲斐ㆍ시나노信濃 점령에 나선 게 토쿠가와로, 마사유키는 우에스기上杉ㆍ호죠北条를 뒷배삼아 토쿠가와와 대치합니다만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타카시마 마사노부高嶋政伸)가 카이 지방을 침공하자 마사유키는 호죠를 배신하고 토쿠가와에게 귀순합니다.

우치노 세이요가 연기한 토쿠가와 이에야스(출처 : 나무위키 '사나다마루(드라마)')


  그러나 토쿠가와는 호죠와 화친을 진척시키는 가운데 "코즈케上野 지방은 호죠의 영토" 라는 걸 인정하고 사나다의 거점인 누마타 성沼田城을 호죠에게 양도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이를 거부한 마사유키는 이번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엔도 켄이치遠藤憲一)에게 붙어 토쿠가와와 관계를 단절합니다. 이 때, 19세였던 노부시게信繁는 우에스기에게 인질로 보내집니다.

  불과 얼마 사이에 오다 -> 우에스기 -> 호죠 -> 토쿠가와 -> 우에스기 순으로 줄줄이 동맹관계(라곤 해도 기댈 대상이자 주군)를 갈아치운 마사유키는 실로 방심할 수 없는 전국시대 무장戦国武将입니다만, 한편으로 전국시대는 의리義理가 높이 숭상받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사나다마루》에서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를 배신한 건 매한가지였음에도 이전부터 오다와 내통하고 있던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 에노키 타카아키榎木孝明)는 후대받고, 오다에게 겁먹은 나머지 돌연히 배반해버린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 누쿠미즈 요이치温水洋一)는 참살당하지요. 같은 배신이라 해도 신용도가 달랐던 겁니다.

  특히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는 거대 다이묘大大名 같은 경우는 오히려 의리가 두터워야 가신들의 신뢰와 존경을 얻기 쉬우므로 중요한 미덕이 되었습니다. 호죠 가문의 총수였던 호죠 우지츠나北条氏綱는【 사람 목숨이 한순간이라 해서 추호도 야비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며 '야비한 마음' 즉 배신과 같은 보기 흉한 추한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지요.

  훗날 마사유키를 히데요시秀吉가 "겉과 속이 다른 비겁한 자" 라 평했습니다만, 이것도 방심할 수 없는 자라는 플러스적 평가 절반에 경계심 절반이 합쳐진 평가라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에야스家康와의 긴장관계는 세키가하라関ヶ原 -> 오사카 전쟁大坂の陣으로 이어지며 드라마 후반의 메인 테마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선은 제 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지요. 토쿠가와 군徳川軍이 사나다의 본거지 우에다 성上田城을 공격해오면서 마사유키의 군략軍略이 빛을 발하는 모습은 커다란 볼거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노부나가의 후계자 쟁탈전을 마무리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등장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마사유키 역시 곧바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여 카게카츠 밑에 있던 노부시게를 이번엔 히데요시의 인질로 보냅니다.

  이로 인해 사나다 가문과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매개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에야스도 마사유키도 토요토미 가문에 직속한 신하이지만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에게 이에야스의 요리키다이묘与力大名가 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말하자면 통일된 군사행동을 취할 때는 이에야스의 지휘를 받지만 신분상의 관계는 대등한 겁니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마사유키를 요리키로 붙인 건 유사시에 이에야스 측의 움직임을 견제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게 노부유키와 노부시게의 혼인관계입니다.

  장남 노부유키信之는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내져 이에야스의 측근ㆍ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반면 히데요시의 인질이 된 노부시게는 히데요시의 측근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드라마에서 활약 중인 키리(きり, 나가사와 마사미長澤まさみ)와 우메(梅, 쿠로키 하루黒木華)는 둘 다 노부시게의 측실側室이지요.

  그리고 기이하게도 이러한 인연을 따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나다 가문의 부자父子들은 토요토미 편(마사유키ㆍ노부시게) vs 토쿠가와 편(노부유키)으로 분열됩니다. '천하를 둘로 나눈 전투' 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은 토쿠가와 / 토요토미 중 어느 한 쪽에 붙어서 싸울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중립中立도, 관망觀望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쿠키 가문九鬼家이나 나베시마 가문鍋島家처럼 토쿠가와 / 토요토미 쌍방에 붙음으로써 정세가 어떻게 굴러가든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획책한 가문도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나다 가문은 인척관계로 보나 인맥으로 보나 동서 양군에 양다리 걸치기 편리한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앞뒤가 다른 비겁한 자' 마사유키가 고심하여 준비한 책략이 아니었을까요?


