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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장 인기의 뒷사정》메이지 소년들의 영웅 인기투표 역사



  본 글은 2008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전국무장ㆍ인기의 뒷사정戰國武將の人氣のウラ事情》제 6장 <전국무장, 죽은 후의 인기다툼> 중 8편인【 메이지 시대 서민이 투표한 영웅들의 순위 】부분(p. 217 ~ 223)을 번역한 것입니다. 경술국치 1년 전(1909)의 영웅 인기투표를 통해 이 잡지의 주요 독자였던 일본의 10대 소년들이 숭상하던 주된 위인들, 그리고 소년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 생각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으론 절판된 상태이나, 아마존 킨들 등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 타이쇼 시대大正時代에 걸쳐 모험소설 작가冒険小説家로 활약한 오시카와 슌로押川春浪는《모험세계冒険世界》라는 이름의 잡지를 주재主宰하고 있었는데, 이 잡지는 메이지 42년(1909) 정월호 부록으로「전세계 영웅순위」라는 것을 주었다. 이는 슌로의 "영웅을 숭배하자" 는 구호에 기반해 독자들에게 영웅 투표를 하게 한 후 그 결과를 정리한 문서였다.

  이러한 물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 내용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고 있었기에 이전부터 신경이 쓰이던 것을, 최근 역사연구가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씨로부터 복사본을 선물받으면서 이제야 그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출처 :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순위(랭킹)는 '동양의 인물東洋之人''서양의 인물西洋之人' 로 나뉘어 있고 일본인은 당연히 전자 쪽에 포함된다. 이 투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행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동양 쪽의 요코즈나(横綱, 1위)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며, 서양 쪽의 요코즈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히데요시가 요코즈나고 몽골モンゴル의 칭기즈 칸成吉思汗이 오오제키(大関, 2위)인 걸 보면 '우물 안 개구리' 라는 질책을 면하기 힘들어보이나, 당대 사람들 - 특히 청년靑年들 - 의 감각은 이러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동양 측은 이 아래로 세키와키(関脇, 3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코무스비(小結, 4위)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를 거쳐 이 아래로는 모두 마에가시라前頭라 불리며 65번 마에가시라(69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정도로 랭킹 범위가 넓은 만큼 두드러진 전국시대 무장이 상당수 등재되었으나 랭킹 밖으로 밀려난 자 역시 적지 않다. 메이지 말엽의 사람들이 어떤 무장에게 주목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선정된 전국시대 무장의 랭킹 역시 흥미가 가는 점이다. 마에가시라 최상위가 5번 마에가시라(9위)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고, 마에가시라 최하위는 64번 마에가시라(68위)인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다.

  히데요시 / 이에야스가 TOP 3에 든 건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그들 다음에 마사무네가 나올 게 아니라 그보다 상위에 놓여도 되었을 법한 전국시대 무장들이 더 있지 않았을까 싶은 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제 3장에서 다룬「전국 7웅」들의 순위를 보면 요코즈나인 히데요시는 별개로 두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6번 마에가시라(10위) /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8번 마에가시라(12위) /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10번 마에가시라(14위) /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이 11번 마에가시라(15위)이며, 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순위권 밖이다.

게임《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에 등장하는 모리 모토나리일러스트
(출처 : 나무위키 '모리 모토나리(노부나가의 야망)' 항목)


  이어서 같은 항목에서 언급한「서일본 7웅」의 랭킹을 살펴보면 모리 모토나리 외에는 '전멸全滅' 하였다.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정도의 인물도 들어가는데 어째서 호죠 우지야스와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가 순위권 밖인지가 궁금하기도 하나, 그것이 바로 '인기투표가 인기투표인' 이유이리라. 반대로 감탄한 점이 있다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처럼 메이지 이후에도 평판이 그닥이었던 인물들이 어느 정도 구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미츠나리는 32번 마에가시라(36위), 미츠히데는 50번 마에가시라(54위)에 랭크되었다.

