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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타케다 가문의 유산을 둘러싸고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55호(2002년 10월호) 52~67쪽의 기사인,《타케다 유령 쟁탈전武田遺領爭奪戰 ~ 카이ㆍ시나노 획득에 담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를 향한 포석 ~》을 번역한 것으로 후쿠다 마코토福田誠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1582년 3월에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고, 그로부터 고작 3개월 후에 혼노사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횡사하면서,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카이ㆍ시나노 두 지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쿠가와ㆍ호죠ㆍ우에스기의 3파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용과 호랑이, 서로 물어뜯다]

  이에야스의 카이 평정

  카미가타上方로 출진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6월 14일, 드디어 오와리尾張 지방 나루미鳴海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대응속도에 비해 이에야스의 진격은 너무나도 느릿느릿했다. 對 아케치 전쟁이라는 오다 가문織田家 내전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이에야스의 본심이 명백히 드러난 바라 하겠다. 바로 그 전날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벌어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에야스는 나루미에 군대를 정지시키는 한편, 사카이 타다츠구 부대를 당시의 요항要港이었던 츠시마津島까지 진군시켜 카미가타의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야마자키 전투 전적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豊臣秀吉')


  이 6월 14일은 카이甲斐 지방에서도 커다란 이변異変이 일어난 날이었다. 이에야스의 진의를 의심한 카와지리 히데타카川尻秀隆가 이에야스가 파견한 혼다 노부토시本多信俊를 죽여버렸던 것이다. 이 돌발사태椿事에 커다란 자극을 받은 자들이 카이 지방의 토호들로, 그들은 잇키를 일으켜 다음 날인 15일 카이 지방 탈출을 시도하던 히데타카를 이마쿠보今窪에서 생포ㆍ살해해버렸다. 이렇게 주인을 잃은 카이 지방은 소란에 빠졌다.

  이 혼란통에 편승하여 카이 지방을 정복하려 했던 자가 호죠 가문과 결탁한 오오무라 산에몬大村三右衛門이었다. 그러나 원군援軍으로서 도착해야 했을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는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를 따라 코즈케上野 지방으로 침공했기에 호죠의 원군을 얻지 못했던 오오무라 산에몬은 잇키 진압에 나선 토쿠가와 측의 아리이즈미 노부츠라有泉信閑 / 호사카 히타치노스케穂坂常陸介가 이끄는 아나야마 집단穴山衆과 오오노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패사敗死하고 말았다.(오오노 성채 전투大野砦の合戦) 《카이코쿠시甲斐国志》에 따르면 6월 17일 ~ 18일에 벌어진 일이라 한다.

에도 시대에 그려진 아나야마 바이세츠(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穴山信君')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의 1848년작 그림.


  이에야스가 카미가타 출진에 앞서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를 故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의 영지에 파견하여 이곳을 평정했다는 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타케다 씨武田氏와 혈연관계에 있던 바이세츠가 타향異鄕에서 조난사遭難死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에야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타케다 가문을 무너뜨린 바이세츠의 내통과 변절 / 이가 답파伊賀越え 당시 이에야스에게 보인 경계심 등을 감안하면, 만에하나 바이세츠가 무사히 카이로 돌아갔다면 혼란에 편승하여 타케다 가문 재건을 도모하였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세츠의 죽음을 명분삼아 아나야마의 옛 신하遺臣들을 수월히 막하에 거둬들일 수 있었던 이에야스는, 카이 진출의 발판을 보다 쉽게 쌓을 수 있었다.

  한편,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에게도 카이甲斐ㆍ시나노信濃의 타케다 옛 신하들을 항복하도록 설득降誘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카이 지방에 들어간 노부시게가 카시와자카柏坂에서 요다 가문을 상징하는 종鐘이 그려진 깃발을 게양하자 순식간에 그곳으로 3천 명의 병력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잇키 발발 당시 이미 수많은 카이 사람들이 토쿠가와 편에 붙어 있었고, 오오노에서의 승리는 타케다의 옛 신하들을 활용한 카이 뒷공작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루미에 머무르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6월 19일,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카미가타를 평정했다" 는 전갈을 받고, "이 이상의 진군은 필요 없다" 는 내용의 이야기에 잘 됐다는 듯 군을 물렸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 최대의 전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그는 비천한 출신성분 때문에 다른 무장들로부터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히데요시가 주군의 원수를 갚는 커다란 공적을 세운 이상 논공행상論功行賞ㆍ오다 가문의 가독家督을 둘러싼 논쟁으로 비화될 것임이 확실했다. 코신甲信 두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이에야스의 입장에서 오다 가문의 분쟁에 말려드는 건 미혹스런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6월 21일,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엔슈 하마마츠 성遠州浜松城으로 돌아왔다. 고작 이틀만에 귀환한 것으로, 출진 속도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온 셈이다. 카이 지방이 소란상태에 빠져있다는 정보는 이미 이에야스에게도 들어와 있었기에, 귀환한 후 곧바로 카이 지방으로 출병할 것을 결의한 상태로 하마마츠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마마츠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신속히 신슈信州 방면에서의 계략에 공을 세운 카이 츠가네 집단津金衆의 코이케 노부타네小池信胤에게 은상恩賞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내고, 아나야마 집단의 아리이즈미 노부츠라에게는 오오노 성채 전투의 전승戰勝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카이ㆍ시나노 지방을 향해 온갖 포석을 놓았다. 호죠 씨가 카이 지방에 공작의 마수를 뻗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고 이미 군나이郡內 일대가 그들에게 넘어가 있었던 만큼, 이에야스 본인이 출진하기에 앞서 카이 지방의 통제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었다.
 