  숨겨진 '볼거리' 는 있냐고요?

  후반부 최대의 클라이맥스라면 마사유키ㆍ노부시게 부자가 고작 2천 병력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진군하던 토쿠가와 히데타다 이하 3만 8천 대군의 발을 묶은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오사카 전쟁' 이겠지요. 이 장면들이 어떻게 묘사되는가는 드라마를 직접 보면서 즐기셨으면 합니다만, 저는 또 하나의 '숨겨진 볼거리' 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쿠도야마九度山' 입니다.

《사나다마루》의 각본가 미타니 코키 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三谷幸喜')
NHK 대하사극 각본을 맡은 건 2004년 방영된《신센구미!》이래 두 번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토요토미 편에 붙었던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노부유키의 필사적인 구명탄원운동 덕택에 죽음을 면하고 코야 산高野山 산기슭 쿠도야마에서 칩거蟄居할 것을 명 받았습니다. 이때 노부시게는 34세 / 마사유키는 54세로, 그떄부터 오사카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거의 14년에 달하는 유폐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쿠도야마에서의 14년을 미타니 씨가 어떻게 묘사할까. 아무래도 드라마하기 힘든 장면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수의 처첩들에 둘러싸여 형 노부유키에게 때때로 돈 부쳐달라는 편지도 보내고(어느 때는 편지에다 항아리를 딸려보내, 이 항아리에다 소주를 가득 부어 보내달라고 편지에다 적은 적도 있다고.), 마을 사람들과도 교류하는 노부시게의 모습은 미타니식 드라마에 딱 들어맞는 소재일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각본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할 무대가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오사카 전쟁에 대해 약간 언급하겠습니다.

  기실 오사카 전쟁은 일종의 제노사이드(ジェノサイド, 학살)였습니다. 당시 영국 상관의 직원이었던 리처드 위컴은【 12만 명이 학살당했고, 도주자들은 추적당하고 있다. 】(《케이겐 영국서간》) 고 기록했습니다.

불타는 오사카 성(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大坂の陣')


  이는 이에야스의 두 가지 전쟁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첫 번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시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의 목적이 바로 수많은 낭인浪人들을 토멸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세키기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적 측에 가담했던 다이묘大名 88명의 영지를 몰수했고, 감봉당한 자까지 합치면 93명의 다이묘가 처분당했습니다. 그 결과 거둬들여진 코쿠다카는 무려 630만 석(역주 : 당시 일본 전체 코쿠다카가 약 1,800만 석)에 달했다고 합니다. 영지 1만 석에 부과되는 군역이 250명 정도인 이상, 20만 명에 육박하는 실업자失業者가 생겨났다는 말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직전까지 죽고 죽이는 일상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으로 무장武裝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토쿠가와 정권이 치안治安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배제排除해야 했던 존재들이 되어 있던 겁니다. 오사카 성에서의 결전이란 그야말로 전국의 낭인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절호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겨울 전쟁冬の陣 / 여름 전쟁夏の陣 어느 쪽에서도 토쿠가와 세력은 적군의 약 2배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 결국 일방적인 싸움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코에이테크모에서 2016년 출시한 게임《전국무쌍 사나다마루》
(출처 : 일본 아마존 '戦国無双 ~真田丸~')


  그런 수라장에서 무사로서의 죽을 자리를 발견하여 토요토미 가문에 '의義' 를 지켜 싸웠던 노부시게의 존재는 커다란 것이었다 생각합니다. 그의 지극히 맑고 청정한 분투마저 없었다면 오사카 전쟁은, 훨씬 더 처참한 전쟁으로 기록되었겠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노부시게를 신격화시키고 천하의 명장으로 치켜 세웠던 건 이에야스의 교묘한 전후처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마사유키가 권모술수의 극한을 쏟아부어 존속시키려 했던 사나다 가문도 '의'에 목숨바친 노부시게 = 유키무라 덕택에 후대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명성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지智''의' 라는, 때로 상반되기도 하는 두 가지 원리를 중시하였던 전국시대를 잘 표현해주는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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