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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타케다 가문의 유산을 둘러싸고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5호(2002년 10월호) 52~67쪽의 기사인,《타케다 유령 쟁탈전武田遺領爭奪戰 ~ 카이ㆍ시나노 획득에 담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향한 포석 ~》을 번역한 것으로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582년 3월에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그로부터 고작 3개월 후에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이ㆍ시나노 두 지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쿠가와ㆍ호죠ㆍ우에스기의 3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겐의 후계자 - 천하를 향한 대망大望]

  게릴라전 전개

  쿠로고마 전투黒駒合戦 이후로도 양군의 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8월 20일 코후츄古府中로 돌아갔다. 쿠로고마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장병들을 포상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날, 이에야스는 카이甲斐ㆍ시나노信濃 지방의 옛 타케다 신하들에게 기청문起請文을 거두어들이며 토쿠가와 가문에 신하로 복속하겠다는 뜻을 확인받았다. 그 수는 통설에 따르면 895명(《大日本史料》)이며, (역주 : 영지&신분) 보장문서安堵狀들을 베이스로 삼은 도바시 지쥬土橋治重 씨의 조사에 따르면 1,2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 기청문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타케다의 옛 신하들을 완전히 막하에 편입시킨 것이다.

키소 요시마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木曾義昌')

시나노 지방의 혼란 속에서 이 인물도 주군을 다섯 번이나 바꿨다.
칸토 입봉 때 이에야스에게 보복당해 1만 석 소영주로 전락하지만.


  8월 22일엔 이이다 성飯田城의 시모죠 요리야스下条頼安에게 편지를 보내, 키소 군木曽郡의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와 협력하여 이나 방면伊那口을 굳게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호죠北条 측과 기맥을 통하고 있던 키소 씨는 이 시점에서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있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쿠로고마 전투가 영향을 끼쳤으리란 건 거의 확실하다.

  와카미코若神子 방면에서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가 '카리타 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선에 마묘우다 성채大豆生田砦를 축조했다. 적 측의 농작물을 거두어 취하는 카리타는 대진이 벌어질 경우 상투적으로 일어나는 수단이나, 호죠 군의 경우엔 자군의 병량을 보충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모양이다.

  매일같이 지속되는 카리타에 속을 썩이고 있던 이에야스는 오오스카 야스타카大須賀康高에게 내부 정찰을 명하여 성채의 동정을 살피게 한 후, 8월 28일에 스스로 출진하여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 카리타를 하러 나온 호죠 군을 급습한 후 도망치는 적 병사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성채에 있던 호죠 병사들이 활ㆍ화승총 등을 쏘며 응전했으나 토쿠가와 군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성채로 돌입하였다. 오오스카 야스타카 막하의 구제 히로노부久世広宣가 최선진에 서서 돌입ㆍ활약하였던 내용이 여러 서적에서 확인된다. 토쿠가와 군은 호죠 군을 구축하고 성채를 탈취했으나, 확보하는 일 없이 그대로 철수했던 모양이다.

  와카미코에 포진하고 있던 호죠 군의 보급로는 카이 지방을 크게 우회하는 것이었기에, 스와諏訪를 경유하여 사쿠佐久로 접어들어, 거기서 코즈케上野 지방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루트를 거쳐야만 했다. 장기체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호죠 측의 부담은 커져갔으리라.

  우지나오의 군대는 코즈케 지방에서 그대로 시나노로 침공했고, 더 나아가 카이 지방에까지 진군했다. 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알고 곧장 출격한 것이었기에, 충분한 보급부대를 준비하지 못했으리란 건 틀림없다. 그럼에도 압도적인 병력차를 앞세워 오다 군을 구축했고, 더 나아가서는 단기결전을 벌여 토쿠가와 군까지 격파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우지나오에게 있었기에 먼 거리를 진격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는 쿠로고마 전투에서의 패배로 무너지고, 장기체진 상황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이렇게 되면 대군을 보급해야 하는 쪽이 커다란 장애ネック를 짊어져야 한다.

  수적으로 열세한 이에야스는 이 약점을 노리기 위해 우지나오 주력군과의 싸움은 피하면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이에야스에게 유리했던 건 대진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 토쿠가와 측에 붙어버린 츠가네 집단津金衆의 홈 그라운드인 스타마須玉 주변이었다는 것이었다. 츠가네 집단을 선두에 세운 토쿠가와 군은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에구사코야(江草小屋, 시시쿠 성獅子吼城)ㆍ오비코야小尾小屋 등, 이쪽 지역에 축조된 호죠 측의 진지에 게릴라 공격을 쉴새없이 벌였다.