게임《귀무자》PS4 리마스터 버전(북미판)의 아케치 사마노스케(출처 : 일본 아마존)


  인기라는 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기 마련이니, 이 투표가 오늘날에 행해졌다면 오다 노부나가가 6번 마에가시라에 그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전국무장은 아니지만 54번 마에가시라(58위)에 올랐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료마의 집안이 자신들의 선조라 주장하였던 아케치 사마노스케明智左馬助가 료마 바로 밑에 등재된 건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사위로, 본래 이름은 야헤이지 히데미츠弥平次秀満였다. '호수 건너기 일화' -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다만 - 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대상이란 화두로 생각해볼 때, 전국시대 무장은 아니었지만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14번 마에가시라(18위)에 오른 것도 의외라 하겠다. 마사시게는 원래 에도 시대江戸時代부터 인기 있던 인물로 훗날 황국사관皇国史観적인 견해가 정착된 이후에는 단순한 영웅에 그치지 않고 '성웅聖雄' 이라고 불러야 하는 특별한 존재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관의 한 축을 구성하는 '남조정통론'은 이 시점에선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 문제가 의회議會에서 논의되어 큰 소란이 난 건 이 인기투표가 발표된 바로 다음 해인 메이지 43년(1910)의 일이다.

  전국시대 무장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36번 마에가시라(40위),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가 48번 마에가시라(52위), 고토 모토츠구가 64번 마에가시라(68위)인 것도 의외라면 의외라 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패전 이전戰前 강담세계講談世界의 거물들이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순위가 너무 낮은 편이다.

게임《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 등장하는 사스케
(출처 : 나무위키 '사스케(전국무쌍)' 항목)


  생각해보면,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건 요세寄席 등에서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강담보다도 읽을거리로서의 강담이 더욱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 된다. 속기강담이라 불리던 이러한 부류의 서적은 이전에도 출판되었지만, 속기강담 시리즈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는 타츠카와 문고立川文庫가 창간된 건 메이지 44년(1911)이었다. 그리고 이 문고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건 타이쇼 3년(1914)에 출간된《인술 명인 사루토비 사스케忍術名人ㆍ猿飛佐助》이후의 일이므로,《모험세계》투표에 참가한 사람들에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덧글

  • windxellos 2019/09/28 01:26 # 답글

    제가 예전에 물건너에서 쇼와 18년(1943)에 나왔던 책을 하나 손에 넣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게 하필 '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의 전략비교론' 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는 책이었습니다.

    '동양 쪽의 요코즈나(横綱, 1위)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며, 서양 쪽의 요코즈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라는 윗글의 문구를 보니 그 책이 번듯 떠오르네요.

    참고로 그 책의 결론은 '(두 영웅을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우리는 히데요시 쪽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였습니다. 나온 시대가 시대라 그랬겠지만 후세에 읽는 입장에서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죠. ㅎㅎㅎ
  • 3인칭관찰자 2019/09/28 09:06 #

    아무리 그 때가 전쟁 중인데다 요시카와 에이지 태합기가 한창 히트치던 시절이라지만.. ㅋㅋㅋ

    어쩌면 windxellos님께서 구하신 책을 쓴 사람도 소년 시절 위의 인기투표를 읽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대 소년이 34년 후에 사회인의 입장에서 동양의 1등 영웅과 서양의 1등 영웅을 비교하는 책을 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전형적인 우물 안 개구리 결론을 낸 게 많이 유감이지만요.
  • windxellos 2019/09/28 14:05 #

    어쩌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저자가 이토 마사노스케(伊藤政之助, 일본육군 소장으로 퇴역)인데 당대에는 나름 전사 분야에서 유명했는지 일본위키에서도 약력과 주요 저술목록이 확인 가능하고 몇몇 책은 전후에 복각됐거나 지금도 e-book으로 구입이 가능하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의 생몰이 일본위키에는 1877-1954로 돼 있습니다. 윗글의 특집기사가 나왔을 때는 이미 청장년이었겠고 예의 잡지도 청년지였던 것 같으니 아마도 저걸 읽기는 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이 사람 또한 저런 것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장본인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 3인칭관찰자 2019/09/28 17:41 #

    말씀 듣고서 대충 구글링해 보니 이토란 사람 러일전쟁 참전군인이더군요 ㅋㅋㅋㅋㅋ 1909년 10대 소년이란 가설은 택도 없겠네요. ^^;;;;; 물론 그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수는 있겠지만요.
  • BigTrain 2019/09/28 23:35 # 답글

    러일전쟁도 이기면서 국민들의 자신감, 혹은 국뽕 의식이 하늘을 찔렀나 봅니다. 징기스칸을 히데요시 밑으로 깔다니... ㄷㄷㄷ
  • 3인칭관찰자 2019/09/29 07:38 #

    역경을 극복하고 입신했다는 점에선 둘 다 당시 일본 젊은이들의 기호에 부합하는 인물이지만 역시 팔이 안으로 굽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정복의 스케일부터가 급이 달랐긴 해도 이때는 그들 입장에선 국뽕이 차오를 시기였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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