 
  호죠 우지나오의 시나노 침공

  시나노에서는 이에야스가 파견한 요다 노부시게가 사쿠 군佐久郡의 요충지인 코모로 성小諸城에 입성했다.《요다키依田記》에 따르면 이 때가 6월 20일 무렵이었다고 한다. 사쿠 군은 코즈케 지방에서 시나노로 들어오는 입구로, 호죠 씨의 시나노 진출에 앞서 선수를 친 것이다.

  시나노 지방 역시 카이와 마찬가지로 무주無主 상태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 모리 히데요리毛利秀頼에게 신슈의 영지를 분배했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신슈의 토호들 중에서도 영지를 보장받은 자들이 있었다. 키소 군 후쿠시마木曽郡福島의 키소 요시마사木曽義昌 / 이나 군 마츠오伊那郡松尾의 오가사와라 노부미네小笠原信嶺 / 사쿠 군 마에야마前山의 반노 교부쇼유 / 치이사카타 군 우에다小県郡上田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 사라시나 군 야시로更科郡屋代의 야시로 카츠나가屋代勝永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새로이 입봉한 영주들이 싸그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즉각 독립상태로 돌아와, 시나노 지방은 순식간에 토호들이 할거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타카시마 성(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高島城')
에도 시대 내내 스와 가문 2만 7천 석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그 외에도 오가사와라 사다타네小笠原貞種가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후원하에 후카시 성深志城을 탈환했고, 타케다 가문 멸망으로 로닌浪人이 되었던 스와 요리타다諏訪頼忠도 옛 가신들을 규합하여 아버지와 조상 이래의 본거지였던 스와 군 타카시마 성諏訪郡高島城에 입성하였다.

  7월 3일, 이에야스는 하마마츠를 출진하여 카이 지방으로 향했다. 동시에 아리이즈미 노부츠라에게 "선봉으로 출진한 혼다 히로타카本多広孝ㆍ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ㆍ이시카와 야스미치石川康通 등을 안내해 신푸 성新府城으로 옮겨가, 신슈에 대한 공작에 힘써라." 고 지시했다. 카이 지방은 군나이郡內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토쿠가와 측이 점령했으나,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일대를 제외한 시나노 지방에는 아직 결정적인 세력이 진입하지 않았고, 독립한 토호들의 꿍꿍이도 얽혀 있어서 정세는 유동적이었다.

  한편 이에야스는 이나 군의 오가사와라 노부미네小笠原信嶺ㆍ시모죠 요리야스下条頼安ㆍ치쿠 요리우지知久頼氏, 그리고 스와 군의 스와 요리타다를 투항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시나노 남부南信濃를 지배하에 편입시켰다. 사쿠 군도 이에야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카와나카지마 4군 + 오가사와라 사다타네의 치쿠마 군 + 사나다 마사유키의 치이사카타 군을 지배하에 둔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함께, 시나노 지방은 한동안 두 세력에 의해 분할된 듯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의 난입乱入으로 시나노의 정세가 크게 변화했다. 코즈케上野 지방을 제압한 우지나오는 7월로 접어들어 우스이 고개碓氷峠를 넘어와 사쿠 군으로 침공했다. 그 병력은 4만 3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코모로 성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파견한 요다 노부시게가 있었으나, 호죠 군의 본격적인 침공에는 저항할 힘이 없어 본거지인 아시다코야芦田小屋로 후퇴했다. 우지나오는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사쿠 군을 제압하였다.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의 사나다 마사유키 일러스트.
(출처 : 나무위키 '사나다 마사유키' 항목)


  이를 보고서 움직인 게, 우에스기 측에 복속하였던 사나다 마사유키였다. 마사유키는 3월 타케다 가문이 멸망하기 직전에 호죠 가문과 접촉하여,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를 버리고 호죠 측으로 갈아타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이는 시나노 지방이 오다의 영지가 되면서 일단 없던 일이 되었으나, 이 시점에서 신하로서의 복속이 실현되었다. 우에스기ㆍ호죠ㆍ토쿠가와 3대 세력 사이에서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를 거듭하며 '겉과 속이 다른 야비한 자表裏比興の者' 라 불리게 된 마사유키의 이반극離反劇이 시작된 것이다.
 