핫토리 마사나리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服部正成')
통칭인 '한조' 로 더 유명하며, 서브컬쳐에서는 종종 닌자 캐릭터로 나온다. 


  8월 하순 ~ 9월 상순에 츠가네 집단의 츠가네 타네히사津金胤久ㆍ오비 스케미츠小尾祐光ㆍ오비 마사히데小尾正秀ㆍ아토베 히사츠구跡部久次 등이 토쿠가와의 가신인 핫토리 마사나리服部正成와 함께 호죠 측의 거점이 되어 있던 에구사코야에 야습을 시도하여 이곳을 탈취했다. 호죠 측은 3천 병력을 동원하여 탈환에 나섰으나 츠가네 집단은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이를 요격, 수급 478개를 거두었다고 한다.

  토쿠가와 측의 우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치이사카타 군小県郡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호죠 편을 떠나 토쿠가와 쪽으로 변심했다. 동생 카즈노 노부마사加津野信昌와, 오랜 친구인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었다.《요다키依田記》에 따르면 '사나다 마사유키만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 앞일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고 생각한 노부시게가 두 번에 걸쳐 사자를 보냈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마사유키 본인이 사쿠 군 아시다芦田에 있던 노부시게를 찾아와 상의한 끝에 이에야스에게 복속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마사유키에게 보장문서를 보낸 건 9월 28일이었다. 이 사나다의 이반離反이 호죠 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우지나오 본군과 호죠 본 영지의 연락선이 단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9월 29일, 미타케 집단御嶽衆이 호죠 측의 거점이 되어 있던 오비코야를 공략하였고, 토쿠가와 측은 사쿠 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10월 20일에는 츠가네 집단의 코이케 사다타네小池貞胤가 무카와 집단武川衆ㆍ토쿠가와 원병 3천여 명과 함께 카마나시코야釜無小屋를 함락시켜 수급 1,100개를 거두었다. 카마나시코야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특정할 수 없으나, 호칭으로 짐작건대 카마나시 강변 주변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사쿠 방면에 이어 스와 방면에서도 호죠 씨는 열세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난의 종식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오다와라小田原에 있던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는 이에야스와 화친和睦하기로 결의했다. 코신甲信 두 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자군에게 불리한 것들 뿐이라, 이 이상의 대진은 무의미했다. 전략적으론 토쿠가와 측이 유리하다고는 하나 다행히도 우지나오의 본대는 아직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적이 없고, 여전히 수적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차의 힘은 이에야스로서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요소였고, 장기체진은 쌍방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 될 터였다. 그리고 카미가타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대립이 심각해지며, 그 영향은 이에야스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호죠 씨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코즈케 지방을 확보하는 것이지, 코ㆍ신 두 지방의 경우 '운이 따라주면'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왜냐면 호죠 가문 누대의 기본전략은 어디까지나 '칸토関東 지역을 제패'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코즈케 지방을 공략한 건 그 기본전략에 기반한 행동이었던 반면, 카이ㆍ시나노 지방은 어디까지나 전략권 밖의 지방이었다. 반면 이에야스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란을 헤쳐나가기 위해 코ㆍ신 두 지방의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양자의 이해利害가 일치했다. 이에야스와 우지마사는 10월 27일에 "카이ㆍ시나노를 토쿠가와의 영지로, 코즈케를 호죠의 영지로 삼는다" 는 입장을 상호확인, 28일에는 여러 다이묘들을 상대로 강화가 성립했다는 사자를 보내기로 하는 데 합의하고, 29일엔 인질을 교환한 후 양군이 철수를 개시했다.

누마타 성혼마루가 있던 곳(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沼田城')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 성의 양도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계쟁지가 되어버렸다.
이곳의 영유에 집착호죠 씨는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크게 책을 잡히고 만다.


  강화조건이 된 주된 영토교환조건은,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호죠 씨가 확보한 시나노 사쿠ㆍ스와 2군과 카이 군나이郡内를 토쿠가와 씨에 양도하는 대신 죠슈 누마타(上州沼田, 토쿠가와 측에 붙어버린 사나다 마사유키의 영지였다)를 호죠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칸토의 패자를 자처하는 호죠 씨의 입장에선, 사쿠ㆍ스와ㆍ군나이보다도 누마타 쪽이 훨씬 중요했다는 걸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호죠 군이 철수한 후 이에야스는 신슈信州 평정전을 벌여나가면서, 우에스기上杉의 영지가 되어버린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막하 내지 요리키로 편입시켰다. 이후 호죠 가문과의 화친에 따른 누마타 성 문제가 화근이 되어 사나다 마사유키와 영원한 적대관계가 만들어지게 되나, 이는 본고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은 격변한 카미가타上方 정세에 가려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칸토 지방에서 이에야스가 지닌 주도권을 확정적으로 만든, 극히 커다란 의미를 지닌 전쟁이었다. 이에야스의 영지는 미카와三河ㆍ토오토우미遠江ㆍ스루가駿河ㆍ카이ㆍ시나노 5개 지방으로 불어났다. 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호각지세로 싸운 과거의 적敵ㆍ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판도를 상회하는 규모의 영지였다. 이후 이에야스가 군사적軍事的ㆍ정치적政治的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호각의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이에야스가 신겐의 판도를 이어받는 것을 지향하여 이를 성사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투를 통해 명성을 날리며, 지금까지는 말하자면 '무인武辺者' 이었던 이에야스는 이 전쟁에서 '뒷공작調略' 이라는 수단을 구사하면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을 배웠다. 이 역시 신겐이 득의로 삼던 수단으로, 이에야스는 카이 지방과 그 가신단이라는 눈에 보이는 신겐의 유산 뿐만이 아닌, 그의 싸움법戦い方까지 계승하였다. 그야말로 이에야스가 신겐의 화신化身이 된 순간이라 하겠다. 이후 이에야스는 뒷공작을 구사해가면서 천하天下로 가는 길을 달려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코ㆍ신 뒷공작에 커다란 공훈을 세웠던 요다 노부시게는 텐쇼 11년(1583) 2월에 이와오 성岩尾城을 공격하던 도중 화승총을 맞고 전사했다. 그리고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 역시 같은 해(1583) 겨울에 급사했다. 지나친 음주飮酒가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역사적 역할은 이에야스에게 신겐의 유산을 넘겨준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참고문헌>

  ● 스타마쵸 교육위원회 편찬《스타마쵸 역사須玉町史》
  ●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이와나미분코岩波文庫)
  ● 하기와라 타츠오《호죠 자료집北条資料集》(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彦左衛門《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쿄이쿠샤教育社)
  ● 코우세이 잇시시江西逸志子《오다와라호죠키小田原北条記》(쿄이쿠샤)
  ● 오오타 규이치太田牛一《신쵸코우키信長公記》(카도카와분코角川文庫)
  ● 코바야시 케이이치로小林計一郎《타케다ㆍ우에스기 군키武田ㆍ上杉軍記(신진부츠오라이샤) 
  ● 이케다 카이치池田嘉一《사전 우에스기 켄신史伝上杉謙信》(나카무라쇼텐中村書店) 
  ● 요네야마 카즈마사米山一政《사나다 가문 문서真田家文書》
  ● 우에다 시립박물관 편찬《사나다 씨 사료집真田氏史料集
  ● 타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가쿠슈겐큐샤学習研究社)
  ● 히라야마 유우平山優《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가쿠슈겐쿠샤)


덧글

  • 함부르거 2019/09/30 11:43 # 답글

    뒷공작이라면 이에야스보다 한술 더 뜨는 사람이 있었죠. 히데요시라고...ㅎㅎㅎ

    여담이지만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가장 완벽하게 실천한 걸작이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전투 이전의 공작과 이후의 처리까지, 전쟁이란 수단을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활용한 세계사에 얼마 안되는 사례지요.

    구 다케다령 병탄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좋은 학습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에야스란 인물은 이렇게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는 게 매력인 거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9/09/30 18:01 #

    히데요시야 워낙 '사람 후리기' 의 달인이니까요. ㅎㅎ

    세키가하라의 이에야스라면 무대 이면에서의 정치공작으로 적의 절반 이상 병력을 노는 병력 내지 배신자로 돌려세워 '도저히 지기 힘든 태세'를 미리 만들어놓고 전술적으로 불리해보이는 전장으로 태연히 진군한 게 대단하더군요.(서군 전투병력이 생각보다 분전했고, 배반을 약속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등 변수도 있긴 했지만)

    오쿠다이라 가문 하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 맏딸까지 시집보내는 등 뒷공작에 파격적인 대우를 동원해야 했던 30대 초반(1573~1575)의 이에야스에 비하면 세키가하라 때의 59세 이에야스는 정말 많이 노련해졌죠.
  • 2019/09/30 16: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9/30 18:1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담배피는남자 2019/10/09 21:03 # 답글

    나이먹은 이에야스는 자기가 하고 싶은걸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경우가 많더군요...ㄷㄷ
  • 3인칭관찰자 2019/10/09 22:43 #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실력도 갖췄고 그걸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주변상황이 유리하게 움직이는 행운도 따라줬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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