  호죠 측에 붙은 마사유키는 그들의 후원을 입고 카와나카지마를 노렸다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카게카츠도 카와나카지마로 출진, 마사유키와 내통하고 있던 코사카 겐고로高坂源五郎를 죽이고 쿠라호네 성倉骨城에 재진在陣하며 사나다 군의 진출을 경계했다. 카게카츠는 8월에 호죠 군이 스와로 남하할 때까지 계속 체진했다.

  그러나 카게카츠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교토에 머물러 있던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의 3남 사다요시貞慶가 시나노 지방의 소란을 전해 듣고 귀향하여 7월 17일 후카시 성을 공격, 삼촌 사다타네를 격파하고 후카시 성을 탈취한 것이다. 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원하에 벌어진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7월 9일 코후츄古府中에 도착했다. 타케다의 옛 신하들과 토호들은 이에야스 밑으로 몰려들어 신속臣屬을 서약했다. 카이 지방을 복속시키던 초기에 이에야스가 중시한 자들이 무카와 집단武川衆ㆍ츠가네 집단津金衆에 속한 토호들이었다.

  타케다 가문의 군대는 무사 신분士分의 유력무장들을 요리오야로 삼아, 그 밑에 도신同心ㆍ히칸被官들을 요리코로 배분하는 속칭 '요리오야 요리코 제도寄親寄子制' 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하나의 집단이 요리오야의 이름 아래 'ㅇㅇ 집단' 이 되어 타케다 군을 형성하게 된 것인데, 그 외에도 요리오야 없이 구성된 '쿠니슈国衆' 라는 자들이 있었다. 카이 지방의 접경지대 방비에 투입되던 변경 무사단인 그들은 강력한 혈연적인 연결고리 아래 '잇키一揆' '도黨' 등으로 불렸다. 당연히 그 지역의 지리에도 밝아서, 카이 지방 접경지대를 무대로 삼은 이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 에서는 무카와 집단과 츠가네 집단이 토쿠가와 측의 첨병이 되어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코즈케 지방에서 시나노로 침입한 우지나오도 이에야스와 마찬가지로 지리에 밝은 쿠니슈들을 중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우지나오는 우선 사쿠의 토호 이노우에 젠쿠로井上善九郎ㆍ이데 젠시로井出善四郎 등을 투항시켜, 그들로 하여금 카이 지방을 정찰케 했다. 그런 한편으로 사쿠 지방에서 와카미코若神子에 이르는 진격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츠가네 집단도 포섭하기 위해 움직여, 타카미자와 타지마노카미高見沢但馬守 등의 츠가네 집단 일부를 투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우지나오는 사쿠 군을 쭉 내려가는 대신 스와 방면으로 향했다. 토쿠가와 편에 붙은 츠가네 집단의 산간지방 수비가 견고했던 데다, 이전에 토쿠가와 측에 항복했던 스와 요리타다가 배반하여 호죠 씨에게 복속하였던 것이다. 7월 13일의 일이었다.

사카이 타다츠구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酒井忠次')


  이에야스의 중신重臣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는 요리타다와 합류하기 위해 3천 병력을 이끌고 스와로 향하던 중이었으나, 7월 14일 요리타다의 이반이 명백해지자 타카시마 성을 포위했다.《이에타다닛키》에 따르면 같은 달 22일에는 타카시마 성 공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7월 24일, 야츠시로 군 카시야마 산八代郡樫山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이곳에서 무카와 집단 소속자 64명과 대면한 후 코슈 방위를 위한 제장들의 부서를 정했다. 무카와 집단의 진채에는 핫토리 (한조半蔵) 마사나리服部正成를 두었고, 와카미코에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ㆍ오오스카 야스타카大須賀康高ㆍ혼다 히로타카를 배치했다. 오오노 성채에는 마츠다이라 키요무네松平清宗ㆍ나이토 이에나가内藤家長, 그리고 타케다의 옛 신하였던 사에구사 토라요시三枝虎吉를 농성시켰다. 야츠시로 군 야시로에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를 배치해, 군나이에 주둔한 호죠 군에 대비하게 했다.
 

덧글

  • 함부르거 2019/09/10 10:30 # 답글

    히데요시한테 천하인 자리 내주고 이에야스는 실속만 챙겼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실속 챙기느라 꽤나 치열하게 싸웠군요. 역시 세상에 날로 먹는 일은 거의 없네요. ^^;;;
  • 3인칭관찰자 2019/09/10 12:09 #

    칸토의 거대세력인 호죠 가문과 병력비율 1대 3 ~ 1대 4 정도의 열세를 감수하고 싸워야 했던 만큼 이에야스로서도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싸움이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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